도로에 수상한 사람이 나타났다. 덥수룩한 수염에 흰 머리 길게 휘날리며 배낭 하나 맨 사람이 무작정 도로를 걸어다니고 있다. 이 사람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 뒤를 따라가봤다.

묵직해 보이는 배낭 뒤에는 2개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다. ‘비정규직 차별철폐’와 ‘원직복직’.


이 사람은 다름 아닌 데이콤 해고자 이승원 전 데이콤노조 위원장.

이 전 위원장은 지난 2000년 11월8일, 단협개악안 철회와 데이콤의 독립경영체제를 요구하며 벌인 80일간의 파업으로 2001년 7월21일 해고됐다. 이후 중앙노동위원회로부터 '부당해고' 판정을 받고 복직됐지만 지난해 10월 회사에서 노동위 복직 판정에 행정소송을 제기해 '부당해고 무효' 판정을 받아 다시 해고됐다.

이에 이 전 위원장은 함께 해고됐던 이학성 데이콤노조 수석부위원장과 함께 지난 4월25일 의정부를 시작으로 2000km 80여일 전국 도보순회투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700여km를 걸었을 때 이학성 수석부위원장이 경추간판 탈추로 인한 3주 요양 판정을 받아 도보 투쟁을 계속할 수 없어 현재는 이승원 전 위원장이 홀로 도보투쟁을 진행 중이다.

이번 도보순회투쟁의 목적은 비단 원직복직뿐만이 아니다. 이 전 위원장은 자신의 원직복직보다 비정규직 차별철폐를 더 힘주어 말한다.

“데이콤의 전체 직원이 1,500명 가량인데 이 중 비정규직이 440명 정도예요. 정규직과 동일업무를 하는데도 임금은 정규직의 55~60% 정도밖에 안 돼요. 그래서 현재 진행 중인 임단협에서도 비정규직 1년 단위 계약을 다년 계약으로 전환하고, 정년과 노조활동을 보장하는 것을 주요하게 내세우고 있고 이를 조합원들과 공유 중입니다.”

파업 뒤 위축된 조합원 사기 충전

지난 20일, 1,380여km를 걷고 수안보에 도착한 이 전 위원장을 따라 무작정 길을 나섰다. 오늘의 목표는 수안보에서 데이콤 충주지점까지로 약 22km 거리다. 22km면 50리가 넘는 길. 그 까마득한 거리에 벌써부터 기자는 머리가 어질어질한데, 이 전 위원장은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은 가뿐해서 부담이 없네요. 보통 30, 40km를 걷는데…”라고 말한다. 기자는 40km를 걷지 않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첫 발을 띠었다.

보통 오전 8, 9시부터 도보를 시작하지만 이 날은 조합원 한 명이 5일간의 휴가를 내고 같이 걷겠다고 해 조합원이 도착한 오전 10시, 수안보 터미널을 떠났다.

배낭에서 휘날리는 깃발에서 말해주듯 이 전 위원장은 해고자 복직과 비정규직 차별 철페를 위해 걷고 있지만 다른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2000년 파업 뒤 현장이 많이 죽어있고, 조합원들이 심리적으로 많이 위축돼 있어요. 그래서 도보투쟁을 하면서 조합원들을 만나 조직화하려는 목적이 있죠. 다행히 조합원들 사이에 많은 변화가 오고 있어 뿌듯합니다. 처음에는 회사쪽 눈치보느라 만나는 것도 꺼려하던 조합원들이 지금은 사무실에서도 당당히 일어나 인사하고, 지난 파업을 평가하면서 이대로 밀려선 안된다고 얘기하기도 해요. 조합원들이 예전의 단결된 의식으로 돌아오는 것 같아 보람을 느낍니다."

보람도 있지만 힘든 일도 있을 터, 이 전 위원장은 '외로움'이라고 답했다. 땡볕 아래서 아스팔트 길을 혼자 걷다보면 힘들어도 의지할 곳이 없는 것.

힘든 일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도보투쟁을 시작한지 4~7일째 되던 날은 발 이곳저곳에 물집이 잡힌 것은 물론, 찢어지고 피가 나 걸을 수 없는 지경까지 됐다. 그럼에도 짜여진 일정 때문에 걸을 수밖에 없어서 쉬지 않았다. 또 도착하는 곳에 집회가 있으면 빠짐없이 참석해 연대를 해주기도 했다. 광주에서는 민주노총 주최로 열린 '5월 정신 계승 전국노동자대회'에도 참석했고, 부산에선 한솔교육 집회 등에 참석해 투쟁사를 하기도 했다.

비정규직 철폐 해달라던 '장충동 족발' 사나이

두달여 동안 서울,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 전국 각지를 돌며 36개의 데이콤 지사와 지점을 방문했다. 뭔가 특별한 일이 있을 법도 한데, 아니나 다를까, 부산 송정 해수욕장을 지날 때 ‘장충동 족발’이라고 쓰인 다마스 차량 앞에서 어떤 사람이 ‘비정규직 꼭 철폐해야 합니다’라면서 봉투를 건냈다고 한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 ‘장충동 족발’ 사나이는 ‘자세한 건 묻지마라. 그저 비정규직 노동자일 뿐이다’라고 얘기했단다.

이 전 위원장은 “이 땅의 노동자가 가지는 생각들이 다 같은 것이라는 걸 느꼈어요. 그 사람은 노조 활동가나 조합원도 아니고 정말 저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인데 선뜻 투쟁기금을 전달하는 것을 보니 자꾸 기억에 남네요”라며 "힘들더라도 이 투쟁을 멈출 수 없는 이유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외에도 이 전 위원장에게 힘을 실어준 사람들은 많다. 걷다가 마주치는 화물연대 조합원들은 경적을 울리며 응원하기도 하고, 차를 멈추고 인사를 나눈 사람들도 있었다.

하동의 북촌면을 지날 때는 동네 노인들이 냉커피를 타다주며, 비정규직이 뭐냐고 물어서 30, 40분간 설명회를 진행하기도 했단다. 얘기를 다 듣고 난 노인들은 비정규직이 문제가 있다면서 자식들 얘기를 꺼내며 구조조정의 의미를 묻는 등 관심을 나타냈다고 한다. 용어만 모를 뿐이지 비정규직과 구조조정 등의 문제는 이미 노인들도 다 알고 있는 것에 놀랐다고 한다.

한 시간 가량 지나 말을 건내기도 힘이 들어 조용히 걷고 있는데, 이 전 위원장이 “안개가 낀 걸 보니 오늘 오후는 많이 덥겠네요”라고 말을 건낸다. 아무래도 일기에 따라 걷는 것에도 지장을 많이 받을 것 같았다.

“비가 오면 체력소모가 2배 가까이 들어요. 우비를 입는다고 해도 비가 스며들어서 옷은 무겁고, 가지고 있던 MP3는 이미 고장났고, 휴대폰도 제대로 작동을 안하네요.”

다음 주부터는 장마가 시작된다는데, 이 전 위원장의 도보 투쟁이 더 힘들어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그러나 이 전 위원장의 도보 투쟁이 하루 하루를 더해 갈수록 조합원들의 사기도 많이 진작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사쪽에서도 이 전 위원장의 도보 투쟁이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회사쪽 탄압에도 조합원은 오히려 '똘똘'

첫 시작이었던 의정부에서는 조합원들이 모두 나와 도보투쟁 현수막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는데, 대다수 조합원들이 근무시간에 이 사진을 찍었다는 이유로 관할 지사장이 문책을 당했다고 한다. 이후 인천지사에서는 아예 출입문을 봉쇄당해 들어갈 수조차 없었으나 노조가 항의 집회를 개최해 3시간여만에 겨우 인천지사에 들어가 조합원들을 만났다.

“소극적인 지사장 같은 경우는 영업이나 점검을 나가라고 직원들을 아예 밖으로 보내버려요. 그래서 가는 길목에서 기다리거나 전화를 걸어 격려해주는 조합원도 있고 그랬어요. 임단협 교섭에서 회사쪽은 해고자 문제를 수면에 가라앉게 하라고도 얘기했다고 하더라고요."


2시간 정도를 걸어 음식점에 도착했다. 충주까지 남은 거리는 12km. 이날은 다행히 적절한 시간에 음식점을 찾을 수 있었지만 국도를 따라 걷다보면 음식점을 찾을 수 없어서 제때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은 물론 점심을 굶고 걸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먹을 것과 관련된 고충은 또 있다. 고생한다고 조합원들이 하나씩 챙겨주는 음료수나 간식거리 등이 그대로 짐이 돼 도보를 더 힘들게 하는 것. “조합원들의 성의를 생각해 안받을 수는 없고 짊어지기도 힘들고, 말은 못하고 고민한 적이 많았죠”라고 실토한다.

점심을 먹은 뒤 오후 1시30분께 다시 길을 재촉했다. 오전까지는 선선하던 바람도 오후가 돼서는 뜨거운 공기로 바뀌었고 아스팔트에서 전해져오는 복사열이 걷기를 더 힘들게 한다. 더위와 목마름 등으로 기운이 다 빠져버려 걸으면서 진행되던 인터뷰는 중단되고 무작정 걷기를 반복했다. 1시간당 걷는 거리는 평균 5km, 10~15분간 휴식을 취하고 나면 2km 정도까지는 걸을 만 하다. 지나가는 화물차에서 화물노동자가 손을 흔든다. 그것을 보니 다시 힘이 솟는다.

충주지점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4시30분께, 이 전 위원장은 조합원들의 고충을 묻고, 현 임단협 교섭 상황과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등 이야기를 풀어갔다. 그렇게 하루가 저물었다.

다음달 12일께 용산사옥 앞에서 해단식을 가질 예정인 이 전 위원장은 현재까지도 쉬지 않고 매일 30, 40km를 걷고 있다. 22일 현재 600여km를 앞두고 있는 이 전 위원장의 힘찬 걸음에 손 한번 흔들어 줘야할 시기인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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