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봄은 노동운동에게는 더없이 잔인한 계절이었다. 검찰의 칼날이 노동조합의 비리를 예리하게 헤집고 곳곳에서 노동운동은 뭇매를 맞았기 때문이다. 자동차 대기업에서 취업 장사에 항운노조, 택시노련 지도부와 한국노총 전 위원장, 부위원장이 이런저런 비리로 구속되었다.

여기에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의 폭력사태와 금융노조, 금속노조의 선거파동까지 겹쳐져 노동운동은 그야말로 혼돈과 부끄러움의 연속이었다.
 

사태가 이러하니 보수언론들은 노동운동 전체를 매도하여 재갈을 물리는데 열을 올렸고 노동운동은 그저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한국노총이 급하게 개혁방안을 마련하고 검찰 수사가 대체로 마무리되었다고는 하지만 노동운동이 입은 상처는 너무도 깊고 쓰리기만 하다.

잔혹한 노동조합 정화의 역사

노동조합에 대한 권력의 메스는 잔혹하다. 권력의 개입은 한 사건의 해결에 그치지 않고 수많은 활동가를 희생양으로 삼아 노동운동을 자신의 뜻대로 순치시키려 한다. 노동조합 스스로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을 가로채 처리하면서 새로운 제도적 틀로 노동운동을 옭아매는 방식이다. 우리는 그런 역사의 얼룩과 운동의 단절을 여러번 경험하였다. 196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 70년대 유신체제, 그리고 1980년 여름 전두환 신군부정권의 폭력적인 횡포가 그 큰 예였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박정희 정권은, 1960년 4월혁명 후 청산되지 않았던 부패노조 간부들을 제거하면서 아울러 자주, 민주를 지향하는 새로운 운동세력도 축출해버렸다. 그리고 자신이 지명한 사람들로 노동조합을 위로부터 재건하게 하고 노동법의 독소조항과 확대된 권력의 개입장치를 이용하여 노동운동을 억압하였다.

박정권의 억압체제는 1970년 전태일 열사의 죽음으로 파열구가 마련되었다.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기 위해 노동자들은 절박한 요구를 내놓고 노동운동의 전환을 기대했다. 70년대 민주노조는 그 귀결이었다. 그러나 유신독재정권은 권력기관을 동원하여 노동자들의 요구를 묵살하였고 누적된 노동자들의 노조민주화 요구는 1980년 봄에 폭발적으로 분출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결실을 거두지 못한 채 전두환 신군부정권에 의한 무자비한 노동탄압으로 다가왔다.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을 잔혹하게 진압한 전두환 정권은 이른바 정화조치라는 것을 단행하였다. 정화조치란 70년대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상층 노조간부들을 제거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민주노조들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었다.

한국노총 위원장을 비롯한 12명의 산별노조 위원장이 제거되었지만 자주성, 민주성, 투쟁성을 내세우며 완강한 투쟁을 해왔던 민주노조의 핵심간부들도 숱한 수배, 구속, 고문, 협박을 받으며 현장으로부터 유리되었다. 이후 신군부는 노동관계법을 전면 개악하여 노동운동을 철저하게 무력화하였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질풍노도처럼 전개되고 민주노조운동이 급성장하지만 권력은 끊임없이 ‘노동의 길들이기’를 밀어붙였다. 그러나 그 시도는 대부분 실패하였고 노동운동은 96년 겨울 총파업을 통해 역량을 과시하였다. IMF관리체제의 치명적 타격을 노동운동은 입었지만 박정희나 전두환식의 무지막지한 길들이기를 허용할 만큼 취약하지는 않다.

이러한 일련의 역사적 사실과 최근의 사태는 노동운동 스스로 모순을 해결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권력의 침탈을 받을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다만 그 방법이 과거 막무가내의 폭력적인 것에서 보다 정교하고 치밀하게 바뀌었을 뿐이다.

여전히 권력기관의 압박은 거침이 없다. 검찰은 노동조합 비리를 찾아내 가차없이 철퇴를 가함으로써 노동운동의 도덕성을 땅바닥에 내동댕이 치는 한편 보수언론은 온갖 논리를 동원하여 노동운동을 매도하여 설 땅을 좁히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은 이 흐름을 타고 자신의 이해를 관철시키려 든다.

지난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들은 그런 조짐을 예감케 해준다. 경총은 국회에 계류 중인 비정규직 관련 법안에 대해 “더이상 협상은 없다”고 선언하였고, 노동부장관은 한발 더 나아가 노조 규제의 필요성을 언급한 데 이어, ‘로드맵’은 노사합의를 기대할 수 없어 기존 방침대로 연내에 국회에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한나라당 공성진 의원은 외부감사제도를 법안으로 제안하였다. 강성노조의 경영침해를 규제해야 한다는 소리도 심상치 않다.

현장의 냉소주의 위험 극복할 방책 마련해야

노동계에서는 지금도 볼멘 소리가 들려온다. 취업비리는 근원적인 책임이 있는 회사는 제쳐두고 들러리 노조 간부만 부각시키고 있지 않은가? 정치인과 재벌들은 더 큰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있는데 왜 노동자들에게만 도덕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대고 엄혹하게 재단하는 것인가? 노동계 비리사건 폭로는 노동운동 때리기를 위한 고차원의 기획물이 아닌가?

그러나 어설픈 변명일 뿐이다. 사건의 추악함은 두말할 여지 없이 분명하고 도덕성은 노동운동이 지켜야 할 청정함과 순결함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결국 노동운동이 취해야 할 길은 철저히 반성하고 스스로를 개혁해내는 일이다. 그리하여 조합원의 지지와 노동자 대중의 신뢰를 회복함으로써 이 사회를 발전시키는 중심축의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한다.

민주노총은 비정규노동 관련 법안 처리 등 현안 때문에 기아차사건 때 약속했던 철저한 진상규명과 강력한 조치를 아직 내놓지 않았지만 조직혁신의 대안 마련에 골몰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노총은 지난 6월1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개혁방안을 내놓았다. 대규모 선거인단에 의한 임원 러닝메이트 선거제, 비리 연루자 임원진출 차단, 재산공개제, 조합원의 정보공개청구제, 외부 감사제, 노조간부 윤리강령 선언 등이 그 주된 내용이다. 이런 제도 개혁 이외에 낡은 인적 요소의 청산을 요구하는 소리도 높은 듯 하지만 이들만으로도 진일보한 방안들이다.

이 개혁조치들은 구체적인 실천단계에서 갈고 닦아야 하겠지만 실제 실행되기 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 있어 자칫 현장의 관심 밖으로 밀려날 우려가 있다. 따라서 이들 상층부 개혁조치들이 연맹, 지역에서 사업장 단위노조에 이르기 까지 확산될 수 있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개혁이 일상의 일로 가시화 되게 하고, 구조적으로는 기업별노조체계를 혁파하고 산별노조를 건설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무엇보다 역사적으로 생성된, 그러면서 자본의 공세 아래 강요된 현장의 무관심과 냉소주의를 깨는데 온 힘을 쏟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현장 노동자의 밑으로부터의 참여 없이 상층부의 개혁이 생명력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오랜 역사의 가르침이다.

이것은 민주노총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노동운동이 경계해야 할 것은 권력집단의 침탈만이 아니라 바로 현장의 무관심과 냉소의 위험인 것이다.

그지없이 어려운 상황에서 노동운동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는 75년 전 원산총파업 때의 경험이 극명하게 답해주고 있다. 일제가 노조간부들을 잡으려고 회계장부를 압수했을 때 조사에 참여한 조선은행 원산지점장은 이렇게 말했다. “단 한 푼의 부정도 없을 뿐 아니라 그 장부는 하나도 나무랄 데 없는 훌륭한 장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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