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국노총 경기도본부 상반기 대표자교육에서 “한국노동운동의 정세 전망” 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부탁받게 되었다.

도정복 경기도본부 사무처장은 나를 강사로 정하기는 했지만 과연 전순옥이 자신들의 강의 요청에 승낙할 것인가, 혹시 거절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하면서 용기를 냈다고 한다.

한국노총 경기도본부에서 그렇게 고민하면서 어려운 요청을 나에게 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노동운동도 변화하려는 노력에서 나온 결단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나는 강의 요청을 받고 망설임 없이 하겠다는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 하지만 사실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이러한 결정이 나에게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국노총의 요청을 받아 강의를 한다는 것이 정서적으로 가능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나와 다른 생각, 즉 어용적인 자세로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내가 무슨 대화를 할 수 있겠는가 하는 한국노총에 대한 고정관념이었다.

1993년 나는 ILO 추리니티(trinity) 코스(노동조합 고위지도자 간부교육 프로그램)에 꼭 참석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 프로그램 책임자를 찾아가서 부탁한 일이 있었다. 그 책임자는 나의 의지에 감동을 받았다면서 도와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런데 구비서류 중 한국노총 위원장 추천서가 필수요건이었다. 한국노총 위원장 추천서를 받아야하는 문제는 내가 추리니티 코스를 포기하게 하는데 충분했다. 어용노총 위원장의 추천서를 받아서 그 코스를 한다는 자체를 도저히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경기도본부에서 전순옥을 강사로 부르는 것이 여러 가지 이유로 어려웠던 것만큼이나 나에게 있어서도 쉬운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6~70년대 한국노총이 한국노동운동에서 보여주었던 행적을 살펴보면 그 당시 권위주의 정권 편에서 노동자들을 탄압하는 일에 앞장섰다. 민주노조를 지키려는 여성노동자들의 기억 속에 아직도 지울 수 없는 아픈 상처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상처를 받은 사람들도 상처를 준 사람들도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러한 아픈 역사적인 사실도 발전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한국노동운동을 위해 버릴 수 있는 것은 버리고, 잊어야 하는 것은 잊어버리는 것이 성숙된 노동운동의 자세가 아닐까 생각한다.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잘못된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지, 역사가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여 발전적으로 전진하려는 한국노동운동의 미래에 걸림돌로 작용하여서는 안 된다.

교육이 끝나고 3시간30분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가 한국노총 경기도본부 간부교육에서 받은 인상은 두 가지다.

하나는 변화하는 시대의 요구에 한국노총이 순발력 있게 대응하려는 자세였다. 지난 과거에 대해서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에 그 사람들은 깊이 반성하고 있었다.

나를 강사로 불렀던 이유가 쓴 소리를 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도정복 사무처장은 강사를 소개하면서 "한국노총이 그동안 잘못하고 상급간부들 비리에 대해서 느끼는 대로 망설이지 말고 꾸짖어 주세요, 저희는 어떠한 호된 비판도 받아들이고 이번 기회에 개혁과 혁신을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의 솔직한 고백을 들으면서 나 스스로 내 귀를 의심했다. ‘전화위복’ 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다른 하나는 노동계 전·현직 지도층 간부들이 부정비리문제에 연루되어 사회로부터 지탄이 쏟아지고 지도부들은 고개 숙여 연일 거듭된 사과를 국민들에게 하고 있다. 이렇게 낮은 자세로 거듭되는 사과를 하는 노동조합 지도부의 신심이 국민들에게 설득력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전체 노동조합과 간부들이 도매금으로 취급받는다면 현장에서 지역에서 열심히 노력하며 일하는 노동조합 일선간부들은 억울할 거라는 생각이 한편 들었다.

한 여성 위원장은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한국노총은 왜 그 모양이에요?”라고 실망스러워하는 조합원들을 대하면서 고개를 들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번의 사태로 조직의 개혁을 가져 올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이는 그들의 자세에서 한국노총은 물론 한국노동운동에 희망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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