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이건희 회장의 철학박사학위 수여식을 성대히 치르려다 학생들의 비판과 행사 저지로 빚어진 갈등, 그것은 고려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사회의 한 단면, 그 동학의 핵심이 표출된 것이다.

모든 대학들이 영리추구 기업처럼 자본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고, 교수들은 사외이사, 자문위원, 연구비 사냥에 혈안이 되어 있고, 학생들은 세계적 기업 삼성에 입사하는 것이 대학생활 최고의 목표로 되어 있는 사회. 어찌 그것이 고려대만의 문제일 수 있겠는가. 아마 삼성의 은총을 입지 못한 대학들은 400억 유치에 성공한 고려대를 한없이 부러워하며 자신들의 무능을 나무라고 있을 것이다.

정부의 몇 억짜리 유인책에도 대학의 학제가 농단되는 현실 속에서 400억, 아니 10억만 받더라도 건물마다 “삼성관” “이건희관” “이재용관”의 이름을 붙이고 달랑 철학박사 한 개가 아니라 수십 개의 박사학위를 헌정하려는 대학들이 줄을 서 있다. 고려대는 시장의 지배에 모범적으로 적응한 성공사례일 뿐이다.

삼성그룹은 이미 총자산 200조원대 규모이고, 삼성전자 하나만 하더라도 지난해 당기순이익 10.8조원으로 세계 아홉 번째로 “100억달러 클럽”에 진입하여 도요타와 함께 아시아를 대표하는 초우량기업이 되었다. 경제위기 전후하여 줄줄이 무너지던 재벌기업들을 떠올리면 삼성그룹의 건재와 삼성전자의 성장은 고마울 뿐이다.

차떼기, 트럭떼기로 이회창-노무현 대선캠프에 불법자금을 실어 나르는 것보다 대학에 발전기금을 제공하는 것은 백배 나은 것이고, 베트남에서 꿈나무 교실을 운영하고 중국에서 무료 개안수술로 공헌하는 삼성의 모습은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그만큼 삼성은 우리의 대표적 국민기업으로서 손색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삼성의 불법적 노조탄압과 부당노동행위, 불법·탈법 세습행위까지 덮어두어야 한다면 그것은 삼성의 위상과 미래를 위해서도 바람직스럽지 못할 것이다.

삼성전자 사장을 장관으로 모시고 중앙일보 사장을 주미대사로 임명하고 온갖 비리의 증거·의혹에도 굴하지 않고 확고한 신뢰를 보내며 고려대 학생들 질타에 앞장서는 정권. 노조설립을 방해하고 노조를 파괴하기 위해 자행되는 온갖 불법행위들과 경영권세습을 위해 동원된 백화점식 불법·탈법행위들에 대해 무혐의 기각 처분을 반복하며, 삼성 앞에서는 현직 대통령 앞에서도 곧추세우던 “검사스러움”조차 한 번도 보이지 못하는 검찰. 지난해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불법 휴대전화 위치추적 의혹을 받고 있던 삼성SDI 대표이사 등을 증인으로 채택하려 했던 민주노동당 단병호 의원의 시도를 무산시킨 국회.

불행하게도 이 같은 지배세력들의 삼성에 대한 비뚤어진 보은의식은 삼성을 투명하고 건실하고 자랑스런 국민기업이 아니라 추악한 마피아기업처럼 만들어 삼성과 국민경제에 엄청난 재앙을 가져다 줄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가고 있는 듯하다. 삼성이 지배하는 어둡고 두렵고 불길한 “삼성의 나라”로.

“삼성의 자본축적 방식을 비판하지 말고, 삼성이 싫으면 삼성에 취업하지 말라”고 하여 해결될 일이 아니다. 그것은 더 이상 개인적 선택과 한 사기업의 문제가 아니다. 삼성의 흥망에 국민경제가 달려있을 만큼 삼성의 경제적 비중은 너무도 커져버린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개발독재 시기를 지나서 어떤 방식의 경제발전모델을 정립할 것인가를 두고 갈등하고 있다. 물론 국가와 자본은 경제위기를 빙자하여 “시장의 지배”를 핵심으로 하는 미국식 자유시장경제모델로의 이행에 박차를 가했었고, 보수정당, 보수언론, 시민단체들의 협력과 함께 그 프로젝트는 이미 상당한 성과를 보았다.

거대한 “신자유주의 동맹”은 그에 저항하던 민주노총과 민주노조들을 고립시키는데 성공했고, 시장의 지배는 삼성의 지배력과 함께 “시장의 독재” 형태로 관철되고 있다. 삼성의 어두운 측면들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적 보도와 분석에 앞장섰던 일부 개혁성향 언론들마저 하나둘 무너지는 것을 보며 “군사독재보다 더 무서운 것은 시장의 독재”임을 실감하게 된다.

“시장의 독재”의 모범사육장 한가운데에서 그에 도전한 고려대 학생들에게 가해지는 지배세력들의 이지메 현상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장의 독재”에 대한 저항과 대안의 모색은 아쉬운 점과 미숙한 점이 있더라도 그만큼 값진 것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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