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알프스 기슭의 농가를 방문한 적 이 있다. 소 몇 마리를 키우고 있는 농가는 한국의 어느 축산농가보다 규모가 작았다. 그래서 이 농사로 어떻게 살 수 있느냐고 묻자 “정부가 지원해준다”고 하였다. 농업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가능하냐는 필자의 질문에 “산사태를 막고 알프스의 아름다운 경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산록의 풀을 베어주고 밟아주어야 하는데 그 일을 소들이 하고 있기 때문에 정부가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정부의 주장대로 시장개방이 불가피하다. 세계경제구조가 그러하고 경제의 수출의존도가 높은 우리가 시장의 문을 닫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어떤 방식의 개방을 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하다. 스위스 농가에 대한 지원을 보면서 우리의 개방정책은 상당히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한국의 농업을 보호하고 지원할 논리나 근거를 마련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다는 논리로 대책 없는 개방 일정에 쫒기는 것이 한국 정부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개방만이 살길이다’라는 정부의 정책은 국민적인 동의가 필수적이다. 경제개방은 불가피하게 피해 집단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통상정책에서 국민의 목소리를 들을 생각이 없다. 쌀 개방을 반대하는 농민들의 처절한 절규를 정부는 철저히 외면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정부의 태도를 너무나 잘 알 수 있다.

더욱이 정부는 협상 내용을 공개하지 않아 “밀실 협상”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복사는 아니더라도 메모는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1만 쪽이 넘는 서류를 어떻게 혼자서 열람할 수 있느냐?” 최근 활동에 들어간 국회 ‘쌀 관세화 유예연장 협상의 실태규명을 위한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소속 의원들의 항변이었다고 한다.

쌀협상 관련 문서를 특위 소속 국회의원과 교섭단체별로 1인의 전문가에게 공개하고 그것도 열람만 할 수 있도록 한 것에 대한 논란이었다. 교섭단체가 아닌 민주노동당은 전문가 참가도 봉쇄되었음은 물론이다. 국회의원들에게도 정보를 제대로 공개하지 않는 한국정부 통상정책의 현 주소다.

농민들의 반대와 극한적인 투쟁을 초래하였던 쌀 협상을 둘러싼 각종 의혹이 국정조사와 다음달 13~14일로 예정된 청문회에서 어느 정도 밝혀질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밀실협상 논란은 쌀 협상만이 아니다. WTO서비스협상 양허안이 5월말 제출될 예정이며 정부는 동시다발적으로 FTA를 추진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어 다자간 협정과 쌍무협정이 줄을 이을 것으로 예상된다.

쌀에 이은 서비스 협상과 FTA 협상은 노동자와 농민 등 사회적 약자에게 엄청난 고통을 강요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지만 정작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개방정책을 결정하는 단계에서부터 협상에 대한 가서명까지 정부가 무슨 내용을 가지고 협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국민은 물론이고 국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정부는 협상전략상 불리할 수 있다는 이유로 협상과정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통상협상과정을 의회에 소상히 보고하고 있는 미국 등의 나라는 협상을 어떻게 하고 있을까?

문제의 핵심은 통상협정의 권한이 행정부에 집중되어 있으며 협상절차를 규정하는 제도적 근거가 빈약하다는 점이다. 비준동의권이 국회에 있지만 국회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으며 정부는 국민의 의견은 안중에도 없어 보인다.

통상협정은 단순한 상품거래에 대한 협상을 뛰어넘고 있다. 우리의 경제구조를 바꾸고 산업구조를 바꾸고 노동시장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일이다. 쌀 협상이 농민을 농촌에서 내쫓듯이 또 다른 협상은 한국의 중소기업을 내몰고 노동자의 일자리를 빼앗을 수 있다.

그러하기에 통상협정은 외통부가 알아서 처리할 일이 아니라 농민, 노동자를 비롯한 국민과 국회가 정책결정과정에 참여하여야 한다. 그래서 통상정책수립과 협상 절차를 규정하는 제도적 장치가 시급하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