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TV로 아침 방송을 본 적이 있다. 마침 다루고 있는 주제는 고부간의 갈등이라는 조금은 고전적인 주제였다. 그날 출연한 시어머니는 매우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며 설득력 있게 이야기를 전개해서 자신이 며느리에게 느끼는 서운함을 정당화시키려 애를 썼다. 사회자마저도 은근히 시어머니의 편을 드는 형국이었다.

이를 지켜보자니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과연 저 시어머니는 아무개라는 이름을 가진 한 여성이 집안의 며느리이기 전에 존중받아야 하는 한 개인이라는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해 본 적이 있을까. 만약 며느리가 아니라 나와 다른 한 사람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야기는 무척 달라졌을 것이다.

세끼 밥을 꼬박 꼬박 대접하고, 매일 잠자리를 보살펴주며, 아침저녁으로 인사를 드리는 사람이 있다. 필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사를 해야 마땅한 이에게 서운함을 느끼는 것에 대해 도리어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실제로 이와 유사한 경우는 우리 현실에 숱하게 존재하고 있지 않나 싶다. 과연 무엇이 올바르고 정상적이냐 하는 문제는 명쾌하게 답하기가 의외로 만만치 않다. 교육 분야만 해도 그렇다.

작년 강의석 학생이 자신이 다니고 있던 고등학교에서 특정 종교시간에 의무적으로 참석케 하는 방침에 항의하여 40일이 넘는 단식을 했다. 놀랍게도 학교의 응답은 전학 내지는 자퇴권고였다. 이는 학생의 행위가 옳고 그름을 떠나서 문제가 일어난 원인 자체에 대한 침묵이다.

교사들과 대다수의 학생들 또한 학교와 별 다름없는 태도로 일관했다. 학생들이 학교 현장에서 자기 동료에게 벌어진 일에 대해 침묵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교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대학입시제도와 그에 맞춰져 있는 학교수업은 어떨까. 잘 알다시피 이쪽 사정이라고 좋을 리 없다. 사람은 저마다의 흥미와 적성이 다르고, 이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말에 대해 달리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줄 안다.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교육내용은 아직도 여기에 도달하려면 거리가 한참 멀다. 차이를 인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수업, 이를 입학사정에 반영하는 일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상식이 아닌 것이다.

그런 터에 아무리 교육개혁을 외치고 요구해도 그 답은 경쟁력 있는 교육이라는 울림이 다른 메아리로 돌아온다. 성적이라는 단 하나의 잣대로 학생들을 재단하는 현실이 엄연히 존재하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 문제로 고민하다 못해 자살까지 하는 마당에 인성교육과 특기적성교육을 말하는 게 숫제 사치스러운 발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때가 있다.

이같은 기성사회의 이중적인 태도에서 학생들이 무엇을 배울까 라는 걱정이 어찌 한낱 기우이겠는가. 겉과 속이 다른 교육세태가 일상화되고 상식과 비상식이 혼동되는 곳에 진실과 배움이 싹트기를 기대하기란 힘들 터이다.

교과내용 또한 마찬가지다. 4·19혁명이나 전태일 열사의 삶과 죽음,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을 가르칠 수 있게 된 것이 실로 불과 몇 해에 지나지 않는다. 이 상식에 도달하는 데에는 전교조운동을 비롯해서 수많은 선생님들이 치른 학교 안팎의 희생과 양식 있는 사람들의 눈물어린 노력이 있어야 했다.

교사는 사람의 성장에 관여하는 존재다. 따라서 자신의 정체성을 오롯이 지닌 상태에서 진실하게 아이들과 소통해야 할 책무를 지니고 있다. 교사들이 해야 할 일은 어찌 보면 간단하다. 아이들이 자신과 남을 존중할 줄 알고, 타인과 의사소통을 하는 데 문제가 없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확립하는 데 안내하는 일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가령 하루 16시간 숨쉬기조차 버거운 골방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을 존중받아야 할 개인으로, 노동자도 인간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을 죽음으로 외쳐야 했던 시대를 이해하도록 안내하는 것 따위가 교사의 마땅한 책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교사라면 의당 비정상적인 것을 고치려 노력할 의무가 있다. 일본의 역사 왜곡 교과서만 흥분해서 시정을 요구할 일이 아니다. 아직도 한 해에 백 명이 넘는 아이들이 교육과 관련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는 현실이나 인류평화를 외면하는 이라크 파병도 다를 것이 없다.

'아이들에게 평화가 중요한 가치라고 가르치는 교사로서 현 정부의 이라크 파병이 이 원칙을 파괴하기에 반교육적이라고 지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교사들의 선언은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우리와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가 좀 더 나은 세상이 되게 하기 위해 우리 교사들에게 주어진 임무 가운데 하나는 21세기의 첨단과학 말고도, 무엇을 기억하고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하는 대목이 아닐까 한다.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서슴지 않고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개발을 부르짖던 일일까. 어려운 사람들의 옆에서 끝까지 자리를 지키던 사람들의 행동과 가치일까. 독재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 암장시켜버리던 70년대 그 어느 밤일까.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느냐. 그 책임의 상당부분은 바로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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