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인도를 주마간산 할 기회가 있었다. 말 그대로 주마간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경험자들에게 조언을 청하니 4월에서 6월까지는 되도록 가는 걸 피하라 한다. 날이 가장 더운 시기인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저것 다 따질 겨를이 없었기에 마음을 다잡고 길을 떠났다. 공항에서 숙소에 이르는 노정은 다행히 한 밤중이라서 그럭저럭 더위는 피할 수 있었다. 이튿날은 일찍부터 인도구경에 나섰다.

제법 이 나라 저 나라 가본 적이 있기에 대충 둘러보면 그나마 형편이 어떤지 감은 잡는 편이라고 여겨왔다. 인도에서 단박에 받은 느낌은 간명했다. 적빈! 이 나라의 이 저주받은 빈곤은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반쯤 분노가 섞이고 의문이 반쯤 되는 그런 생각이 드밀고 올라온다. 언젠가 라디오에서 들은 이야기가 머리를 스친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물었다. 첫번째로 많았다는 그 대답이 흥미롭다. 가난. 가난은 귀신보다 무서운 존재임에 틀림없다.

알려진 것처럼 인도는 이른바 'IT강국'이다.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교육열이 매우 높기에 국제투자자들이 인도를 중국보다 선호한다고 한다. 그런 탓인지 잘 정비된 도시의 부분 부분은 여느 나라 못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그 주위를 따개비처럼 눌러 붙어 사람이 산다. 넝마나 슬레이트 조각 따위를 얼기설기 얹고 흙바닥에는 겨우 걸칠 것만 걸친 피붙이들이 땅에서 올라오는 한기 정도나 막아줄 허접을 깔고 옹기종기 모여있다. 가재도구라 해봐야 옹기 몇개가 눈에 띄고, 인도의 다용도 생필품인 페트병, 도시 가로수나 숲에서 주워 모은 땔감용 잔가지서껀, 대충 그렇다.

어디 유적지라도 둘러볼라치면, 유럽에서 흔히 보아온 집시들과 꼭 같이 생긴 아이들이 모여든다. 하기야 바로 이들이 집시의 원조이지 않은가. 몇억의 인구가 바로 이런 적빈의 상태란다. 기가 막힌다. 언제부터 우리가 잘 살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말이다.

한 10년 전, 90년대 초엽일 게다. 1천년을 갈 것 같은 사회주의가 1백년도 못 가 다 말아먹고 망하고 말았다. 그렇게 운동이 남몰래 간직해온 전망의 경험적 준거점이 어느날 사라졌다. 적잖은 ‘젊은 그대들’이 심각한 아노미를 경험할 때쯤, 그리고 그 이후에 인도바람이 불었다.

인도에 대한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많은 사람들이 곗돈 타고, 적금 털고 해서 인도로 떠나는 걸 본 적이 있다. ‘나’는 없고 ‘우리’만 있던 시대, 1980년대가 지나고 사회주의가 허망하게 무너지는 와중에 재발견(?)된 나. 바로 그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가 대개 출정의 변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해할 만한 구석이 없는 것도 아니다. 아무튼 명상, 수행, 요가 등 흔히 인도하면 떠올리게 되는 것들이 부박한 시대정신과 코드가 맞았는지 꽤 많은 사람들이 인도를 다녀왔던 것으로 안다.

나로서는 그들이 인도에서 과연 ‘나’를 발견했는지 알 길은 없다. 무슨 통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관련 연구서를 본 기억도 없다. 다만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이런 류를 삼류 오리엔탈리즘의 소치로 여긴다. 서양인에 의해 길들여진 우리의 시선, 우리의 머리. 그렇게 보자면 인도는 신비의 나라이고, 명상의 나라가 분명하다. 오래된 영화에서 보았음직한 머리에 터번을 두르고 검은 턱수염을 길렀으며, 흰색의 전통의상을 입고 우아한 백인부부 옆에 정자세로 서서 은쟁반을 들고 있는 바로 그 미쟝센 속의 나라가 틀림없다.

대개 서구인은 자신이 이해 못하는 것은 이런 식으로 ‘처리’해, 하인 자리에 배치해 오지 않았나. 우리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요즘 할리우드 영화에 불쑥 불쑥 튀어 나오는 한국인 역시 틀림없이 영어는 거의 못하고, 요즘 국내에서는 오히려 희귀한 아주 찢어진 눈에 낮은 코, 촌스럽고 언제나 쭈뼛대는 그 모습 말이다.

찬드라(차이나+인도)가 뜨고 있다 한다. 분명 90년대와는 다르다. 과거에는 어처구니없게도 ‘잃어버린 나’를 찾아 인도를 찾았다면, 이제는 ‘모자라는 돈’을 찾아 인도를 찾고 있다.

그리운 식민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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