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정이 비정규법안을 놓고 4월 한 달간 11차례에 걸쳐 집중적으로 논의했지만 최종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모처럼 조성된 대화 분위기 속에서 뭔가 될 듯하다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 셈이다.

11차례 협상을 지켜본 주변 관계자들은 노사정 대화의 가능성은 확인했지만 실제 법안에 대한 합의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는다. 법안을 놓고 노사의 이해관계는 첨예하게 대립하고, 각 주체 대표들의 ‘리더십’은 강력하지 않아 현장의 동의를 얻기 위해서는 원칙을 고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 양보를 할 수 있는 여지가 적다는 의미다.

아무리 합의 가능성이 낮다고 해도 사회적 대화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비정규법안 논의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을 경우, 비정규법안을 둘러싼 혼란뿐 아니라 사회적 대화 복원도 물 건너 가게 될 수밖에 된다.

방법은 없을까. 일각에서 노사정이 비정규법안을 놓고 대화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인 물음이 나오고 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듯이 비정규직의 처우개선을 위해서다. 차별받고 고용 불안이 심각한 비정규직의 수가 50%를 넘어서는 지금의 왜곡된 노동시장 현실이 비정규보호법안을 만들게 했던 핵심이유였다.

그렇다면 비정규 문제는 법만으로 해결될까. 기준과 원칙을 세우는 부분에서는 가장 강력한 역할을 하겠지만 실질적인 현실 적용에 있어서는 미지수다. 근로기준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우리의 현실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사회적 대화를 하고 있는 노사정이 비정규법안과 함께 정책논의를 병행해야 한다는 한국노동연구원 최영기 원장의 주장은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법에 모든 것을 맡기기보다 일부 모자란 부분에 대해 정책적 보장을 받는 방식으로 대화를 유도해야 ‘타협’도 가능하고 비정규직 처우개선의 실효성을 얻을 수 있다는 것. 지난 6일 인터뷰를 통해 최 원장의 의견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봤다.

“‘취약한 리더십’으로는 양보를 감당할 수 없다”

- 노사정 합의가 실패했다. 원인을 어떻게 보나.
“이해관계가 첨예한 노동법을 놓고 사회적 타협을 한다는 게 사실상 어렵다. 특히 비정규법안이라는 단일한 사안을 두고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합의를 위해서는 한쪽이 확실히 양보를 해야 하는데 취약한 ‘리더십’으로 이 자체를 감당할 수가 없다. 더구나 법의 방향도 아니고 조문까지 노사가 합의를 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 4월 국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비정규법안과 함께 정책적 논의를 병행해야 한다는 주장을 해 온 것으로 안다.
“노사정이 이렇게 어려운 선택에 내몰리게 된 하나의 원인은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적 대화의 의제를 법에 한정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문제를 법으로만 해결하려는 데서 오는 어려움이다.
정책과제가 함께 논의돼야 한다. 정부의 근로감독행정 개선, 기업의 원·하청 거래관계 개선, 노조의 연대임금정책 등이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 법보다 오히려 더 효과적일 수 있다. 근로기준법, 4대사회보험의 충실한 적용을 위한 방안도 중요한 부분이다. 이러한 정책적 부분은 그야말로 노사정 사회적 대화를 통해서만 마련될 수 있다.”

“근로기준행정에 대한 불신을 정책 보완으로 극복해야”

- 정책적 과제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예를 들어 정부법안에 담겨 있는 ‘차별시정’ 조항은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이다. 문제는 차별에 대한 기준보다도 얼마나 실효성 있게 시정을 할 것인가 하는 행정적 부분에 대한 믿음이다. 노동계가 흔쾌히 차별시정을 지지하지 않는 이유도 과거 근로기준행정으로 미뤄 실효성 있는 감독이 어려울 것이라는 불신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또한 대부분의 비정규직이 중소영세(하청)업체 종사자들이라는 사실은 비정규직 문제가 우리나라의 독특한 원·하청 기업 거래관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원·하청 사이에 하청단가 책정이 불공정하게 이뤄지는 거래관행을 그대로 방치한 채 정규·비정규간 임금격차를 차별시정 조치, 동등처우로 완화하려는 것은 분명히 한계가 있는 것이다. 법으로 만들어도 실효성이 없다.
같은 맥락에서 강한 교섭력을 임금교섭에 집중하고 있는 대기업 정규직 노조의 임금정책이 지속되는 한 이 문제가 해결되기 어렵다. 또한 연공급 중심의 임금체계로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은 접목이 불가능하다.”

최 원장은 ‘그럴싸한 법’이라도 현실에서 지켜지지 않으면 ‘그림의 떡’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법이 실질적으로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정책적 뒷받침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얘기다.

또한 최 원장은 노사정이 비정규직 처우개선을 놓고 대화를 시작한 만큼 ‘100% 쟁취’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법에서 조금 유연성을 두는 대신 확실한 정책적 지원 방안 마련에 대화의 초점이 맞춰져야 ‘양보'가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최 원장의 지적이 이론적으로는 맞지만 노사정 사회적 대화의 수준이 낮고 서로 불신이 팽배한 속에서 ‘정책적 합의’도 갈 길이 멀어 보이는 게 사실이다.

“미조직 노동자들이 조직 노동운동을 지지하지 않는 게 위기”

- 법은 당장 파급력이 크고 이행하지 않을 때 처벌이 가능하다. 하지만 정책은 논의하는데 시간도 많이 걸리고, 특히 노동계는 정부를 신뢰하지 않는다. 어렵게 정해진 정책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을 경우, 결국 법에서 조금 양보한 노동계만 손해를 보는 것 아닌가.
“사회적 대화를 통해 정책 방향만 정하는 게 아니다. 실효성 확보를 위한 구체적인 사업까지 노사정이 마련해야 한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노동계가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 우리나라 노동운동은 사회적으로 여러가지 정당성을 갖고 있다.
최근 노조 간부들의 비리, 이것이 노동운동의 위기가 아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 미조직 노동자들이 과거와 같이 조직 노동운동을 지지하지 않고 있다는 게 가장 큰 위기라고 생각한다. 노동계는 비정규직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노동운동의 정당성을 찾는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 이처럼 좋은 기회가 어디 있나. 사회적 대화 자리에 노동계가 먼저 정책과제를 들고 나와 적극적으로 요구해야 한다.”

최 원장은 노동운동의 새로운 ‘돌파구’를 주문하면서 정부에게도 ‘쓴 소리’를 던졌다.

“법을 만들어도 노동계는 믿지 않는다. 핵심적인 이유는 불신이다. 비정규직이 근로기준법의 사각지대에 놓이고 불법파견이 만연하는 등 정부의 감독기능은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다. 정부는 노조의 집단행동에는 법과 원칙을 주장했지만 근로자들의 권리 부분에서는 미진했던 게 사실이다.”

“정부도 근로자 권리 보호 미흡 인정해야”

최 원장의 주장은 일리 있는 지적이지만 6월 국회를 앞두고 정책적 과제까지 논의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한 감이 있다.

“작년 12월 국회를 앞두고도 시간이 없다고 했다. 결국 4개월이 지났다. 반드시 풀어야 할 문제라면 시간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노사정 모두 자기의 이해관계에 따라 그 길(정책적 논의)로 들어서기 싫은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논의가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법안을 놓고 조목조목 각각의 입장이 확연히 드러났다. 정부 법안이 그대로 유지되기는 어렵다고 본다. 일정 정도 수정이 되겠지만 노동계가 요구하는 강한 규제는 정부와 재계가 수용하지 못할 뿐더러 노동시장에서 어떻게 반응할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현실보다 너무 기준이 높은 법은 중소영세 사업장에서는 사문화될 가능성이 높고 실업이라는 ‘역풍’이 불 수도 있다. (차별금지, 동등처우 등) 시장에서 비정규직 사용 유인을 줄여나가는 단계적 방법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얘기다.”

“규제 일변도는 법 사문화, 실업 ‘역풍’ 불러올 수도”

대화할 시간도 부족한 마당에 6월 국회를 앞두고 노사정 논의가 어떤 모양새로 시작될지 아직 불투명하다. 국회 주도로 다시 한번 심도 있는 대화가 진행될지, 5월 한 달간 그저 그렇게 시간만 보내게 될지 아무 것도 결정된 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비정규직 문제는 우리가 시급히 풀어야 할 중대 과제라는 점이다.

“결코 쉬운 문제는 아니다. 해법이 완벽히 나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는 부분은 드러내놓고 가야 한다. 드러나 있는 문제는 놔둔 채 법제도에만 몰입해 논쟁을 벌인다고 해서 비정규직의 처우가 개선되는 것이 아니다.”

현장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한 학자의 지적에 노사정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비정규직 처우개선을 위해 ‘모든 걸 까놓고 얘기하자’는 그의 말 속에 들어 있는 진정성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 같다.

수년째 ‘뜨거운 감자’로 취급받고 있는 비정규법안, 비정규문제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결정하는 5월은 중요한 시점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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