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시즘이 있기 전에 맑스가 있었고 / 맑스가 있기 전에 한 인간이 있었다.
맨체스터의 방직공장에서 토요일 저녁 쏟아져 나오는 / 피기도 전에 시드는 꽃들을 집요하게, 연민하던,


시인 최영미의 '자본론'이라는 시이다. 소설가 황석영은 그의 단편 '아우를 위하여'에서 "걸인 한 사람이 이 겨울에 얼어 죽어도 그것은 우리의 탓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영원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방황 끝에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돌아가기로 결심한 날의 일기에서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라고 했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개발도상국 대한민국은 어느새 세계 10위권의 무역대국이 되었고 절대적 빈곤층의 두께도 많이 얇아졌다고 한다. 한국의 노동계급도 귀족화, 기득권층화되었다는 소리까지 간간이 들을 정도로 상대적으로 처지가 많이 나아진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현실사회주의 몰락의 충격도 어느새 10년도 넘은 일이 되었고 이젠 온 세상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촘촘한 그물망 아래서 개혁이다 구조조정이다 변신이다 글로벌 무한경쟁이다 하면서 온통 사람들의 혼을 다 빼놓고 있는 지경이다.

보통 사람들은 물론, 한때 민주화투쟁을 했다 노동운동을 했다 진보적 사상을 가졌다 하는 사람들조차도 한국에서의 절차적 민주주의의 정착과 외형적 경제성장, 그리고 세계화라는 주술에 미혹되어 이젠 모두가 개량주의자가 되기로 약속이나 한 듯 하나같이 이전에 지녔던 ‘혁명적 전망’을 분리수거 해버렸다.

그렇다고 모두들 지금 이 세상의 행로가 장밋빛 미래로 이어질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에 빠져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말했듯 이 기차가 파멸의 선로를 달려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당장 낙오되는 것이 두려워 기를 쓰고 달리는 기차 위에 올라타고 매달리는 형국인 것이다.

우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우리는 일국적 차원에서의 개발독재에서는 빠져나온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 세계적 규모의 개발독재 치하에 놓여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체제는 마치 우리의 박정희 시대가 그랬듯이 전세계적 규모에서 세계민중의 궁핍화와 미증유의 자연파괴와 자원고갈과 인간소외와 윤리적 아노미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우물안 개구리처럼 일국적 민족주의적 시각에 갇혀 있는 많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자본운동의 세계화가 낳은 착취와 빈곤과 소외와 파괴의 세계화에 걸맞는 분노와 저항의 세계화는 우리들에게는 아직 각성되지 못하고 있다.

맨체스터 방직공장 여공들에 대한 연민에서 위대한 사랑의 과학을 만들어낸 한 인간처럼, 누군가 거리에서 얼어죽는 것은 내 탓이라고 자책할 수 있었던 한 작가처럼, 고통받는 이웃을 위해 나를 죽이고 나를 버리고 돌아가겠다던 한 청년처럼, 이 신기루 같은 휘황한 낭비와 허망한 풍요를 지탱하기 위해 전세계의 ‘작고 여리고 이름 없는 존재들’이 나날이 허리가 휘도록 지불하고 있는 이 막대한 고통에 대해 각성하는 일, 이 세상의 고통에 대해 처음 눈물을 흘렸을 때의 그 순결한 첫 마음으로 돌아가는 일, 그리하여 다시 처음부터 싸움을 시작하는 일, 그리하여 이 미친 자본주의시스템의 파멸적 전개를 멈추고, 모든 성장과 개발을 멈추고, 악마적 경쟁을 멈추고, 이 파괴적 근대성을 해체하는 일, 그리고 하나뿐인 지구의 품에서 인간과 자연이 상생하는 새로운 존재조건을 건설하는 일-나는 이 일을 위해 모든 뜨거웠던 마음들에 다시 불지펴져야 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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