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으로 전태일을 알게 된 것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란 영화를 통해서였습니다. 모두 세 번에 걸쳐서 영화를 보았는데, 처음에는 중학교 때로 시대 상황을 잘 알지 못한 채 보았기에 그의 행적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로 본 건 고등학교에 다니던 때로 나름대로 나이를 먹음에 따라 시대상을 파악했고 전태일에 대한 생각이 내 안에 정립되었습니다. 허나 그 생각은 남들이 주입시키는 이미지에 불과했고, 이윽고 대학에 가서 영화를 또 보게 되고 '전태일 평전'을 접하면서 다시 한번 생각을 가다듬게 되었습니다. 과연 내가 생각하는 전태일은 어떤 존재인지.

얼마 전 ‘워터 프론트’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주인공의 행적을 전태일과 맞비교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영화 후반에서 보여주는 테리의 역할이 바로 전태일이란 생각이 든 까닭입니다. 물론 주인공 테리와 전태일의 시작은 분명히 다릅니다. 하나 그 둘의 행동은 앞으로 일어날 운동에 빛이 되었다는 데에서 둘은 하나라고 보았습니다.

청년 전태일과 테리가 살았던 시대는 노동자들의 권리가 제대로 인정되지 않는 때였습니다. 이제 막 성장단계로 접어들어 경제를 비롯해 모든 것이 숨 가쁘게 돌아가는 때였습니다. 국가 경제의 수준이 향상된 것에는 그 뒤에 노동자들의 노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하나 이 노력은 국가의 성장이라 커다란 전제에 가려져 그 공로를 드러내지 못했고 오히려 그 노력에 상응한 대가와 권리를 부여받지 못했습니다. 또한 당시는 노동자들이 제대로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이의를 제기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를 넘어서기 위해 맞서 싸우는 테리와 전태일의 희생은 나중에 벌어지는 노동운동의 커다란 도화선이 됩니다. ‘워터 프론트’ 끝 부분에서 테리가 린치를 당한 상태에서도 전혀 굴하지 않는 눈빛에서 나는 전태일의 분신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좀 더 나아가 전태일이란 존재는 어느 한 곳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님을 느꼈습니다.

지금도 전태일과 테리를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여전히 정당한 권리를 인정받지 못한 채 불합리한 현실과 싸우는 사람들 속에서 전태일과 테리의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와 있는 이주노동자들과 지금도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과 그 환경을 개선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전태일이 살아 있다면 이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반면에 전태일의 숭고한 희생이 조금은 훼손되고 있지 않은가 의문을 품어볼 때가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진정한 전태일은 어떤 존재일까요.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며 글을 맺습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