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법안을 둘러싼 노사정간의 협상이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는 시점에서 맞이하는 노동절에 이 땅의 노동현실을 돌아보면 여러 가지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보수언론의 세뇌 탓에 일반국민조차도 ‘고임금 노동자가 임금양보 해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노동자들의 경제적 지위가 과거보다는 높아졌다고 하지만 노동자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여전히 열악한 상태이다.

특히 사회 양극화의 주요인을 제공하고 있는 이 땅의 800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선진한국을 노래하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저임금과 고용불안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현재 도시근로자 가구 상위 20%가 소득의 38.9%를 차지하고 하위 20%의 사람들은 7.2%에 불과한 소득으로 소득점유배율이 5배가 넘게 나타나고 있다. 비근로자가구를 포함한 전국 가구의 소득격차는 이보다 더욱 악화돼 있어 그 격차가 7배를 넘고 있다.

나아가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이러한 격차가 꾸준히 확대돼 왔다는 것이며 상위계층의 소득점유율은 높아지고 하위계층의 소득점유율은 낮아지는 추세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외환위기 이후 기업소득증가율은 경제성장률을 상회하면서 크게 향상된 반면 개인소득증가율은 오히려 경제성장률에 못 미치는 것으로 나타나 격차 확대를 부추기는 요인이 되고 있다.

이처럼 단순한 지표만으로도 기업은 여전히 이윤극대화를 위해 노동자에 대해 물론 더욱 열악한 지위의 비정규직 노동자를 착취하고 있는 현실의 단면을 알 수 있으며 양극화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사회통합이나 공동체적 삶은 한낱 구호에 불과할 뿐이다.

119년 전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며 들불같이 일어섰던 시카고의 노동자들이 바라던 노동자의 미래 생활상이 분명 이러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8시간 노동제가 인간다운 생활을 위한 최소한의 요구였다면 21세기 한국사회가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지위를 개선하고 격차를 축소하지 않으면 안 되며 노동조합은 이러한 과제를 최우선 목표로 설정하고 해결해야 한다.

우리사회는 지금까지 안정적인 시스템에 포섭돼 있는 노동자 위주의 사회정책을 전개해 왔다. 그리고 이러한 시스템은 고도성장과 경제규모의 확대과정에서 시스템에 포섭돼 있지 못한 노동자들에 대해서도 2차적 수혜를 받을 수 있게 함으로써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젠 경제의 불확실성이 일상화되고 안정적 시스템에 안주하는 것이 예외적인 상황이 돼버렸다.

그럼에도 노동운동의 주된 목표와 사업은 과거의 시스템에 기반하고 있고 사회복지의 외형적인 확대에도 비정규직노동자와 영세기업 노동자들은 노동운동영역과 사회복지에서 사실상 배제되고 있는 실정이다. 안정적인 경제 환경 아래에서 대기업의 정규직노동자를 대상으로 설계되고 시행돼온 각종 사회복지제도를 불안정한 환경에 처해있는 비정규직, 영세기업 노동자에게도 실질적인 수혜가 되도록 재구성돼야 한다. 사회복지를 시장논리와 효율성의 잣대로 재단해서는 본래 취지와 목적을 살릴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의 복지전달기관에 대한 경영평가와 이를 급여에 연동시키는 것은 사회복지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한 편협한 사고가 아닐 수 없으며 기존의 패러다임을 유지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공급자 위주의 복지서비스를 탈피하고 수요자의 욕구에 맞춰 찾아가는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며 전달체계의 대폭적인 확충과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한다. 적어도 사회복지서비스에 대한 정보를 접하지 못해 서비스 수혜대상에서 제외되는 현상은 없어져야 할 것이다.

119년 전 노동절 시위로 사형선고를 받은 미국 노동운동 지도자인 스파이스의 최후진술처럼 노동운동은 사방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들불이다. 이제 노동운동은 지금까지의 편협한 운동영역과 주체의 틀을 깨고 새로운 들불로 태어나야 한다.

변화된 환경을 직시하고 이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되는 적자생존의 논리는 모든 조직에 적용된다. 노동조합이 사회통합의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는 역사의 주역이 되기 위해서는 과거의 틀에 매인 편협한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양극화 해소를 위한 실질적인 활동을 전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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