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노동자 관련 법안 문제가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의 의견 표명을 계기로 다시 세간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지난 14일 국가인권위원회는 기자회견을 열어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안’과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실질적으로 해소하는데 충분하지 못하므로 수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노동계는 즉각 환영의 뜻을 밝힌데 반해 노동부 장관은 강한 어조로 불만과 비난의 뜻을 드러냈고 여당 역시 자못 못마땅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경총은 제 궤도를 벗어난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노동부와 경총의 기묘한 협주에 노동계의 목소리가 맞부딪치는 형국인 셈이다.

인권위 의견 표명의 파장

인권위는 정부의 비정규직 관련법안이 불합리한 차별시정을 위해 노력하면서도 세 가지 점에서 크게 미비하다고 지적하였다. 곧 “이미 과반수에 달하는 비정규직의 규모를 축소하고 비정규직 근로자에 대한 불합리한 차별을 시정하며 비정규직 근로자의 노동인권을 보호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인권위는 비정규직 보호라는 당초 취지에 맞게 수정되어야 할 몇가지 대목을 제시하였다.

그 내용은 기간제 근로자의 경우 △남용 방지를 위한 사용사유 제한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원칙 명문화 △서면계약의 엄격한 적용 등이 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근로자파견법에 대해서는 △대상업무의 제한 △파견기간의 현행 유지(2년) △파견기간 초과시 직접고용으로 간주 △파견근로자의 노동기본권 행사 및 노사협의회 참여 등의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였다.

다만 동일임금은 현실조건을 고려하여 한시적으로 다른 방법을 찾으라고 하였다.

인권위의 이같은 견해는 인권위법 제25조가 정한 정책권고와 의견표명 가운데 후자에 속한다. 권고사항의 경우 대상기관은 이를 존중하고 이행하기 위해 노력하도록 규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소 강제력을 지닌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어느 것이나 법적 구속력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인권위가 내린 판단이 일방적으로 무시되지는 않고 있다.

인권위가 출범 3년째인 지난 해 11월 조사한 바에 의하면 3년간 권고 및 의견표명 307건 중 수용여부를 통보해 온 것은 232건이었고 이 중 187건이 부분 또는 대체 수용의견을 보내 왔다. 이 가운데는 한때 큰 쟁점이 되었던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개선 권고, 산업연수생제도 폐지 및 개선방안 권고 등도 포함되어 있다. 관계기관이 끝내 반발하여 미결로 남는 일도 많지만 대체로 받아들이는 추세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럼에도 노동부와 경총의 거부감은 원색적이라 할 만큼 강하다. 노동부의 공식반응은 없지만 장관은 인권위의 결정을 저돌적이고 비전문적인 균형 잃은 정치적 행위이며 노동시장 선진화를 가로막는 마지막 돌부리라고 비난했다. 여당의 관계자는 인권위가 국민경제와 국가경영에 대한 무지에서 월권행위를 했다고 논평하고 많은 의견 중의 하나로 간주하겠다고 평가절하하였다.

한편 경총 역시 인권위가 업무범위를 벗어난 데다 노동시장 등에 대한 고찰 없이 무조건적인 차별해소라는 편협된 시각으로 문제를 본 결과라고 지적하고 이 권고대로 법안을 수정한다면 실업을 양산하고 기업들의 일자리 창출도 저해할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아울러 경총은 노사정간 진지한 논의가 새로 시작된 현 시점에서 편향된 입장을 발표, 노사갈등을 부추기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인권위 비난, 지나친 과장이자 폄하

정부·여당·경총의 비난은 인권위가 월권에다 경제와 일자리 창출 등 엄중한 국가적 명제를 무시하였고 노사정 대화 재개에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으로 간추려진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친 과장이거나 폄하다.

먼저 인권위의 주장은 새로운 내용이 아니다. 오래 전부터 노사정 사이에 뜨겁게 논의되어오던 핵심 사안이다. 이 내용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지금도 미완의 과제로 여전히 살아 있다. 더욱이 정부 법안의 수정 보완을 요구한 것은 노동계 말고도 시민사회단체나 노동관계 학회에서도 수차 제기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인권위가 전문가 없는 기구라든가 업무범위를 넘어섰다는 비난도 정도를 벗어났다. 인권위는 두해에 걸쳐 비정규직 문제를 연구하고 다섯달 동안 의견을 수렴하고 논의를 집중한 결과, 전원회의에서 위원 8명 중 7명이 찬성하여 제시한 것이라고 밝혔다. 인권위는 비정규직 태스크 포스팀을 별도로 구성하여 비정규직 인권실태조사를 실시하는 등 균형감을 갖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경제상황이나 고용의 유연화, 일자리 창출문제 등을 충분히 검토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인권위가 하나의 국가기관인 한 첨예한 이해갈등관계에서 일방의 주장에만 귀를 기울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설사 정부나 재계의 지적처럼 비정규직 남용규제나 차별완화 쪽으로 기울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권위법이 규정한 고유의 임무-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보호, 향상시킴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구현하고 민주적 기본질서의 확립에 이바지함-을 충실히 이행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정부여당, "우리만이 선(善)" 엘리트의식 벗어나야

언젠가 정부의 위원회가 많이 설치된 이유를 당국자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각 부처 사이에 정책 시행의 틈새를 메꾸고 이해집단 간의 대립 갈등을 조정하면서 부처간 관료적 이기주의의 경쟁을 극복한다는 것이었다.

인권위 역시 행정권력기관이 미쳐 못 보거나 안 보려는 일을 찾아 인권 차원에서 개선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그 임무이다. 노동부가 고용의 유연안정성의 원칙에 충실했다고 하지만 유연성 확대 요구가 더 거센 상황에서 소홀할 수밖에 없는 인권소외 문제에 인권위가 주목한 게 이번 의견표명으로 보아야 한다.

어떤 정책이든 절대적인 것은 존재하기 어렵다. 노사간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할 수밖에 없는 노동문제 접근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다. 따라서 노동부는 인권위의 의견표명에 발끈할 것이 아니라 차분히 노사가 타협을 이룰 조건과 분위기를 마련하는데 주력해야 한다. 그야말로 노사관계에서 균형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동부는 비정규직노동 문제는 우리만이 전문가이며 우리 의견만이 '선'이라는 엘리트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법안을 한 자도 바꿀 수 없다는 소신에는 혹시 비정규직의 규모가 아직은 괜찮다는 안이한 판단이 바닥에 자리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 스스로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중이 전체의 56%라는 지적을 수정했다는 소식을 들은 바 없고 인권위도 비정규직 규모를 이미 과반수에 달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경제우선, 시장주의의 정책기조 하에서 일자리 만들기 정책이 질보다 양으로 치닫은 나머지 사회양극화를 심화시키고 경기회복을 지연시키고 있다는 지적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정부는 인권위의 의견표명을 한사코 거부할 것이 아니라 참된 비정규직 보호법안을 만들기 위한 새로운 시작의 계기로 삼고 차근차근 논의를 풀어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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