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언론이 최근 “강경 투쟁 위주의 노조운동이 자리잡고 있는 한국현실을 감안하면 독일의 성숙한 노동문화가 부럽다”며 독일 노동법 개정 움직임을 소개하고 있다.

독일 노동계가 경영참가를 제한하는 노동법 개정에 ‘경제’를 생각해 순순히 응해주고 있는 것이 사실일까? 이상호 진보정치연구소 연구위원이 ①언론보도의 진위여부 ②독일 노사관계에서 진정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을 주제로 쓴 기고를 14, 15일 이틀에 걸쳐 싣는다.<편집자 주>
 
 
 
대통령의 순방을 계기로 독일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주요일간지 기사들이 ‘위축되고 있는 독일노조’와 ‘잘 나가는 한국기업’에 대한 내용들을 뚜렷하게 대별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독일경제의 어려움에 상당부분이 독일노조의 책임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한편, 한국기업의 국제경쟁력을 한층 더 강화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소위 ‘강성노조’가 투쟁기조를 자제해야 한다는 보수언론의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보수언론들은 기사들은 그들의 말대로 ‘저가경쟁에서 세계적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서 한국기업들이 독일기업으로부터 배워야 할 점이 어떤 것이 있는지를 애써 외면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독일노조가 노동자의 연대성 강화를 위해서 어떻게 노력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또한 독일 사민당 정부에 의해서 추진된 ‘고용을 위한 동맹’이라는 노사정협의체가 왜 파탄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 ‘노동조합운동의 위기’, ‘노사정위원회 참가’와 같은 문제들이 제기되고 있는 현재 국면에서 바라볼 때, 독일의 역사적 경험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클 것으로 예상된다. 필자는 세 가지 사례소개를 통해 독일의 경험이 현 시기 교착상태에 머물러 있는 한국의 노사정 관계에 어떤 함의를 주는지 유추해보고자 한다.

아우토비젼 프로젝트 :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배우자

지역사회의 중심기업이 지역경제의 활성화를 위한 사회적 책임(CSR)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독일 중북부에 위치한 볼프스부르크시(Stadt Wolfsburg)에서 폭스바겐사가 지방정부와 함께 97년부터 추진한 ‘아우토비젼(AutoVision)’ 프로젝트다.

지역산업의 구조개혁과 재생을 목표로 한 이 프로젝트는 부품기업의 입지기반 확충을 위한 ‘부품단지조성’, 자동차관련 중소기업의 창업지원을 위한 ‘혁신캠퍼스사업’, 주거환경 및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다기능문화시설’, 지역 내 실업자의 취업알선을 위한 ‘인력지원기구’ 등의 핵심사업을 추진했다. 그 성과는 97년 17.2%에 이르던 실업률이 2003년 8.4%로 줄어들고, 이 기간 동안 약 150개 이상의 부품기업들 외에, 100개 이상의 산업서비스 관련기업들이 창업한 것에서 잘 확인할 수 있다.

필자가 이 프로젝트를 주목하는 이유는 이러한 지역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대기업이 자신의 사회적 책임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볼프스부르크 지역산업 및 경제의 중추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폭스바겐이 경영악화와 경기불황이라는 악조건 하에서도 지역사회의 다른 중소기업, 영세사업장 노동자, 그리고 지역주민을 위해서 자신의 재원을 출연하는 한편, 지역실업자들의 직업교육 및 재훈련을 위해서 자신의 시설을 이용하도록 배려했다. 즉 아우토비젼 프로젝트는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어떻게 지역사회의 발전과 지역주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사례는 중심기업이 지역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에 공헌하고 지역주민의 참여와 지지를 이끌어낼 때 자신의 질적 경쟁력이 실질적으로 확보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아우토비젼의 성공에 의해 볼프스부르크시의 산업입지역량이 강화되면서 많은 기업들이 이곳으로 이주했으며, 창업활동 또한 활성화됐다.

이러한 긍정적인 선순환과정을 통해 실업축소와 고용창출이라는 결과뿐만 아니라, 폭스바겐사의 기업경쟁력도 향상된 것으로 평가된다.

바로 이러한 사례는 아직도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윤리경영’이나 ‘사회공헌활동’ 정도로 생각하고 그 광고효과만을 계산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우리나라 대기업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제 우리나라 대기업들도 독일대기업의 사회적 책임활동을 제대로 배워야 한다. 기업이미지 개선이라는 단기적 이익에 매몰되지 말고 노동자의 삶의 질 향상, 연관업체들과의 공존과 협력, 지역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할 때다.

폭스바겐 5000 X 5000 모델 : 노동자의 연대성을 배우자

한편 독일노동조합이 지역사회의 현안인 실업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능동적으로 대응한 사례가 존재한다. 지난 2001년 8월 28일 폭스바겐 노사는 새로운 차종인 미니밴 ‘투란’을 제조하는 공장에 적용되는 단체협약을 체결한다.

‘5000 X 5000 모델’이라고 불리는 이 협약은 이 공장에서 일할 사람 5천명을 지역 내 실업자 중에서 채용하고, 이들의 총 월급수준을 5천마르크로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이들이 생산현장에서 일하기 위해 필요한 일정기간의 직업교육(6개월)을 폭스바겐 노사공동위원회 주관 하에 진행하는 한편, 그 기간 동안 단계적으로 월급총액을 상승시킨다는 것을 합의했다.

필자가 이 모델에 주목하는 것은 폭스바겐이 채산성 문제로 인해 동유럽에 미니밴공장을 세우려 할 때, 노조가 적극 나서 국내유치로 방향을 선회하도록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 신공장에 반장급 이하의 전 직원을 기존 실직자들 중에서 선발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동유럽의 임금수준을 고려할 때, 비용경쟁력 측면에서 국내공장의 신설은 사용자의 입장에서 어려운 선택이었다. 이때 노조는 인건비위주의 비용산정이 가진 문제점을 지적하는 동시에, 미숙련실직자의 신규채용을 위해서 자신들이 지금까지 지켜왔던 단협체계를 일정하게 양보한다.

그러나 이러한 양보가 현직 폭스바겐 노동자들의 직접적인 피해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노동시간과 임금체계의 유연화협상이 종업원평의회의 동의 하에서 추진된다는 노사교섭의 기본원칙이 무너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연평균 28.8시간으로 협약화된 주간노동시간을 42시간으로 연장하고 이들 신규채용자의 고용관계를 비정규직으로 할 것을 주장한 사용자의 요구를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독일노동조합은 지금까지 정부의 책임으로만 치부해 왔던 실업문제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대응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이는 노동시장의 ‘내부자’라는 사회여론의 비판을 능동적으로 수용하고 ‘외부자’로서 실직상태에 있는 동료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 길을 연 ‘아우토 5000 모델’에서 잘 확인할 수 있다.

한편 3년이 지난 지금 이 모델이 성공적이라는 독일 언론과 노사의 평가를 접하면서 한국 대기업 노동조합운동을 되돌아본다. 비정규직의 축소와 해결을 위해서는 분명 사회적 차원의 법제도적 개선이 전제돼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더욱이 현 정부가 비정규직 양산법을 이 시점에도 추진하고 있고 조직노동자들조차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 또한 현실이다.

그럼에도 남는 아쉬움은 어려운 조건 하에서도 노동자의 연대성 강화라는 노조운동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대기업노조가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에 있다. 대자본, 대정부와의 교섭과 투쟁도 중요하지만, 동료노동자인 비정규직문제에 대해 실리주의적 경향으로 치닫고 있는 조직노동자들의 혁신을 위한 민주노동운동진영의 내부투쟁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싶다.

고용을 위한 동맹 : 정부는 사회적 교섭의 여건을 조성하라

지난 98년 12월 7일 독일의 노사정대표자들은 ‘일자리, 직업훈련 및 경쟁력을 위한 연대’라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한다. 16년간의 보수당 집권을 종식시키고 출범한 독일 적녹연정의 슈뢰더 총리는 고실업과 경기침체를 벗어나기 위한 길을 노사정의 공동노력에 기초한 일자리창출, 직업훈련체계의 고도화, 산업경쟁력의 질적 향상에서 찾고자 했다. 하지만 청년예비노동자라고 할 수 있는 직훈생들의 일자리 확대, 단체교섭의 분권화, 해고규정의 완화 등과 관련된 노사정간 협상이 난항을 거듭하다 마침내 2003년 3월14일 고용을 위한 동맹은 결렬된다.

약 4년4개월간 지속된 고용을 위한 동맹의 경험은 사회적 정책협의제도에서 정부가 어떤 역할과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초기에 저숙련 노동자 및 장기실업자의 직업재교육과 고용기회 확대방안, 고용촉진을 위한 소득정책과 조세정책, 혁신적인 노동시간정책 등과 같은 내용에 대해 노사정이 합의를 도출하는 성과를 보였음에도, 결국 노사정협의체가 깨지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은 독일정부다.

독일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사용자의 책임사항으로 노사정간에 합의된 직훈생 일자리의 확대를 사용자단체가 계속적으로 회피하고 있음에도, 이에 대해 슈뢰더 정부는 합의를 법제도화할 수 있는 실질적인 조치들을 취하지 않았다.

주요 경력
95년 9월 독일로 유학. 경제학 전공
2002년 독일노총(DGB) 박사논문지원 장학생.
현재 '수직적 노동분업과 노동조합의 정책'이라는 주제로 박사논문을 쓰고 있음.
저서 ‘독일공동결정제도의 사회경제적 효과’(석사학위논문, 1995), ‘독일노동운동의 자기정체성 모색과 현실적 딜레마’(한국노동연구원, 2005년 5월 출간 예정) 등
연구성과  ‘독일노동시장의 변화와 노동조합의 고용정책’
반면, 당시에 노사정간에 합의되지 않고 있던 해고규정의 완화조치, 사회부조와 실업부조의 통합안을 정부가 ‘노동시장의 개혁’이라는 이름 하에 독자적으로 추진함으로써, 노동조합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무책임한 친자본적인 정부의 태도는 결국 사회적 교섭에 대한 노동조합의 기대와 신뢰를 상실하도록 만들었고, 그들을 대화의 자리로부터 떠나도록 만들었다.

즉 노사정협의체의 기본원칙을 스스로 부정한 독일정부는 노동시장의 유연화, 사회보장의 축소, 법인세의 감축과 같은 친사용자적 요구들은 수용한 반면, 청년실업해소의 관건이 되는 직훈생의 일자리, 중소기업 노동자의 고용불안을 조정하는 해고규정의 완화 등을 밀어붙임으로써 노조를 자극했던 것이다.

이러한 독일의 실패 경험은 현재 재가동 상태에 있는 노사정대표자회의라는 ‘사회적 대화기구’에서 정부가 최소한 지켜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도록 만든다.

기왕에 성사된 노사정대표자회의가 단순한 대화의 자리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정부는 이를 사회적 교섭기구로 발전시키기 위한 여건을 우선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산업별 교섭구조를 지원할 수 있는 법제도적 정비에 힘을 쏟아야 한다. 또한 독일정부의 실책에서도 알 수 있듯이, 노동운동진영이 반대하고 있는 현재의 비정규직법안, 노사관계 로드맵에 대한 근본적인 재고가 필요하다. 대화를 하자고 하면서 옆구리를 쑤시는 일은 없어야 한다.

역사적 차별성에도 불구하고 노사정관계의 보편적 발전경향이 존재한다고 하면, 현 시기 대기업의 사용자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사회적 책임을 실천에 옮겨야 하고 조직노동자들은 비정규직 동료들과의 연대를 위한 조직체계의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노사의 노력을 법제도적인 차원에서 지원하고 엄호하는 정부의 발상전환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