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의 노동운동은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커다란 위기를 겪고 있다. 최근 발생한 일련의 사태 - 즉 기아자동차 노조의 종업원 채용비리를 시작으로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를 둘러싼 폭력사태, 항운노조의 부정사건 등으로 이어지는 - 로 인해 노동운동은 밖으로는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는가 하면 안으로는 정파간 갈등의 심화와 내부적인 민주주의 절차의 붕괴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으며 이에 따라 노동운동의 사회적 신뢰와 발언권도 크게 떨어진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노동운동의 약화 조짐을 틈타, 정부와 사용자, 그리고 보수언론의 노동운동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도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노동운동의 위기'라 불러도 좋을 만큼 노동운동 내외에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노동운동의 위기의 원인과 그 해결책에 대한 연구자 및 활동가들의 다양한 의견이 나오고 있다.

이들의 의견은 각자가 속해 있는 정파나 개인적 입장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대체로 한국 노동운동, 특히 대기업 노동조합의 이기주의와 정파주의, 연대의식의 저하(특히 비정규직에 대한 정규직의 태도), 일부 대기업 노조 간부의 부정부패 등을 비판하면서 대기업 노동조합의 내부 혁신과 정파 대립의 자제, 비정규직과의 연대, 조직화, 산별노조 운동 등을 통해 노동운동의 위기를 해소하자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당위론적 문제의식탓 근본 해결방법 제시 부족

이러한 노동운동 안팎의 의견은 대체로 타당한 문제인식과 대안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러한 의견들이 지나치게 도덕론적, 당위론적 문제인식으로 흐름으로써 노동운동의 위기를 가져온 진정한 원인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이에 근거한 해결방법 제시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노동운동에 대한 도덕론적 문제인식은 현재 노동운동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의 근원을 주로 노동운동 자신의 도덕적 해이에서 찾고 있다. 즉 주로 정규직 조합원들로 이루어진 대기업 노동조합의 기업별 조합주의, 경제적 조합주의, 개인의식, 비정규직에 대한 연대의식의 결여 등이 현재의 노동운동의 위기를 가져온 주요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인식은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현재의 '노동의 위기'를 가져온 근본원인은 실은 '자본의 위기'로부터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80년대에 시작돼 90년대 들어 본격화된 전 세계적인 자본간 경쟁의 격화(이른바 '글로벌라이제이션')의 영향으로 국내 자본들도 경쟁력 강화와 구조조정, 고용조정 등에 나서게 됐고 이는 특히 IMF 경제위기 뒤 본격화됐다.

이 과정에서 세계시장에서의 경쟁력을 갖춘 소수의 기업들은 종전에 상상할 수도 없었던 대규모의 이윤을 벌어들이고 있는 반면 대다수의 내수기업, 중소기업, 영세자영업자 등은 침체와 쇠퇴를 거듭하는 자본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본의 위기는 다시 노동시장에서는 노동자층 전체의 고용불안과 비정규직 확대, 그리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현역 노동자와 영세자영업자/실업자/비경제활동인구 간의 격차 확대, 2중구조화로 나타나고 있다.

자본의 위기가 2중 구조화 초래

물론 이처럼 자본의 위기로부터 노동의 위기로 파생되는 과정에서 노동조합 역시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즉 한국의 노동조합은 조직률이 겨우 10%밖에 안 되는 소수층으로서 근본적으로 조직노동자와 미조직노동자 간에 내부자/외부자 문제가 존재하고 있다.

더욱이 산업별로 조직돼 있는 선진국 노동조합과는 달리 기업별로 조직되어 기업별로 교섭하고 있는 한국 노조들의 1차적 관심사는 해당 기업 노조원들의 임금, 복지, 근로조건 등 경제적 이해관계에 매몰돼 있으며 따라서 중소기업 및 비정규직 등 미조직 노동자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의지도, 능력도 부족한 상태이다.

그 결과 대기업에서는 사쪽의 높은 이윤과 노쪽의 상대적 고용안정 및 상대적 고임금이 교묘한 결합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이는 결국 중소기업(저이윤)과 미조직 노동자(저임금)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를 가져온 기본원인은 자본의 위기로부터 나온 것이며 노동은 이에 수세적으로 대응하였을 뿐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도덕적 비판이 과연 얼마만큼 옳은가?

이러한 상황에서 대기업 노조를 중심으로 한 한국 노동운동의 움직임에 대해서 노동운동의 기본 덕목인 '연대의 정신'을 해친 것이라고 도덕적으로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그 원인이 대기업 노조의 '적극적인 이익 추구' 때문이라기보다는 '자본의 위기'에 기인한 구조조정과 고용불안에 직면한 대기업 노동자들의 '생존권 수호' 차원의 불안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도덕적 비판이 과연 얼마만큼 옳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나아가 이러한 도덕적 비판 및 설득의 실효성도 의심스럽다. 아무리 정규직 조합원이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연대하여야 한다고 도덕적 설득을 한다 하더라도 대기업의 노동자들은 스스로의 고용안정과 소득확보를 최우선 관심사로 삼을 수밖에 없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고용의 안전판으로 이용해서라도 자신의 고용안정을 보장받고자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노동운동에 필요한 것은 이러한 도덕적 설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연대의 정신'을 실현할 수 있는 실질적 조건을 확보하는 것이다. 기업별로 고용안정협약을 맺거나 파업 등을 통해 고용을 보장받으려는 그 동안의 방식은 대우자동차 고용안정협약의 예에서 보듯이 기업 자체의 존립이 위태로워지면 아무런 실효성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비정규 노동자를 고용안전판으로 활용함으로써 정규직 노동자의 고용안정을 보장받으려는 일부 대기업 노조의 방식 역시 “잇몸이 시린데 이가 성할 수 없는” 것처럼 결국 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부메랑으로 작용해 자신의 고용안정 마저 보장받을 수 없게 되는 근시안적 정책에 불과하다.

'자본의 위기'와 '노동의 위기' 근본 원인에 대응해야

세계화가 가져온 격렬한 자본간 경쟁과 이에 따른 구조조정, 고용조정에 맞서 노동자의 고용과 생활 안정을 지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앞에서 지적한대로 '자본의 위기'와 '노동의 위기'를 가져온 근본원인에 대응하는 것이다.

즉 한편으로는 재벌개혁, 중소영세기업 및 자영자 대책, 투기적 외국자본에 대한 규제 등 경제구조의 민주화, 자주화를 추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기업의 경계를 넘어선 전체 노동자들의 산별, 지역별 횡단적 조직을 결성하고 그 힘에 바탕을 두어 산별교섭-산별협약 체계 구축 및 고용안정, 비정규직 대책, 사회보험, 직업훈련 등 노동시장 2원화를 막을 수 있는 각종 제도, 법률,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다.

이것이 수십년의 역사를 가진 서구 노동운동이 도달한 결론이며 더욱이 기업별로 파편화되어 있는 한국의 노동운동에 있어서는 더욱 절실한 과제라 하겠다.

전 세계적인 자본간 경쟁의 격화와 이에 따른 국내 자본의 위기 및 그 결과로서 나타난 고용불안과 노동시장의 2원화 등은 한국의 노동운동에게는 매우 어려운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곧바로 “노동의 위기”로 연결될 것인가의 여부는 한국의 노동운동이 이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 결코 비관만 할 필요는 없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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