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현대자동차 경비대가 점점 폭력적으로 변하고 있다지만, 뭐니뭐니 해도 ‘폭력 경비대’의 원조는 현대중공업 경비대다. 경비조직을 갖고 있는 대부분의 기업이 용역을 쓰는 것과 달리, 현중은 자체 경비대를 운영하며 ‘사태’가 발생할 때마다 매우 조직적이고 공격적으로 대응한다.

현중이 몇 년째 선박수주 물량 세계 1위를 이어가고 있고, 작년엔 경실련 주최 ‘경제정의기업상’과 일본능률협회의 글로벌 경영자상 최고경영자 대상을 수상하는 현실이지만, 경비대를 통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노동자 사찰 및 폭행 의혹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레이버투데이>는 현중 경비대를 심층취재한 기사를 3회(①‘첩보전’ 방불케 하는 노동자 사찰·감시 ②경비대 역사와 ‘폭력적’ 운영방식 ③경비대를 둘러싼 각종 의혹들)상·하에 걸쳐 게재한다. 현중 경비대의 베일이 하나둘 벗겨질 때마다, 화려한 외양 속에 가려진 한국 대표 기업의 ‘글로벌 경영’의 실상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편집자 주>



문제는 회사쪽의 ‘적극적인 해명’과는 다른 주장과 정황 증거들이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각목을 준비한 적 없다는 회사 관계자의 말에 대해, 작년 2월 각종 집회 현장에 있었던 한 목격자는 “분명히 미리 준비된 각목이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경비대가 들고 있던 각목은 그냥 각목이 아니었다”며 “각을 맞춰서 똑같은 형대로 사전 제작된 것들”이라고 설명했다. 크기와 모양이 딱 맞는 규격화된 각목이어서, 미리 준비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문틈으로 들여다 본 전하문 안엔 각목 든 경비대원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고 말해, 박금순 위원장이 문 안으로 끌려 들어간 직후 봤다는 장면과 일치했다.

“각목 아니다” “자발적 크레인 사수다”, 그러나…

회사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크레인을 지켰다는 주장 또한 사실과 달랐다. 2월 17일 하청노조 조합원들의 크레인 고공농성 후 사내에선 ‘크레인 당직’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100여 개에 이르는 크레인을 모두 지키기엔 기존 경비대 인력으론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과외 인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애사심 강한’ 직원들이 알아서 보초를 서 준 덕분에 무리 없이 지켜 낼 수 있었다는 게 회사쪽 설명이다.

이에 대해 한 현중 직원은 “회사 지시로 이뤄진 일이 분명하다”고 단언했다. “그 시기에 회사에선 사내 동아리들로 이뤄진 ‘자율봉사대’란 게 만들어졌고, 회사는 그 사람들을 통해 곳곳에 선전물을 뿌리며 ‘회사를 지키자’는 등의 캠페인을 벌였다”는 것이다.

그는 “크레인이 100개가 넘는데, 이걸 매일 몇 명씩 조를 짜서 오랜 기간 지킨다는 게 조직적 동원 없이 가능하겠냐”며 “밤에 크레인 지킨 사람들 사이에서 힘들다는 하소연이 오갔다”고 전했다.  

중간 간부들이 회사의 ‘자발적 동원’에 이용되는 까닭을 그는 “그럴 수밖에 없는 회사 분위기 탓”이라 주장했다.     

“현중 같은 거대 조직은 몇몇 사람이 한쪽으로 움직이면 왕따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따라야 하는 분위기다. 관리자로서 충성심을 의심받게 하는 행동을 할 수 없는 거 아닌가. 예를 들어 누가 나서서 임금동결 선언을 하면, 동의하지 않아도 선언이 뒤따른다. ‘분위기 쇄신용’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따지면, ‘다 그런 거 아니냐, 어쩔 수 없다’며 한탄한다. 크레인 지키는 것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 

24시간 크레인 경비의 장기화는 곧 ‘일당 구사대’ 고용으로 이어졌다. “크레인 지키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중간 간부들이 대거 빠지면서 낮에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는 한 현중 노동자는 “점거 약 10일 후부터 회사는 용역을 고용해 크레인을 지켰고, 이는 박일수씨 장례식 때까지 계속됐다”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회사는 주로 연락처가 확보된 현중 퇴직자들을 불렀고, 회사 옷을 입혀 크레인 밑에 세웠다. 그들에게 지급된 일당은 8만 원이었다. ‘자발적 참여’로만 이뤄진 게 아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작년 2월18일 전하문 앞 충돌 당시 각목을 든 경비대원들.

스스로 크레인을 지킨 게 아니란 또 다른 증거는 작년 4월 중순 사망한 한 현중 간부의 행적에서 찾을 수 있다. 수차례 주야간 ‘크레인 당직’을 섰던 김 아무개 차장(38)은 일요일 직장 동료들과의 산행 도중 쓰러져 사망했고, 유족들은 크레인 사수 등으로 인한 과로사라 주장하며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준비 중이다.

<레이버투데이>가 입수한 김 차장 부인의 진술서엔, 당시 김 차장의 당직근무 형태가 어떠했는지 자세히 기술돼 있다.

“남편은 근로자들의 동요를 우려한 회사측의 동원근무 지시로 내내 불규칙한 근무에 시달려야 했다. 평소에는 오후 6시30분 퇴근이지만 저녁 8시가 되어야 퇴근을 하고, 격주 휴무 토요일에도 출근을 하여 근무를 하였으며, 3월6일은 휴무 토요일인데도 크레인 당직을 서야 한다며 저녁 7시가 되어서 퇴근을 했다. 크레인 당직은 근로자들이 크레인에 올라가서 농성을 벌일 것에 대비하여 관리직들을 동원하여 크레인 밑에서 지켰던 것을 말한다. 엄연히 경비라는 직책의 사람들이 있는데도 말이다.” 

“3월25일에는 온종일 근무를 하고 나서 저녁 7시부터는 야간당직에 동원되어 밤새도록 근무를 했다. 쌀쌀한 날씨에 아침부터 근무를 연속해서 하느라 걱정이 되어 밤 12시에 휴대폰으로 전화를 해 보니, 밖에서 모닥불을 피워 놓고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고 했다. 춥지 않냐고 물었더니 회사 잠바를 입고 있다고 했다.”

“나는 관리직인 남편이 왜 이런 사건에 휘말려서 당직을 서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나뿐만 아니라 내가 아는 부인들 사이에서도 불규칙한 과로를 가중시키는 회사에 대해 원망하는 말들이 많았다.”

“평소 성격이 자상하여 아이들과 잘 놀아주던 남편이었지만 이 가간 동안에는 틈만 나면 잠을 잤으며, 딸아이들 세 명이 깨워도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잠에 취해서 식사도 자주 걸렀다.”

진술서 말미에는 동료 직원의 증언도 첨부돼 있다. 증언에 따르면, 당시 현중 중간 간부들은 크레인 당직 외에도 집회를 대비해 퇴근 후 사무실에서 상시적으로 대기했음을 알 수 있다.

“2004년 2, 3월에는 박일수씨 분신자살 사건으로 근무시간 이외에 사무실에서 외부인의 진입에 대비하여 외부 단체의 집회가 종료되기(오후 7시10분에서 7시30분경)까지 사무실에서 대기하였으며, 비상 당직근무인 크레인 당직은 3월 6일 주간 당직 근무와 3월 25일 야간(오후 6시에서 오전 8시) 당직 근무를 수행하였다.”     

김 차장의 사망이 크레인 당직 등 업무 과중에서 비롯된 산재라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망사유에 대해 ‘원인불명’ 판정이 내려진 것도 검진 병원인 울산대학병원이 현중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라며 의구심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다.

경찰-경비대간 ‘합동작전’?

회사 관계자는 지금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경찰이 회사를 도와준 적 없으며 양자간 아무런 ‘공조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고, 경찰 답변 또한 같았다. 하지만 이 역시 주장과는 배치되는 증언들이 나와 진위를 의심케 하고 있다.  

퇴직 경비대원 김주홍씨(가명)은 경찰과의 공조는 기본이고, 한때 검찰의 도움까지 받았다고 증언했다.

“노조가 강할 땐 대검에서 수시로 내려왔고, 현대호텔에 숙소를 정해 머물렀다. 호텔에 올라가서 망원렌즈로 쫙 당기면 중공업 전체가 다 보인다. 그런 식으로 자료를 만들었다. ‘128일 투쟁’ 땐 경비들도 수갑 차고 가스총 차고 경찰, 전경, 대검 관계자들 하고 같이 다니면서 누가 주동자인지 다 알려 줬다. 안 그러면 검찰과 경찰이 ‘불순분자’를 어떻게 구별하나. 알 수가 없다.”        

회사와 경찰과의 ‘협조체계’에 관한 소문은 노조가 창설된 87년 이후 줄곧 계속돼 왔다. 89년 공권력이 육해공으로 노조파업을 진압할 당시 울산 동구는 경찰로 넘쳐났다. 부족한 잠자리는 인근 학교에서 해결했고, 식사는 회사가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때 상황을 기억하는 한 현중 직원은 “경찰이 하루이틀 상주한 게 아니니까, 회사가 1만 명 넘는 경찰들 식사로 회사식당에서 소고기국을 해 먹였다”고 회고했다.  
   
수배자가 생기면 경비들이 ‘체포’해서 경찰에 인계하는 관행이 정착돼 있다는 증언도 들려온다. 멀게는 87년 9월 경비대가 노조 간부를 집단폭행한 후 봉고차에 밀어 넣는 것을 막다 차에 깔려 2년여의 투병 끝에 숨진 이상남씨 사건과, 가깝게는 작년 2월 17일 크레인 농성 중인 하청노조원들을 경비대가 끌어내려 ‘진압’한 경우 등이 경찰에 노조원들을 인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들이다. 

▲ 작년 2월17일, 경비대원들이 고공 농성 중인 하청노조 조합원들을 크레인에서 끌어내린 후 ‘완전히 제압한 상태’에서 경찰에 인계하고 있다.

이를 두고 회사는 “경찰이 제 할 일을 안 하기 때문”이란 논리를 펴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경비대와 경찰의 ‘합동작전’이란 의구심을 버리지 않고 있다. 양자간의 공조 정황이 그 동안 수차례 목격된 바 있다는 것이다. 

지난 90년 3월2일자 한겨레신문은 당시 수배 중이던 전노협 부의장 권 아무개씨와 현중노조 간부 설 아무개씨가 체포되는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권씨는 지난해 4월 현대중공업 파업에 대한 공권력 투입에 항의, 사업장 안에서 노동자들의 집회 및 시위를 이끈 혐의다. 또 설씨는 지난달 15일 노조위원장 구속 및 노조 간부들에 대한 사전영장 발부에 항의, 노조원 2천3백여 명이 사업장 안에서 시위를 벌이도록 주도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날 오후 1시10분께 울산시 중구 남외동 병영교 부근 길가에서 현대중공업 경비대원과 형사 20여 명에 의해 붙잡혔다.”

95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5월25일 저녁, 윤 아무개 당시 노조위원장이 비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승용차로 이동하던 중 플렌지 3공장 인근 도로에서 현대 농구단 모자를 쓴 한 남자의 승용차에 가로막혔다. 이후 곧바로 경찰이 탄 승용차와 전경버스가 도착해 윤 위원장 차를 둘러쌌다. 당시 목격자에 따르면, 경찰을 사칭하며 최초 차량을 가로막은 농구 모자의 남자는 노조원들이 사진을 찍으려 하자 차를 몰고 달아났고, 이후 차량조회와 탐문 결과 총무부 소속 경비대원인 것으로 밝혀졌다는 것이다.  
  
때문에 작년 3월27일 대책위 관계자들이 박일수씨 시신이 안치된 영안실에서 경찰에 체포된 경위도 대책위쪽 시각에선 곱게 보일 리 없다.

하청노조 관계자는 “울산대병원 영안실 근처엔 5층짜리 옥외 주차장이 있는데, 2층과 4층에서 늘 경비대가 머물면서 안에 누가 있는지, 대책위 관계자들이 어디 가는지 다 관찰했다”며 체포과정에서 사측의 압박과 경비대의 협조가 작용했을 거란 의혹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이러한 ‘합동작전’ 의혹은 퇴직 경비대원 김주홍씨의 증언을 통해 한층 설득력을 얻고 있다. 김씨는 자신이 일할 당시 검거 상황이 발생하면, ‘경찰이 길목을 차단하고 경비대가 붙잡는 자동화 시스템’이 가동됐다고 설명했다.

“노동자 중에 수배 떨어진 사람 있으면 형사들 하고 같이 잡으러 다녔다. 합동작전이다. 경찰이 중요 길목을 차단시켜 놓고 검문검색으로 못 빠져나가게 하면, 꼼짝 마라다. 그럼 그 반경 내에서만 훑으면 되니까.” 

- 경찰과 사전 협조가 있었나?
“당연하다. 전 자동 시스템이고, 순식간이다. 수배가 떨어지자마자 경찰이 바로 차단하고, 우린 30분도 안 돼서 움직였다. 30분이 뭔가, 5분10분이면 옷 갈아입고 출동이다.”

- 경찰과 핫라인이 형성돼 있었다는 뜻인가?
“항상 핫라인이다. 정문이나 각 문에 형사가 늘상 찾아오고, 경비대장과도 수시로 만났다. 위에서 지시가 내려오면 경비대장은 서장이 아니라 형사계 높은 사람하고도 만났다. 작전 때만 그런 게 아니다. 나 있을 땐 오토바이 타고 가다가 헬멧 안 써서 걸리면, 경비대 명찰 보여주고 ‘지금 업무 중이다’ 그런다. 그럼 그냥 통과였다. 동부서 경찰 형사들하고 서로 얼굴 다 알았다. 평소에도 사복 형사들이 와서 ‘요즘 회사 시끄러운 사람 누굽니까’ 묻고, 자기들도 리스트가 있으니까 같이 보면서 친구처럼 이야기했다. 형사가 만약 얼굴이 팔린 사람이면, 중공업 점퍼 입혀 회사에 데리고 들어가서 같이 다니기고 했고.”

김주홍씨는 이러한 ‘협조체제’가 경비대원 처벌 문제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조서를 꾸밀 때는 회사하고 담당 경찰 하고 미리 입을 다 맞춰 놓는다. 회사에서 현장에 있었던 경비 중 누구누구 조사받으러 가라 하면, 조사받는 경비들도 말을 맞춘다. 그렇게 해서 가면 이미 빠져 나올 구멍 다 만들어져 있는 상태다. 우리가 크게 주먹질 하지 않고 장난삼아 툭툭 치니까 넘어져서 다쳤다, 일으켜 주다가 옷도 찢어졌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조서도 그렇게 꾸며져서 올라간다. 노동자들 쪽에서도 증언하면 경찰이 듣는 것 같으면서도 솔직히 거의 안 듣는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 

정문 경비실 면회소를 중심으로 동부서 정보과 형사가 자주 드나드는 데 대한 뒷말도 많다. 회사 관계자는 “정보취합 차원”이라지만, 사측에 불리한 정보수집이라면 회사가 정보과 형사의 출입 자체를 허락하겠냐는 것이다. 한 노동자는 “상황이 벌어지면 당연히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협조체제 아니냐”라고 되물었다.

‘공 세운’ 경비대원은 끝까지 책임?  
 
지금은 ‘사고를 친’ 해당 경비대원 혼자 책임져야 하는 경우가 많다지만, 과거엔 달랐다. 김주홍씨에 따르면, 회사가 뒷일 보장을 약속하며 경비대의 ‘과감한 행동’을 부추기는가 하면, 회사에 타격이 예상될 경우 특정인에게 총대를 메게 하고 뒤를 봐 줬다는 것이다.  

“우리가 노동자들 때리고, 뼈 부러뜨리고, 피 질질 흘리게 하면, 회사는 ‘주워 담아서 병원에 갖다 놔라’ 하고 맞은 사람들 치료비를 대 줬다. 또 큰 일이 터졌을 때는 조회 때 미리 이야기한다. ‘이번 상황은 어려울 것 같은데, 마음대로 해도 뒷감당해 줄 테니까 공개적으로 하라면서. 회사가 그렇게 지원해 준다고 하면 우린 날아다녔다.”

“우리가 했던 일 대부분이 다 형사처벌 대상이다. 시켜서도 안 되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만약 경비대 활동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회사는 ‘누구 하나 총대 메라, 그 뒤는 다 봐 준다, 회사가 너 먹고 살 거 다 대 줄 테니까 총대 메고 감방가라’ 했다. 상황이 악화돼서 회사에 큰 타격이 될 거 같다 싶으면 회사에서도 ‘희생양’이 필요했던 거다. 그렇게 감방 갔다 와서 아직까지 경비로 있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주장과 관련, 87년 이상남씨 사건과 89년 ‘식칼테러’의 주인공 등 ‘공을 세운’ 경비대원들에 대해 회사가 지금까지 뒤를 봐 주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이상남씨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봉고차를 운전해 중상을 입힌 장본인이나, 울산지청에서 단순교통사고로 처리돼 불기소처분 받았던 경비대원 배 아무개씨는 그 후 현중을 퇴직, ‘ㄷ운기’란 업체를 차려 현중의 물류를 담당해 왔다. 현중의 한 노동자는 이를 두고 “큰일을 한 경비에 대한 회사의 보상”이라 표현했다.

반면 사경을 해매이던 이상남씨에 대해서는 회사가 처음 얼마 동안은 50만 원, 그 후엔 30만 원의 월급을 지급하다, 사고 8개월만인 88년 5월부터는 이조차 끊어 대조를 이뤘다.

사측은 하지만 올 1월말 배씨가 물류비리를 저지른 사실이 드러나자 관계를 청산한 것으로 알려졌다.

89년, 파업 노동자들과의 몸싸움 도중 발생한 ‘식칼테러’ 관련자도 여전히 현중의 우산 아래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칼을 휘둘렀던 경비대원이 한때 퇴사했다가 재입사해 현재 ‘산업보안팀’에 근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칼에 찔렸던 진 아무개씨는 이후 잦은 병치레 등으로 고생하다 98년경 회사를 그만두고 낙향해 명암을 달리했다.  

사건 직후 회사는 노조측의 물증인 식칼 제시가 없었고, 법정에서 식칼을 사용한 폭력혐의가 인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식칼테러’는 날조된 것이라 주장한 바 있다. 김주홍씨는 그러나 “식칼테러는 위에서 시켜서 한 일이란 말을 술자리에서 테러 당사자로부터 직접 들었다”며 회사의 지시에 의해 이뤄진 일임을 분명히 했다.

최근 한 경제일간지는 조선과 선박엔진 분야 세계 1위를 일구고 있는 현중 유관홍 사장의 경영 스타일을 보도(‘노사 화합 10년 세계 1위 힘이죠’, 3월17일 헤럴드경제)하면서, 지금의 신화가 무분규 10년이 맺은 성과라고 지적했다. 노사간 임금 및 단체협상에서 갈등을 찾을 수 없는 것도 “유 사장이 노조와의 대화와 만남을 중요시한 결과”란 평가도 내놓았다.

신문은 하지만 무분규 10년이란 겉모습 속엔 ‘현장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유 사장의 스킨십 경영’ 외에도, ‘분규가 발생할 수 없도록 하는 무엇’이 있다는 사실은 주목하지 않았다.

세계 1위 현중의 또 다른 모습이자, 엄연한 현실을 말이다.




현중 “과잉대응해서라도 회사 보호하겠다”
<심층취재> 현대중공업 경비대의 실체 ③-상…경비대를 둘러싼 각종 의혹들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동자 박일수씨가 분신사망한 2004년 2월14일부터 장례식이 치러진 4월9일까지, 현중 주변에서는 분신대책위와 회사간의 충돌이 잇따라 발생했다. 충돌이 격해질수록 쌍방간에 피해자도 생겨났고, 피해의 책임소재와 관련한 법적 절차는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이다. 이 과정에서 대책위쪽은 수사기관 조사 및 처벌의 형평성 문제를 거듭 제기하고 있다.

작년 3월31일 새벽, 현중 정문 앞에서 노숙투쟁을 벌이던 하청노조 관계자는 경찰이 집회도구를 빼앗아 간 회사 경비대원(총무부 산업보안팀)을 조사하는 과정을 회고하며 “경찰이 경비대를 의도적으로 봐 줬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신고 후 도착한 경찰 두 명에게 회사 체육관으로 도망간 경비를 잡아 달라고 했다. 그런데 중공업 안으로 들어가던 경찰들은 20, 30명 가량 되는 경비들이 체육관에서 몰려나오자 바로 차를 타고 돌아갔다. 경찰서 가서 항의했더니, 하는 말이 우리 보고 잡아오라더라. 도둑을 신고한 사람이 도둑 잡는 경우도 있나. 우리가 잡을 수 있으면 뭐 하러 신고했겠나.”

당시 경비대의 기물 탈취에 항의하다 구타당했다는 또 다른 노조 관계자는 “날 때린 경비 한 명과 인근 파출소에서 조사받을 때 경비가 ‘나는 때리지 않고, 말리기만 했다’며 구타가 있었음을 사실상 시인했는데도, 경찰은 ‘동부경찰서 민원실에 고소해라, 우린 더 이상 조사하지 않겠다’고 말했다”며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회사쪽에 비해 상대적 약자라 할 수 있는 대책위 관계자들로선 수사기관에 대한 피해의식이 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들은 검경의 조치가 노동자들에겐 지나치게 가혹하고 회사쪽엔 관대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 

대책위, “공소사실 일부 사실과 다르다”

대책위와 회사쪽간의 법적분쟁은 박일수씨 사망 54일 만인 4월7일, 양쪽이 쌍방간의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하는 등 9개 항에 합의함에 따라 마무리되는 듯했다. 하지만 1년여가 지난 지금, 대책위 관계자 90여 명이 정식 및 약식 기소됐고, 그 중 재판을 받은 5명에 대해서는 징역 2년 등이 구형된 상태다.

대책위 관계자들에게 집중적으로 사법처리가 이뤄지고 있는 까닭은 형사사건의 경우 고소고발이 취하되더라도 검찰이 자체적으로 수사해 처벌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합의취하와 무관하게 진행되는 검찰 기소는 그 사유가 ‘업무방해’와 ‘공무집행방해’ 등으로, 회사쪽에는 적용하지 않은 혐의다.

대책위 관계자들은 이런 혐의에 대해 일부 시인, 일부 부인하고 있다. 특히 부인하는 혐의에 대해서는 수사기관의 수사가 진실을 피해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기소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다. 기소된 사람들 중에는 “하지도 않은 일로 벌금형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민주노총 울산본부 조이영자 총무국장은 작년 2월 21일 일산문 앞 시위 건으로 벌금 100만원을 부과받았다. 올 1월 5일자로 집행된 울산지법의 약식명령서(사건 2004고약35150)를 보면, 법원은 조이 국장에게 “경찰관들에게 돌멩이와 화분을 깨어 던지고 다시 정문으로 이동하여 재차 진입을 시도하다가 대치하고 있던 경찰관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등 경비 중인 경찰관들의 정당한 직무집행을 방해했다”는 등의 이유로 일반교통방해, 공무집행방해, 업무방해죄를 적용하고 있다.

조이 국장은 그러나 검찰 공소사실이 허위라고 주장했다. 검찰이 공무집행방해라며 제시한 정황, 즉 경찰과의 충돌 당시 조이 국장은 그 곳에 있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당일 집회에 참석한 것은 사실이나, 박일수씨 유가족과 동행했던 그는 유가족의 투쟁발언이 끝난 직후 시신이 안치된 병원으로 이동했고, 그 시점은 경찰과 충돌 전이었다는 설명이다.

조이 국장은 “경찰 조사를 받으면서 충분히 설명했고 혐의를 씌운 사람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고까지 했는데, 결국 벌금이 떨어졌다”며 “당시 상황을 아는 사람들은 그런 혐의가 적용된 사실 자체에 다들 황당해 했다”고 말했다. 

▲ 작년 7월16일,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는 하청노조원들을 제지하고 있는 경비대원들. 
 
공소사실이 잘못됐다는 또 다른 증거로 조이 국장은 약식명령서에 자신의 직함이 ‘조직국장’으로 기재된 사실을 들었다. 조이 국장이 민주노총 울산본부에서 조직국장으로 일한 시기는 2003년 11월까지였고, 사건 당시엔 이미 ‘총무국장’으로 자리를 옮긴 후였다는 것이다. 조이 국장은 “여전히 조직국장으로 돼 있는 회사쪽 정보가 확인 없이 그대로 경찰에 제공됐을 것”이라며 경찰이 회사쪽의 마구잡이식 제보를 근거로 수사를 진행했기 때문이란 의혹을 제기했다.

박금순 효성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위원장도 같은 경우다. 문제가 된 사건은 2월28일 정문 집회로, 이때 박 위원장은 열흘 전 전하문 앞 충돌 과정에서 다쳐 28일 현장엔 가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조사 과정에서 박 위원장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없었던 일로 처리됐지만, 경찰이 있지도 않은 정황을 파악하고 있는 데 대해 박 위원장은 “울산 지역에 알려져 있는 운동가들 이름을 사용해 회사가 경찰에 제보한다고 들었다”며 조이 국장과 같은 의구심을 내비쳤다.

경비대가 찍은 사진들이 경찰 조사 증거물로 활용되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조사 과정에서 경찰이 혐의사실을 입증하지 못했음에도 결국 150만 원의 벌금형을 부과받았다는 한 하청노조 조합원은 “내 얼굴이 나온 사진은 없었지만, 경찰이 집회 참가자들 찍은 사진을 증거자료로 확보하고 있었다”며 “사진 찍힌 방향이 중공업에서 도로쪽인 걸로 봐서, 경비들이 찍은 사진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난 경비들이 찍은 사진들을 근거로 조사 받았다”는 또 다른 노동자는 “경찰은 그 사진을 근거로 조서를 꾸미고 그걸 근거로 처벌한다”며 경비대가 자료를 만들고 경찰이 처벌하는 ‘공조체제’가 형성돼 있다고 주장했다.

감시 사실 인정, “그러나 감시는 아니다”

이에 대해, 회사쪽 노사협력실 경영지원본부 관계자는 “경찰에 촬영사진을 제공할 이유가 없다”고 부인했다. 그는 그러나 “대책위 사람들이 사진과 동영상을 찍으니까 우리도 찍는 것”이라며 “당연히 찍어야 한다. 그거 없으면 안 했다고 오리발 내밀지 않나. 법원에서도 한 적 없다고 우기니까 검사하고 판사가 들이밀은 거 아닌가”라고 말해, 사진제공의 진위여부와 관련한 묘한 뉘앙스를 풍겼다.

이 관계자는 또한 회사와 관계된 각종 의혹에 대해서도 ‘소신 있게’ 입장을 피력했다. 그는 최아무개 차장(총무부 산업보안팀장)이 부인했던 것과는 달리<3월14일, ‘첩보전 방불케 하는 노동자 사찰·감시’ 기사 참조>, 경비대의 노동자 미행·감시가 있었음을 인정했다. 그는 경비대의 감시와 폭력적 대응을 “불법이라 생각지 않는다”면서도 “일부 불법적 사항이 있을 수 있고 과잉대응이란 소릴 듣더라도, 회사에 위해를 가하는 경우엔 회사 보호의지가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노사협력실 관계자와의 전화 인터뷰는 노무관리와 관련한 현중 사측 생각의 일단을 읽을 수 있는 내용들로, 다소 길더라도 상세히 소개한다.

- 합의취하 이후 대책위 관계자 다수가 형사처벌을 받고 있다. 회사측은 어떤가?
“대책위쪽 고소고발은 사실 회사에겐 해당사항이 특별히 없다. 그땐 회사가 방어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저쪽 사람들을 막는 과정에서 일정 정도 부상이 있었지만, 형사사건이 되기는 어렵다.”

- 대책위쪽에 비해 회사쪽 처벌은 상대적으로 경미한데.
“외부에서는 형평에 안 맞는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회사는 불법행위에 대응한 거고, 저쪽은 불법행위를 한 가해자다. 피해자인 우리가 대응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을 두고 쌍방폭행의 형태로 똑같이 처벌해야 한다고 말해선 안 된다. 이런 주장을 우리가 많이 했고, 입증도 많이 됐다. 대책위쪽에서 주장하는 내용 중에는 안 맞는 말이 많다.”

- 어떤 부분이 안 맞나?
“우리가 각목을 준비했다고 하는데, 각목이 아니다. 내가 현장에 있었다. (대책위쪽 사람들이) 플래카드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걸 뺏는 중에 플래카드 양쪽 끝에서 빠진 나무 하고, 경비 초소에 있던 마대자루나 긴 빗자루 같은 청소도구들이었다. (시위대가) 문을 막 밀고 들어오니까 그런 걸 가지고 막았던 거다. 미리 준비한 게 아니다. 그런 걸 사진을 찍어서 각목이다 뭐다 하는 거다.”

- 정문 충돌 당시 시위대 얼굴에 소화기를 뿜어대는 등 대응이 매우 과격했다. 
“과격한 게 아니다. 알다시피 우리 현대중공업은 87년 노조가 만들어지고 94년도까지 엄청나게 파업을 많이 했고, 점거도 심했다. 그 고생하며 근근이 회사 모양을 만들어 여기까지 왔는데, 그걸 침해한다 싶으면 경영자가 됐든 노동자가 됐든 제3의 인물이 됐든 직원들 자체가 용인을 못한다. 그래서 남들이 볼 땐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방어하는 의지가 상당히 세다. 그리고 요새 말이 많은 것 중에 외부 인물에 대한 감시 부분이 있는데, 우리 회사에 과거 위해를 끼친 사람들, 또는 하청노조 직원들, 회사 크레인 올라갔던 사람들은 주변에서 계속 그런 활동을 하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눈에 띄면 깊이 있게 볼 수밖에 없다.”

- 정당한 활동이란 말인가?
“회사 입장에서는 불가피한 상황이다.”

- 정도가 심한 대응조차도 말인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노동권 보장에 관한 부분은 일절 터치 안 한다. 그런데 회사에 위해를 가하는 사람, 또는 위해를 가한 경험이 있는 경력자들에 대해서는 대응해야 한다. 문제가 터져서 회사 공정이 한 번 스톱되면 하루 손실이 엄청나게 발생한다. 특히 조선사업부는 사고와 부상 위험도 있다. 그래서 초동 단계에서 정리를 안 해 주면 대형사고로 발전할 우려가 아주 높다. (우리 대응이) 조금 과한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극한 상황이 아니면 회사도 방어해야겠단 생각을 갖고 있다.”

- 실제로 인권을 침해하지 않았나?
“노조원이나 활동가라고 해서 아무런 혐의 없는 사람까지 그렇게 한다면 인권침해다. 과거 폭력행위를 해서 회사 직원에게 부상을 입혔거나, 외부에서 현대중공업 명예를 훼손하는 출판물을 배포했다든지 하는 일에만 제한하지, 일률적으로 하는 건 전혀 아니다. 법률적 하자가 있느냐 없느냐를 사전에 따진다.”

- 산업보안팀의 조직적 감시도 불법 아닌가?
“우리는 불법이라고 보지 않는다. 지금은 그런 일 거의 없다. 지난해 같은 경우는 분규가 장기적으로 진행됐고, 회사 크레인 점거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일부 타이트하게 밀착해서 주시했던 부분은 있다.”

- 감시 사실을 인정하는 건가?
“그런 부분은 있을 수 있다. 과거에 87년, 88년, 89년, 90년, ‘128일 파업’이라든지 골리앗 파업할 때, 그 당시는 워낙 폭력 사태가 심했기 때문에 주동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방어 차원에서 안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소고발도 많이 당하고, 회사 경영자들도 기소돼서 재판도 받고 했다. 그때도 우린 법원에서 똑같이 이야기했다. 설혹 일부 불법적 사항이 있을 수 있다 하더라도 생명과 신체에 위해를 가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회사 방어를 위해 일정 부분은 과잉대응이라는 소릴 듣더라도 회사 보호 의지가 있다, 그 부분을 처벌하겠다면 처벌 받겠다, 그런 진술을 한 적 있다. 작년 박일수 건 때문에 좀 그랬던 거지 평상시엔 그런 일 없다. 그리고 그건 산업보안팀의 고유 업무다. 시설이 침해당한 사례가 있으니까 일차적으로 위험은 예방해야 한다. 그러려면 순찰도 더 강화해야 할 거고, 순찰을 강화하는 과정 중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한 번 더 봤을 수 도 있을 거고. 감시로 몰아가는 건 문제가 있다.”

- 어쨌든 인정한다고 보면 되나?
“인정한다기보다 회사의 당연한 방어능력이다. 당장에 우리 회사 들어와서 크레인 점거하는데 그거 놔둘 사람이 어디 있나, 회사를 포기하는 건데. 그래서 2만명이나 되는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단체를 만들어서 방어를 한 거 아닌가. 회사 경영진이 유도한 게 아니라, 거의 자발적인 움직임이었다.”

- 회사 차원에서 (크레인 사수를) 시킨 적 없다는 말인가?
“시킨다고 사람들이 듣는가.”

- 집회 촬영사진이나 정보수집 내용을 경찰에도 제공하나?
“경찰에 제공할 이유가 없다. 경찰이 자체적으로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조치할 일이다. 회사도 위해 사항이 발생하지 않으면 그런 짓 안 한다. 사진을 찍는 건 그 사람들이 찍으니까 우리도 찍는 거다. 그 사람들도 동영상 찍어서 다 띄우지 않나. 집회하고 회사 정문 들어오고 할 때 산업보안팀 직원들도 회사 옥상 올라가서 사진 찍는다. 당연히 찍어야 한다. 그거 없으면 안 했다고 다 오리발 내밀지 않나. 법원에서도 한 적 없다고 우기니까 검사하고 판사가 (사진을) 들이 밀은 거 아닌가.”

- 위해 사항이 있을 땐 해도 된다는 건가?
“당연히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회사 쳐들어오는데 당연히 막아야 하는 거 아닌가.”

- 경찰을 통해 문제해결하지 않고 경비대가 직접 나서는 이유는?
“경찰은 아무 것도 안 한다. 지난해 생각해 봐라. 우리 사무실 바로 앞 크레인에 세 명이 올라갔다. 경찰이 안 하니까, 우리 직원들이 목숨 걸고 올라가서 데리고 내려 왔다. 93년, 94년 파업이 아주 극심했는데, 그 때도 경찰은 아무 것도 안 했다. 그래서 우린 공권력이 우릴 위해 뭘 해 준다, 이런 생각 자체를 안 한다. 과거 경험을 통해 우리 공장, 우리 작업장은 우리가 지킬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우리 머리에 다 못이 박혀 있다.”

- 그 말은 경찰도 경비대처럼 대응했어야 한다는 말인가?
“불법행위에 대해 경찰은 당연히 (회사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2월28일 당시) 경찰은 (시위대와 경비대) 가운데 서 있기만 했지 회사로 진입하는 걸 못 막았다. 우리가 바라는 건 기간산업이자 방위산업체인 현대중공업, 우리의 사유재산이 침해되는 부분만큼은 최소한 공권력이 막아 줘야 한다. 진압해 달라는 게 아니다. 침해 행위를 못하도록 중단만 시켜 달라는 거다. 그게 안 되니까 어쩔 수 없이 (우리가) 방어한 것뿐이다. 쳐들어오는데 경찰에 신고만 하고 가만히 있으란 말인가.”

- 노동자들 요구는 그들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 아닌가?
“기본적으로 일반 노동권에 관한 사항을 회사가 제약할 의사는 전혀 없다. 합법적인 거라면 회사는 전부 허용하고 있고, 방해한 적도 없다. 단지 회사에 위해를 끼치는 불법행위 부분만큼은 단호하게 대처하겠다는 거다. 시각차가 있을 수 있다. 일반 대기업노조는 (만들어진 지) 20여 년 됐다. 나름대로 제도권의 특징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회사의) 협찬도 가능하다. 반면 비정규직이나 하청노조 부분은 지금 조직 단계기 때문에, 누가 어떤 식으로 지도하더라도 처음에는 전투적이고 투쟁적일 수밖에 없다. 이번 민주노총 사태에서도 나타났지만 우린 그런 모습을 불가피하다고 보는 거다. 따라서 불법적인 부분 합법적인 부분을 처음부터 회사도 명확하게 정리해서 보여 줘야 하고, 거기에 맞는 대응도 해 줘야 한다. 그래야 상대방도 어느 부분까지는 안 되는구나 하는 걸 느낄 수 있다. 우리 현대중공업은 책임을 물어야 할 때 책임을 묻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다. 이번에도 책임을 물어야 할 부분에 책임을 묻고, 대응해야 할 부분에 대응하는 것이다.”

▲ 지난 2월14일, 박일수씨 분신 1주기를 맞아 참배를 위해 분신장소로 향하는 노동자들을 경비대원들이 막고 있다.

“쫓아다니는 게 아니고, 가서 보는 거다”

이 관계자는 경비대와 관련한 두 차례의 <레이버투데이> 보도에 대한 반론도 제기했다. 특히 박금순 위원장의 증언<3월17일, ‘공포의 공장 지탱하는 폭력의 화신들’ 참조>을 언급할 땐 목소리가 다소 흥분되기도 했다.

“<레이버투데이> 기사 절반은 허위사실이다. 박금순 이야기 다 거짓말이다. 내가 박금순 하고 직접 부딪히면서 막았던 사람이다. 내가 진술서도 다 쓰고 했는데. 성희롱 했다고 해서 내가 뭘 어쨌냐니까 나 보고 자꾸 만졌다고 하더라. 경비대들이 때렸다고 하는 것도 천만의 말씀. 내가 그때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을 15분 동안 일 대 일 마크했다.”

- 그럼 폭력 상황은 어떻게 연출된 것인가?

“4.5도크문(전하문)을 밀고 들어오다가 주변에 아무 것도 없으니까 화분을 뽑아서 제일 먼저 던진 사람이 박금순이다. 집어 던지니까 그 과정에서 산업보안팀 직원들이 뺏어 던진 거다. 문 안으로 끌려 들어가서 맞았다고 했는데 맞은 게 아니다. (시위대가) 계속 밀고 들어오고 쌍방간에 상당히 싸움이 붙으니까 경비들이 큰 사고 나겠다 싶어 문을 닫는 중에 박금순이 제일 앞에 있다가 끌려 들어간 거다. 끌려 들어가서 기진맥진해 있는 걸 보고 옆에 있던 안전환경부 부장이 곧바로 구급차 태워서 병원에 데려갔다. 때리긴 뭘 때리나. 욕이란 욕은 다 하고. 나 그렇게 욕 잘하는 여자 처음 봤다.”

- 기사 중 또 뭐가 허위인가?
“사람들을 감시하면서 노래까지 체크한다는 거(‘첩보전 방불케 하는 노동자 사찰·감시), 다 옛날 이야기다. 옛날에 법원에서도 그런 이야기는 다 했다. 24시간 두세 명씩 따라다닌 일들이 87년 88년 당시에는 있었다. 그때도 ‘과잉대응이라 하더라도 계속 하겠다’ 해서 처벌 받기도 했고. 옛날 이야기 끄집어내서 지금 상황인 것처럼 애매하게 기사화했다. 지금은 그런 거 없다.”

- 분명 하긴 했다는 말인데.
“그 일과 관련해서 처벌받았다.”

- 지금의 추적은 그때완 다르단 뜻인가?
“지금은 쫓아다니는 게 아니고, 회사 주변에서 집회하는 사람이 있으면 가서 보는 거다. 가서 보는 걸 가지고 사진 찍어서 감시한다는 거 아닌가. 바로 코앞에 있는데 왜 안 가서 보겠나.”

- 경찰이 회사에 거의 상주하다시피 한다던데.
“경찰이 자주 올 일이 뭐 있겠나. 정보과 형사들이야 그게 일이니까 정보 취합하러 오는 거고. 현중만이 아니라 이곳저곳 다니는 거다. 회사와 경찰이 직접적으로 같이 일 할 게 없다.”

- 요즘만 그런가, 과거에도 그랬나?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이야기하지 않았나. 93, 94년 회사가 그렇게 난장판이 됐을 때도 경찰은 안 도와줬다. 골리앗과 LNG선이 점거돼서 수백 명이 다쳐도 경찰이 안 도와줬다. 경찰이 자체 조사로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 잡아넣는 경우가 없지 않나. 도리어 지금은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이 경찰을 이용하지 않나. 조금만 뭣하면 경찰 불러서 왜 조사 안 하냐 하고, 노동부 쳐들어가서 사법권 발동하라 하고, 검찰청에 가서도 그러고. 지금은 회사가 자체적으로 보호하지 않으면 보호해 줄 데가 없다.”

현중을 관할하고 있는 울산동부경찰서의 입장도 회사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경비대의 폭력적 대응 이유가 “경찰이 자기 일을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회사측의 주장에 대해, “타당성이 있다”며 시위대를 제대로 ‘진압’하지 못했음을 인정할 정도다.

서상완 동부서 수사과장은 “사측은 경비대의 대응이 자기방어 차원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라며 “사측으로부터 경찰이 왜 안 막아 주냐는 원망을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서 과장은 “중공업쪽은 ‘경찰이 그렇게 가만히 있어도 되는지 외국에 한번 나가 봐라, 자기 집 안으로 들어오면 총을 쏴서 쫓아낸다’고 말할 정도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며 “그래서 우리도 힘들다”고 토로했다.

서 과장은 그러나 회사측 주장에 대해 “타당성이 있다”며 “과잉대응이라 표현할 수도 있지만, 민주노총이 회사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강력 제재의 빌미가 된 것”이라고 말해, ‘원인제공자’인 대책위쪽 책임임을 되풀이해 강조했다. 반면 서 과장은 회사 ‘밖에서’ 이뤄진 경비대의 감시행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형평성 시비에 대해서도 서 과장은 “형평성 문제는 사실관계에 의거하는 것으로, 양쪽 주장을 받아서 우리가 수사해 판단하는 것”이란 입장을 밝혔고, 경찰과 회사간의 관계에 의구심을 갖는 사람이 많다는 지적과 관련 “경찰이 행여 형평성에 어긋나게 하려 해도 민주노총이 다 감시하고 있어 그런 일이 생기면 우릴 가만히 두지 않는다”며 사실 무근임을 분명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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