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현대자동차 경비대가 점점 폭력적으로 변하고 있다지만, 뭐니뭐니 해도 ‘폭력 경비대’의 원조는 현대중공업 경비대다. 경비조직을 갖고 있는 대부분의 기업이 용역을 쓰는 것과 달리, 현중은 자체 경비대를 운영하며 ‘사태’가 발생할 때마다 매우 조직적이고 공격적으로 대응한다.

현중이 몇 년째 선박수주 물량 세계 1위를 이어가고 있고, 작년엔 경실련 주최 ‘경제정의기업상’과 일본능률협회의 글로벌 경영자상 최고경영자 대상을 수상하는 현실이지만, 경비대를 통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노동자 사찰 및 폭행 의혹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레이버투데이>는 현중 경비대를 심층취재한 기사를 3회(①‘첩보전’ 방불케 하는 노동자 사찰·감시 ②경비대 역사와 ‘폭력적’ 운영방식 ③경비대를 둘러싼 각종 의혹들)에 걸쳐 게재한다. 현중 경비대의 베일이 하나둘 벗겨질 때마다, 화려한 외양 속에 가려진 한국 대표 기업의 ‘글로벌 경영’의 실상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편집자 주>




현대중공업 경비대의 정식 명칭은 ‘산업보안팀’이다. 소속은 총무부, 경비대장 직급은 차장이다.

경비대가 ‘산업보안팀’이란 명칭을 쓰기 시작한 건 99년이다. 헌병식 바가지 헬멧을 일반 모자로 바꿨고, 넥타이를 매기 시작했으며, 정문엔 여성 안내도우미도 등장했다. ‘폭력경비’로 굳어져 버린, 경비대의 이미지 쇄신을 위한 시도였다.

그러나 경비대의 폭력적 본질만큼은 바뀌지 않았다. 겉옷을 바꿔 입었어도, 속살은 여전히 사측의 폭압적 노무관리를 위한 ‘전위대’다.

역사도 만만찮다. 현중 경비대 폭력성의 급격한 분출은 1987년 노조 창설과 궤를 같이 하지만, 뿌리는 회사 설립 시점에까지 뻗어 있다.       
 
미포만을 메우며 ‘현대조선중공업주식회사’란 이름으로 기공식을 가졌던 1972년 3월 당시는 회사 체계가 제대로 잡히지 않아 현장 상황이 다소 무질서했다. 일을 얻기 위해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 중엔 며칠 일하다 그만두는 떠돌이 노동자들도 많았다. 자재를 빼내 내다 파는 도난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난 것도 설립 초기의 이러한 혼란 탓이 컸다.

때문에 회사는 도난사고 방지를 위해 완력 좋은 안전관리요원들을 고용, 강압적 질서유지의 시초를 열었다. “80년대 초반 씨름선수 출신인 안전관리요원과 1, 2년 동안 같은 방을 쓴 적 있다”는 한 노동자는 그를 통해 같은 고등학교에서 씨름을 하다 현중에 온 ‘우람한 체격들’을 여러 명 소개받았던 일화를 들려주기도 했다. 당시 작업현장을 통제하는 역할은 이들 안전관리요원들이 맡았고, 상대적으로 유순했던 경비들은 주로 정문을 지키며 수위 정도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즈음, 회사가 한층 강화된 노동자 통제방식을 고민토록 부채질하는 일이 발생했다. 74년 ‘소요사태’다. 밥 먹는 식탁까지 달리할 정도로 극심했던 관리직과의 차별에 현장 노동자들은 분노했고, 이어 기물을 부수는 등 ‘폭동수준의 작업거부’에 돌입했다. 정주영 전 회장이 직접 내려와 진압을 진두지휘했던 이 사건을 겪으며, 사내에선 노동자 통제의 중요성이 한층 대두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후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회사 조직체계가 잡혀 갔고, 안전관리요원들의 역할도 본연의 안전관리 업무로 돌아갔다. 대신 ‘공백이 된’ 이들의 역할을 경비대가 넘겨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계기로 마침내 노조탄압의 전면에 부상한 경비대는 한국 기업 역사상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악명을 떨치게 된다. 


해병대, 공수부대, 씨름단 출신 유단자로 구성

‘경비업자의 의무’와 관련, 경비업법 7조는 “경비대상 시설의 소유자 또는 관리자의 관리권의 범위 안에서 경비업무를 수행하여야 하며, 다른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거나 그의 정당한 활동에 간섭하여서는 아니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현중 직영 경비들은 그러나 그 활동반경이 무한대다. 주 업무인 시설경비 및 회사 중역 경호 외에, 요시찰 인물 미행·감시 및 폭행에 선거 운동원 역할까지 못하는 일이 없다. 물론 주 업무를 제외한 모든 일은 불법이다. 

불법의 최정점은 각종 이름으로 명명된 ‘테러’들이다. 87년 이후 현중 경비대에 의해 저질러진 노동자 테러의혹은 이미 여러 서적에까지 기록을 남길 정도로, ‘역사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87년 9월 12일. 경비대와 총무부 직원들이 수배 중이던 노조 간부를 집단폭행 하며 봉고차에 밀어 넣자, 차 앞을 가로막던 이상남씨(당시 30세)가 차에 깔렸다. 경비 배 아무개씨는 그럼에도 계속 차를 몰았고, 차 앞바퀴에 머리와 대퇴부가 낀 채 5m 가량 끌려가 중상을 입은 이씨는 89년 5월, 612일 투병 끝에 결국 숨을 거뒀다. 

89년 2월 21일. 파업 중이던 노동자들과 회사 관리직 사원 및 경비대원들간의 몸싸움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경비대가 식칼을 휘둘러 노동자들의 등과 옆구리에 길이 10㎝, 깊이 7㎝ 가량의 중상을 입혔다. 이 ‘식칼테러’는 그해 한국 사회를 뒤흔든 ‘128일 투쟁’의 기폭제가 됐다.

89년 3월 3일. 회사 내에서 토론회를 마친 노조 간부들이 차를 타고 정문을 통과하자, 경비대원들이 뒤따랐다. 심상찮은 사태를 직감한 노조원들이 차를 몰고 울산 시내를 질주했고, 경비대원들은 곳곳에서 총 다섯 차례의 차량 충돌을 일으키며 생명을 위협했다. 이른바 ‘3·3테러’다. 

경비대가 개입된 테러의혹은 노조가 강성하던 95년 이전에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회사는 그러나 모든 의혹과의 관련성을 부인했고, 상해를 가한 경비대원들은 경미한 처분만 받았다.

이처럼 활동의 ‘금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현중 경비대는 그 수가 한때 300여명에 이르렀으나, 지금은 조금 줄어 200명에서 250명 선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밀사찰 수행은 물론 노동자들과 대치시 ‘능력’을 발휘할 쓸 수 있는 ‘힘 센 사람’이 필요했기에, 회사는 경비대 ‘수혈’의 원천을 해병대나 공수부대 등에서 찾기도 했다. 전역 예정자들을 대상으로 각 부대에 모집공고문을 발송하고, 관심 있는 사람들이 이를 보고 지원하는 식이었다. 모집내용엔 ‘태권도 기본’ 및 ‘유단자 우대’ 등의 지원조건이 적혀 있어, 일반적 내용만을 담아 가끔 회사 정문 앞에 붙이는 형식적 공고문과는 달랐다. 퇴직 경비대원인 김주홍씨(가명)도 해병대 전역 직전 부대에서 현중의 경비대 모집공고를 보고 지원한 경우다.

모집경로는 ‘사선’을 통하기도 한다. 김씨는 “쉽게 말해 동네에서 ‘좀 놀던 애들’, ‘좀 칠 줄 아는 애들’이 경비대 인맥을 통해 들어왔다”고 말한다. 그렇게 입사한 경비대원들은 오랜 기간 태권도, 유도, 권투, 킥복싱 등을 해 온 유단자들이 대부분이다. 개중엔 현중이 얼마 전까지 운영했던 ‘코끼리씨름단’ 출신 씨름선수들도 있었다. ‘잘 안 풀린’ 선수들이 경비대에 새둥지를 튼 것이다.  



하청업체 대표 주무르며 상납 받기도 


현중 경비대는 군대식 운영으로 유명하다. 군 출신이 많은 것도 하나의 이유라 할 수 있다. 경비대는 한때 전투화를 신었고, 옷에 빳빳한 줄을 세웠다. 상명하복은 기본에, 근무 중 상급자가 오면 “중(근무 중)”, 가면 “속(근무 계속)”이란 구호도 붙인다. ‘비상’이 걸리면, 경비대 대기실에 모여 일사분란하게 행동지시를 받는다. 조직적 훈련은 없지만, 충돌이 예상되는 시기엔 개인적인 체력단련을 통해 스스로 몸을 만든다. 

경비대의 기본 업무는 물론 ‘경비’다. 정문을 비롯한 각 문과 현중 관련 시설물을 지키는 일이 ‘외형상’ 주된 임무다. 이를 위해 처음 경비가 되면 1천여명을 상회하는 간부진 차량 번호부터 외워야 한다.

‘산업보안’이라 쓰인 하얀색 완장을 차고 모두 7개에 이르는 현중의 각 문을 지키는 경비들은 그 건장한 체격만으로도 문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준다. 때문에 각 문 경비는 경비대의 권한이 막강하게 발휘되는 분야기도 하다. 특히 문을 드나드는 협력업체 대표 및 직원들에게 경비의 ‘존재감’은 생계마저 위협할 정도다. 업체 대표들이 경비대에 굽신거릴 수밖에 없는 까닭인 동시에, 경비대와 관련한 부정부패가 빈번히 발생하는 원인이다.

한 하청업체 노동자는 “하청업체 사장들이 경비대에 찔러주는 돈이 많다”고 귀띔했다. ‘사원증’을 소지한 정규직과 달리, ‘출입증’을 가진 하청노동자들의 출입여부를 결정하는 곳은 총무부고, 현장에서의 결정 권한은 경비대에 부여돼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작년엔 출입증을 집에 두고 온 하청노동자에게 경비가 출입을 막으며 따귀를 때리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자기 직원이 출근을 못해 작업에 차질을 빚을까 두려운 하청기업 대표들로선 때때로 뒷돈을 줘 경비들을 ‘달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정황은 김주홍씨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김씨는 “경비들이 회식비조로 돈을 뜯어내며 협력업체 대표들을 떡 주무르듯이 주물렀다”고 말했다. “대표들은 그들대로 살아남기 위해 총무부 윗사람에게 알아서 상납하는 일도 많았다”고도 했다. 김씨는 또한 “언젠가 경비대의 이러한 비리가 문제가 돼, 경비대장을 비롯한 간부들이 대거 잘리면서 싹 ‘청소’된 적도 있다”고 회고했다.



회사의 ‘오물처리반’

일상 업무 외에 현중 경비대는 한때 기업홍보 차원에서 인근 해수욕장의 안전요원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90년대 초 울산의 한 댐 근처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을 땐 경찰을 도와 범인 수색까지 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주홍씨의 표현대로 현중 경비대는 “안 한 게 없었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 없다. 문제는 ‘외형상 업무’ 뒤에 감춰진 ‘비밀 업무’에 있고, 비밀 업무를 수행하는 순간부터 현중 경비대는 회사가 껄끄러워 하는 문제 해결에 동원된 ‘오물처리반’ 성격을 띤다.

그중 하나가 선거운동원 역할이다.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이 출마했던 91년 대선 당시, 현대 전 계열사는 비상이었다. 현중 경비대원 일부도 차출돼 통일국민당 입당원서를 쓰고 선거를 도왔고, 헬기를 타고 서울을 오가며 정 회장을 호위했다. 작년 총선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몽준 후보의 유세장 곳곳에 사복차림의 현중 경비들이 배치돼 활동하는 장면이 여러 사람들에게 목격됐다. ‘대물림 봉사’다.

필요에 따라 경비대는 철거용역으로 둔갑하기도 했다. 90년대 초, 현중 부지였던 울산 문현지구의 가옥들을 회사가 철거하는 과정에서, 경비대는 “울고불고 난리치는 주민들을 밀치고 건물들을 다 때려 부수는 데” 앞장섰다. 당시 ‘작업’에 참여했던 김주홍씨는 “군화 밖으로 바지를 빼고, 완장 떼고, 명찰도 떼고 현중 사람 티가 안 나도록 꾸민 상태에서, 목장갑 끼고, 오한마 들고 사람 사는 집까지 다 때려 부쉈다”며 “온갖 더러운 짓을 다했다”고 고백했다. “회사 화장실 뒤처리까지 다 한 셈”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조차도 경비대가 노동자들에게 행한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 할 수 있다.

현중 경비대는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노동자 사찰의 일선에 섰고(본지 3월 14일자 ‘현대중공업 경비대의 실체①’ 참조), 그 결과 한 전직 노조 간부가 한탄하듯, “현중에서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경비대로부터의 감시와 미행을 감내하겠다는 다짐을 해야” 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경비대의 진가는 노동자와 충돌할 때 유감없이 발휘된다. 김주홍씨는 과거 현중 노조가 강성할 당시, 경비대의 폭력성이 시신을 모욕하는 경우로까지 표출된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노동자들이 동료의 관을 회사로 들고 들어가려 하면, 우리는 발로 관을 툭툭 찼다. 못 들어오게 막으라면 막아야 하니까. 가족들은 억울하니까 막 욕해대면서 울고, 노동자들은 몸싸움 하고, 우리는 발로 차고 때리고…. 그래서 어쨌는지 아나. 당시 종합목재 쪽엔 물이 빠져나가는 통로가 있었는데, 관을 뺏어다 거기에 확 던져 버렸다. 솔직히 정말 못할 짓이었다. 회의가 많이 들었다.”

노동자들과는 일이 있을 때마다 부딪혔고, 맞아 널브러진 노동자들을 두고 회사는 경비들을 향해 “주워 담아 병원에 넣어라”고 지시했다. 김씨는 “붙잡은 노동자가 도망갈 우려가 있다고 판단될 땐, 포박까지 했다”고 밝혔다.   

전과자를 만드는 직업

현중 노조가 회사와 협력관계로 돌아선 95년 뒤부터 ‘상대적으로’ 잠잠해진 경비대의 폭력성은 2004년 2월 사내하청노동자 박일수씨의 분신사망 이후 다시금 폭발적으로 분출하기 시작했다. 2월 이후 이어진 경비대와의 충돌 과정에서 분신대책위측 피해자들이 속출했다.

충돌 과정에서 경비대의 ‘아는 얼굴들’이 ‘때만 되면’ 앞장서서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을 수차례 목격한 대책위 관계자들은 ‘노동자 충돌전담 별동대’가 따로 운영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던지고 있다. 한 관계자는 “평소 각 문을 지키던 덩치 좋은 경비들 가운데,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항상 눈에 띄는 20, 30명이 있다”는 말로 의혹을 뒷받침했다.   

2월 17일 박일수씨 분신과 관련, 3명의 하청노동자들이 50m 높이의 크레인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벌였고, 이를 지켜보던 경비들은 경찰을 제쳐둔 채 직접 크레인에 올라 농성자들을 ‘진압’하는 ‘능력’을 과시했다. 잠시 후 저항하던 농성자들은 바지와 신발이 벗겨진 채 끌려 내려왔고, 두세 명씩 붙은 경비들에 의해 얼굴과 목이 비틀리며 경찰에 인계됐다. 이 사건은 이후 경비대의 대책위 관계자들 밀착감시와 뒤이은 충돌에서의 한층 폭력적인 대응을 낳는 계기가 됐다.

이튿날엔 박금순 효성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위원장이 ‘희생자’가 됐다. 전날의 폭력진압을 규탄하는 ‘전하문’ 앞 집회에서, 박 위원장은 경비대들에 둘러싸여 공장으로 끌려갔고, 넘어진 채로 집단구타를 당했다. 경비들이 휘두르는 각목에 동료들이 다칠 것을 걱정한 박 위원장이 각목을 뺏으러 달려들다 당한 봉변이었다. 여성인데다, 효성 해복투 조끼를 입고 있어 현중 노동자가 아님을 쉽게 알아 볼 수 있었지만, 이런 사실은 경비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각목을 잡는 순간에 경비들에게 둘러싸였고, 땅바닥에 넘어져 웅크린 상태에서 경비들 발에 짓밟혔다. 그 후 공장 안으로 끌려들어갔는데, 정신을 잃어 그 과정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눈을 떴을 땐 공장 안에서 계속 맞고 있었다. 나이 많은 경비 한 사람이 ‘사람 죽겠다’며 말렸다. 그가 ‘정신차리라’며 물을 한 잔 떠 주고, 구급차를 불러 병원으로 옮겨질 수 있었다.”     

박 위원장은 “공장 안에서 본 광경이 더 경악스러웠다”고 말했다. 각목을 든 수많은 경비들이 사태가 급박해지면 바로 출동할 태세로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밖에서 휘둘러지고 있는 각목은 그 중 일부일 뿐이란 것이다.

같은 달 28일 밤은 ‘박일수 열사 정신계승 영남권 노동자대회’에 모인 노동자들에게 지옥과도 같았다. 양자간의 직접 충돌을 막고자 경비대와 노동자들 사이에 도열해 있던 경찰을 제치고 경비대들이 달려 나왔다. 오토바이 헬멧을 쓰고 단단히 준비한 경비대는 살수차로 거센 물줄기를 쏘아댔고, 저항 없이 서 있던 50대 노동자의 얼굴에 분말 소화기를 뿌리며 발길질을 해댔다. 생후 6개월 된 아기와 7살, 8살 아이 두 명이 있는 천막 안으로 소화기를 내뿜었고, “아기가 있어요”란 여성의 비명에도 경비들은 천막을 뭉겠다. 


그 과정에서 해고노동자 김대환씨는 ‘작년 한 해 경비대에게 가장 많이 맞은 사람’이 됐다. 경찰 뒤에서 뛰어나오는 경비들에 놀라 노동자들이 후퇴할 때, 굳이 자리를 지킨 게 화근이었다.  

“난 해고기간이 길고 경비들도 날 잘 아니까, 설마 나까지 어쩌겠나 싶었다. 그런데 참 무지막지하게 때리더라. 아스팔트에 자빠뜨려서 등, 엉덩이, 허리, 다리 가리지 않고 걷어차고, 어떤 경비는 구두로 땅에 머리를 짓이기고….” 

경비대가 하는 일 자체가 이렇다 보니, 경비대원 중 상당수가 전과자가 된다. 경비대와 같이 경찰조사를 받던 한 하청노동자는 “경비대 신원 조회한 걸 옆에서 보니까 폭력전과가 상당하더라”고 말했다. 김주홍씨는 이를 두고 “전과 있는 사람을 경비로 써서가 아니라, 직업 자체가 전과자를 만들기 때문”이라 지적했다. 

“내면화된 감시 시스템, 회사 망하는 징조”

일이 일인 만큼 경비대원들이 받는 스트레스도 상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가중되는 압박감으로 평소 술을 많이 마시고 술취한 상태에서 출동하는 일도 생겨,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상급자가 의도적으로 술과 환각제를 먹여 ‘사고 칠 수 있는’ 정서를 조성한다는 소문까지 돌고 있다.

죄책감을 느끼는 경비들 가운데는 사석에서 본인이 담당하는 ‘요주의 인물’에게 고충을 털어 놓기도 한다. 하청업체 노동자 중 한 명은 “안면 있는 경비가 ‘나도 먹고 살자니 어쩔 수 없다, 못 도와줘서 미안하다’며 고민을 털어 놓더라”고 전했다. 97년 현중 해복투 사무실로 배달된 한 통의 편지글도 이런 맥락이다. ‘양심 경비 일동’이란 명의의 이 편지엔 “저희들이 과거에 사측의 폭력적 지시로 무분별하게 여러분을 사찰하고 폭력을 행사한 것을 뼈저리게 반성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최근 일고 있는 고용조건 변화도 경비대원들을 압박하는 데 한 몫 하고 있다. 2교대에서 3교대 근무로 바꾸면서 사측은 경비대 일부를 용역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경비대원들 스스로가 비정규직화의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는 현중 노조가 약화되면서 경비대 ‘일거리’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사측의 노조탄압에 앞장섰던 경비대는 결국 직영노조를 사측으로 돌아서게 만드는 성과를 거뒀지만, 그 결과 자신의 고용불안을 막아 줄 ‘우군’ 하나 없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또한 탄압 대상이 비정규직 노동자쪽으로 옮겨가면서, 비정규직화 위협에 놓인 경비대가 비정규직 노동자를 억압하는 형국이 되고 있다. 

심각한 건 이러한 고용불안이 경비대를 더욱 폭력적으로 만든다는 점이다. “나를 담당했던 경비가 ‘나도 먹고살기 힘들다’며 ‘회사는 자기 명령에 충실하고, 나이 어린 사람을 선호하니까, 일자리를 지키려면 우리도 더 독하게 될 수밖에 없다. 당신 마음 십분 이해하지만 나도 애들이 있다’며 하소연하더라”란 한 하청노조 관계자의 전언은, 최근 박일수씨 투쟁 대처 과정에서 나타난 경비대의 과도한 폭력성의 일단을 설명해 준다.
 
같은 이유로 “구조조정 과정에서 회사가 불이익을 주려 하면 성질 더러운 경비들은 ‘내가 알고 있는 비밀들 다 불어 버릴 거야’라며 담판을 지어 무마시키기도 한다”는 이야기들 또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현중은 현재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쪽으로 가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현중은 직장이라기보다는, 경비들을 포함한 구성원 모두가 끊임없이 누군가의 눈치를 살피며 불안에 떨 수밖에 없는 ‘병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여름에 더워서 슬리퍼를 끌고 가면 ‘그거 벗어’라고 명령하고, 자전거를 타고 정문을 지날 땐 내려서 걷게 하고, 밤에 퇴근할 때 오토바이 라이트를 켜고 나오면, 세워서 끄게 하는”, 그래서 “경비 앞을 지나갈 때면 몇 미터 전부터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는 김대환씨의 말은, 한때 경비대원들이 바리깡을 들고 다니며 머리 긴 노동자의 머리칼을 잘랐다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가 여전히 ‘오늘의 현중 이야기’임을 증명해 준다. 

“현중 경비는 군대 조교다. 유격장에서 기세등등하게 사병들 위에 군림하는 조교다. 내가 노조원이란 사실을 밝히기 두려웠던 가장 직접적 이유는 이후 가중될 경제적 어려움이 아니었다. 공포, 뭘 하려고 하면 미리 와서 딱 지키고 선, 경비들이 조성하는 공포였다.”

하청노조 조합원임을 공개선언한 후 해고당한 조광한씨의 말처럼, 경비대는 현중의 ‘군대식 공포분위기 조성을 통한 고도의 노동통제 전략’의 첨병으로 기능해 왔다. 도처에 뻗친 노동자 감시·억압 시스템이 이미 노동자들 사이에 내면화된 지 오래다.

20년 이상 현중에서 일해 온 한 노동자의 날선 비판은 그래서 현중이 건설해 온 ‘글로벌 위상’의 암울한 미래를 예견하는 듯하다. 

“처음엔 관리자들과 경비들이 감시했으나, 지금은 노동자들 스스로 서로를 감시하는 시스템이다. 알게 모르게 감시체계가 내면화된 것이다. 회사는 공들인 노무관리가 열매 맺고 있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그건 착각이다. 이건 분명 회사가 망하는 징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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