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관계법을 한 줄도 읽지 않은 판검사와 변호사가 전체 법조인의 90% 가까이 되는 나라. ‘노동자’라는 용어조차도 기피하며 독재시대의 산물인 ‘근로자’라는 말을 법조문에 명시하고도 문제의식조차 느끼지 않는 정치인들과 행정 관료들, 그리고 언론들이 주류를 형성한 나라.

2,500만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면서도, 노동자 정당을 표방한 진보정당이 10만 당원도 확보 못한 채 ‘소수정당’으로 남아 있는 나라. 노조 조직률이 10%대에 머무는 나라. 노조 만들면 해고를 걱정해야 하는 노동자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나라. 기업의 경쟁력 강화와 사회 붕괴를 막기 위한 안전판으로서 실업과 복지정책이나, 노동 통제와 관리 개념은 넘쳐나지만, 노동자의 삶의 질 개선과 권리보장 측면에서의 ‘노동권’은 교과서에도 안 나오는 나라. 우리 사회에서 노동권 확대는 여전히 ‘찬밥’이다.


한나라 "노동선진화" 착수 예정

그렇다면 ‘유리지갑’ 노동자들이 낸 세금으로 1년에 80억원의 국고보조금을 받아쓰는 연구소들은 ‘노동자’와 노동권 확보를 위해 연구 좀 하고 있을까.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보수정당 정책연구소들이 ‘노동’문제를 얼마나 다루는지 알아보겠다고 나선 것부터가 ‘넌센스’였다.

먼저 찾아간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는 지난 10년 동안 한나라당 정책의 이론적 뒷받침을 해 온 대표적인 정당 연구소로 꼽힌다. 하지만 그 곳에서 ‘노동영역’은 여전히 경제정책의 부속물 취급을 하고 있었다.

연구소는 올해 25개 과제를 선정하고 그 가운데 ‘노동 선진화 방안’을 한 가지 과제로 포함시켰다. 경제 분야에서 맡는다. 하지만 아직 연구에 착수하지 않아 구체적 내용을 살펴볼 수 없다. 다만 정진섭 본부장은 “노동분야는 연구분야에서 경제산업적 측면과 사회복지적 측면이 혼재돼 있어 넓게 접근해 들어갈 수 밖에 없다”며 “노사평화와 협력 등 노동선진화 방안에 대한 다양한 사례 조사 등을 통해 대안을 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부터 끈끈히 내려온 성장과 개발중심주의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시각을 엿볼 수 있다.

기업과 경제성장을 위해서 노동자와 노동을 관리대상으로 보는 시각이 그것이다. 생산력 향상을 위해 노동력을 어떻게 공급하고 관리해야 하는지, 노동시장에서 퇴출된 인력이 불만세력으로 커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복지정책을 펴야 하는지 같은 것이다.

열린우리당 "노사상생" 강조

열린우리당 ‘열린정책연구원’은 여의도연구소에 비해 노동 관련 과제가 구체적이었지만 ‘노동’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었다.

연구원은 현재 중장기 기본과제로 ‘사회양극화 해소를 위한 양질의 일자리 창출방안 연구’를 진행 중이며 단기과제로 ‘여성 고용촉진과 일자리 창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노사간 윈-윈 협약을 위한 방안’과 ‘노동인구 생산성 향상 위한 정보화 인적자원 구축방안’, ‘중소기업과 청년실업 해소 연계 방안 연구’ 등의 계획 과제들이다. 역시 노동자의 삶 향상과 노동권 보장 확대 방안 등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노동자는 ‘인간’이라기 보다는 산업을 유지하는 ‘인적자원’이며,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는 노사가 ‘상생’하며 ‘윈윈협약’을 맺어야 한다는 정도의 수준이다.

교육사회복지분야를 총괄하는 박병영 수석연구원은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 구조를 위해 동반성장을 강조하고 노동문제를 경제문제의 하부시스템으로 인식하지 않는 점이 한나라당과 다르다”며 “참여정부의 등장 이후 노사가 대응한 위치에 이르는 등 제자리를 찾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래도, 진보정당은 다르다

이에 비해 민주노동당 ‘진보정치연구소’는 노동을 바라보는 기본 시각에서부터 큰 차이를 보였다.


연구소는 현재 노동관련 2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하나는 한국비정규노동센터와 함께 추진하는 ‘비정규직 형성경로와 원인’ 연구이고, 다른 하나는 ‘실업자 및 불안정 고용층의 복지대책’이다. 또 연구소 안에 ‘노동연구회’를 구성해 꾸준히 연구 활동을 하고 있으며, 올해 임단협 시기에 맞춰 ‘한국사회 교섭구조 연구’ 등을 내놓을 계획이다.

진보정치연구소는 다른 연구소들과 달리 산업을 위한 ‘관리 측면’에서의 노동문제를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시각에서 고용과 빈곤, 양극화의 문제와 대안을 찾는다는 점이 큰 차이점이다. 장석준 연구위원은 “뿌리가 노동에서부터 출발한 만큼 노동의 시각에서 경제, 정치, 대외관계 등으로 외연을 넓혀나가는 것이 과제”라며 “어떻게 하면 노동기본권을 확보하고 신장시킬 것인가가 주 관심사”라고 말했다.

노동자들이 낸 세금으로 1년에 30억원씩 받아가는 보수정당 연구소들이 관심도 두지 않는 일을, 6억원의 예산만으로 진보정치연구소가 모두 감당하기에는 한 없이 벅차 보인다.

"돈도 없고 사람도 없고"
민노 진보정치연구소 '2중고'
민주노동당 중앙당이 입주한 건물 7층에 자리 잡은 ‘새세상을 여는 진보정치연구소’. 문을 열고 들어가면 한 눈에 들어오는 좁은 공간 속에 몇 명의 연구원들이 둘러앉아 뭔가에 열심이다. 연구소 한 가운데에는 주인 없는 빈 책상들이 휑하게 놓여 있다. 언제 책상의 주인이 나타날지, 아니 주인을 찾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당의 발전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전반의 진보적 전망을 내놓겠다는 야심에 찬 계획 속에 지난해 12월 문을 연 ‘진보정치연구소’가 예산과 인력부족으로 2중고를 겪고 있다.


연구소는 당초 상근 연구인력 10명 정도 규모에 당강령과 공약 작업에 참여했던 300여명의 학계 등 전문가집단의 네트워크를 구성해, ‘진보해리티지연구소’를 만들겠다는 의욕을 보였다. 하지만 여느 진보진영 단체나 연구소와 마찬가지로 진보정치연구소도 예산부족과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다. 정당법에 따라 연구소는 배정된 국고보조금 외에 수익사업이나 후원금제도를 운영해 경비를 충당할 수 없다.


정치 2명, 경제 1명, 사회복지 1명, 평화군축 1명의 연구원 인력으로는 당장 눈앞의 과제들도 감당하기 벅차다. 연구의 기초가 되는 사회조사와 통계분야는 인력이 없어 손도 못 댄다. 이대로 간다면 새 세상을 열기는커녕 ‘헌 세상’ 분석도 힘들 것으로 보인다.


연구소는 1년에 약 6억원의 예산을 국고로부터 배정받는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연구소들이 각각 연간 30억원이 넘는 예산을 쓰는 데 비하면 비교조차 힘들다. 하지만 연구소는 어떻게든 이 6억원을 밑천 삼아 ‘진보해리티지연구소'를 만들 요량이다.


김범석 사무국장은 “임대료 내고 사무실 운영경비 쓰고, 8명의 인건비 쓰고 나면 연구용역을 줄 예산도 부족하다”고 하소연한다. 김 국장은 “6개월 정도가 걸리는 1개 연구과제별로 최소 3~4명씩의 연구원들이 팀을 구성해야 하고, 외부 연구진에게는 1인당 월 100~150만원씩의 연구비를 지원해야 하는데 예산이 부족해 50만원 정도만 지급하고 있다”며 “외부 연구진들이 그 정도밖에 못 주는데도 기꺼이 과제를 맡아줘 고맙고 미안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예산 부족뿐만 아니다. 마땅한 인력이 없다는 점도 연구소의 골칫거리이다. 연구소는 당장 사회조사영역과 경제분야 연구원이 필요하지만, 사람을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다. 김윤철 기획실장은 “우리 사회는 진보진영을 깊이 이해하는 연구 인력의 토대가 너무 빈약하다”며 “마땅한 사람이 보여도, 급여 수준이 턱 없이 낮아 선뜻 같이 일하자고 말 꺼내기도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5개 연구소에 연간 80억 국고배분
열린우리당 부설 열린정책연구원(원장 박명광)이 각 당 정책연구소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지난해 11월 개원한 연구소에는 분야별 연구원과 행정직원을 포함해 34명이 상근한다. 예산은 국가가 열린우리당에 지급하는 국고보조금의 30%인 연간 약 36억원이다.


상근자들은 통일외교안보, 경제과학, 정치행정, 교육사회복지 등 4개 연구분야와 정책기획, 사무처, 교육연수, 정치아카데미 등으로 나뉘어 일한다. 특히 당원연수센터를 통한 당원 교육과 ‘정치아카데미’를 통한 정치인 양성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특징을 지녔다.


95년 설립해 정당 부설 연구소 가운데 가장 오래된 한나라당 부설 여의도연구소(소장 윤건영)에는 행정직원 4명을 포함해 모두 27명이 상근한다. 예산은 연간 약 34억원.


연구소는 17대 총선을 앞둔 정당법 개정으로 국고보조금을 받게 되면서 연구분야를 정비했다. 현안과 관련해 당에 이론적 뒷받침을 해 오던 연구소의 위상도 중장기 정책과제를 다루는 방향으로 바꿨다. 정치행정팀, 경제팀, 통일외교(대외)팀, 사회문화팀 등 4개 분야에 각각 2~3명씩의 연구원이 배치돼 있다.


지난해 10월 문을 연 민주노동당 부설 진보정치연구소(소장 장상환)에는 연간 약 6억원의 예산이 배정된다. 연구원 5명과 행정직 3명 등 모두 8명이 일한다. 연구원들은 정치, 경제, 사회복지, 평화군축 등 4개 분야를 맡고 있다.


이밖에 민주당 부설 국가전략연구소(소장 김유배)와 자민련 부설 정책연구소(소장 김한선) 등 모두 5개의 정당 부설 연구소가 선관위에 등록돼 있으며, 국가로부터 분기별로 정당보조금의 30%를 지원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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