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이후 20년간 사용해온 ‘구로공단’ 지하철 2호선 역명이 지난해 9월부터 ‘구로디지털단지’역으로 바뀌었다. 1960년대 수출산업 육성방안으로 조성된 구로공단이 디지털1단지, 디지털2단지, 디지털3단지 등으로 이름이 바뀐 것은 약 5년 전이다. 정부는 지난 2000년 12월14일 구로공단의 명칭을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변경하고, 제조업 공장이 철수한 이곳에 벤처벨리를 구성하겠다고 선포했다.
 
그러나 1공단·2공단이 디지털1단지·2단지로 바뀌고 이곳을 통과하는 지하철역이 더 이상 ‘공단’이란 명칭을 쓰지 않으면 뭐하나. 지금도 구로지역 노동자들은 횡행하는 불법파견과, 경쟁적인 저가낙찰로 인한 저임금에 몸살을 앓고 있다.


이름만 바뀌었지…

“이름만 바뀌었지 이 아파트형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모두가 제조업 생산직이다. 오히려 예전 공단 시절보다 훨씬 더 열악한 영세 사업장들이 몰려 있기 때문에 노동조건은 더욱더 열악해졌다고 볼 수 있다.”

박경선 금속노조 서울지부 남부지회 사무장은 최근 디지털단지 입주 업체들의 실태를 조사해본 결과 과거 섬유·화학·철강 등 제조업 공단 시절보다 상황이 오히려 더 심각해졌다고 말한다.

아파트형 공장에 입주해 있는 A업체. 전자 부품을 생산하는 이 사업장은 30~40명의 생산직 노동자 중 12명 정도가 인력 파견회사로부터 파견된 노동자들이다. 그런데 이 회사 파견 노동자들은 A업체 사원 15명과 함께 같은 생산라인에서 일하고 있으며 노무관리도 A업체로부터 직접 받고 있다. 제조업 직접공정에 대해 파견을 금지하고 있는 현행 파견법도 그렇고, 원청업체가 직접 노무관리를 하고 있어 명백한 불법파견인 셈이다.
 
이곳에서 일하는 파견 노동자들이 받는 급여는 기본급 68만원, 상여금 200%. 얼마 전 A업체는 기존 파견회사와 계약이 만료되자 최저입찰제를 도입해 파견회사를 변경했다. 기존 파견 노동자들은 다행히 새 업체로 모두 고용승계가 됐지만, 입찰 금액이 낮아 급여가 삭감될 수도 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B업체에 근무하는 파견 노동자 이 아무개씨. 그는 어느 날 날벼락 같은 헨드폰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일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으니 그만 나와라.” B업체 관리자로부터 받은 문자 메시지였다. B업체는 이씨와 같은 파견 노동자들의 노무·인사 관리를 직접 했던 것은 물론이고, 직접 해고하기까지 했다. 또 다른 업체인 C업체는 아예 입사 과정에서부터 파견노동자를 직접 면접한다.

반도체와 LCD 모니터 등 첨단 전자제품을 생산하는 국내 굴지의 전자회사인 L전자가 설립한 도급회사인 D업체도 불법파견을 쓰고 있다. 현행법에는 재하도급이 금지돼 있고, 제조업에는 파견이 금지돼 있는데도 도급업체가 파견노동자들을 쓰고 있는 것이다.

박경선 사무장은, 이 같은 불법파견 형태의 난립은 그렇지 않아도 20~50명 규모 영세 사업장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더욱더 열악하게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구로단지 입주 업체 대부분이 제조업이기 때문에 파견 자체가 불법인데도 대규모 모집형 파견회사를 통해 구인을 한다. 회사가 직접 뽑는 구인광고를 내지 않는다. 마치 파견 노동자를 쓰는 것이 ‘유행’이 된 것 같다. 중소영세업체의 구인난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진짜 이유는 난립해 있는 파견 회사를 상대로 경쟁을 유도해 저가입찰을 하고 이를 통해 노동자들을 최대한 싼 값으로 쓰려는 것이다.”

전자 부품 조립한다고 ‘첨단’이냐

파견 노동자들을 구입한 업체는 대부분 여러 파견업체 소속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업체간 경쟁체제를 도입한다. 이는 곧 A업체의 경우처럼 최저입찰제라는 명목으로 파견 노동자들의 고용불안을 유발하고, 그렇지 않으면 더 싼 가격으로 입찰한 파견업체로의 전적을 요구해 노동자들의 임금삭감을 강요하는 것이다.

이 같은 저임금 불법파견이 횡행하면서 노동자들은 상습적인 임금체불과 최저임금 위반 등에 그대로 노출돼 있다. 실제로 서울노동청이 집계한 서울지역 체불임금 미청산율은 49%인 데 비해, 구로디지털벨리가 소속된 관악지방노동사무소는 53%로 서울지역 전체보다 높았으며 특히 5인 미만 사업장의 미청산율은 62%에 달해 이 지역 영세사업장의 임금체불 문제가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저임금 위반 문제는 임금체불보다 더 심각했다.

민주노총, 한국노총, 민주노동당, 민중연대와 자문 변호사, 노무사 등으로 구성된 서울남부지역공동대책위원회에 따르면 공단 내 대부분 업체들이 최저임금 산출 방식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문재훈 공대위 정책조사팀장은 “오히려 공단내 업체들이 최저임금 제도에 대해 물어오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문 팀장은 또 “알고 있는 업체의 경우에도 이를 지키기보다는 기존 기타 수당을 고정수당으로 고쳐서 법은 피하되 임금인상은 억제하는 방식을 쓰고 있었다”고 밝혔다.

구로지역은 IMF 이후 급격한 정리해고와 구조조정, 제조업의 지방 또는 중국 등 해외 이전 추세 속에서 많은 공장들이 철수해 공동화 현상을 빚게 됐다. 80년대 최대 8만에 육박했던 공단 노동자 수가 3만명 남짓으로 줄어들었고 구로지역 경제는 심각한 침체기를 맞게 됐다. 그러자 정부는 벤처, 연구·개발, 첨단정보·지식산업 중심의 최첨단 벤처벨리 구성을 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이후 50여개의 아파트형 공장이 들어섰다. 이후 2001년을 정점으로 노동자들이 꾸준히 늘어 지금은 2,560업체가 입주해 있고 54,180여 명이 일하고 있다.
 
그러나 겉으로만 보면 무언가 변한 것 같지만, 구로공단이 아닌 구로디지털벨리의 업체들도 여전히 영세하다. 노동자들은 예전보다 더 못한 저임금뿐 아니라, 이제는 불법파견이라는 새로운 ‘중간착취’ 형태에 시달리고 있다.
 
20년 전인 1985년 군사독재 시절의 구로공단 노동자들은 민주노조를 탄압하는 정권에 맞서 동맹파업을 일으켰다. 이제 2005년, ‘디지털’이라는 허울만 쓴 채 온갖 불법과 탈법이 방치되고 있는 구로지역의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면, 또다시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 모를 일이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