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민주노총 대대를 앞두고 <매일노동뉴스>가 연재하고 있는 <지상격돌!> 두번째로 실린 임성규 전진 의장의 원고에 대한 박용석 공공연맹 부위원장의 반론에 대해 장석원 전진 정책위원이 재반론을 보내왔다. <편집자주>



임성규 전진 상임의장의 견해에 대한 박용석 동지의 반박글을 보면서 현실의 검증을 이기지 못하는 이론의 비판은 결국 ‘방어를 위한 방어일 뿐’이라는 안타까움 밖에는 들지 않았다. 귀한 지면을 낭비할 필요 없으니 간단히 서술하겠다.

먼저 박용석 동지에게 묻고 싶다. 정말로 노동계급의 위기와 노동자의 삶의 위기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글을 보면 박용석 동지는 노동자들의 삶의 위기는 자본의 공세라는 외부 요인에 의해, 노동계급의 위기는 운동의 전망 부재라는 내부 요인에 의해 발생한다고 인식하고 있다.

위기의 원인을 일면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은 물론이고, 위기의 극복을 총체적으로 고민하지 않고 국면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생각은 매우 위험한 사고라는 것을 우선 지적하고 싶다.

나아가 지금 노동자들의 삶의 위기는 단순히 사는 게 팍팍한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노동”의 존재조건과 사회적 지위 자체를 송두리째 뒤바꿔놓으려는 정권과 자본의 공격 앞에서 지난 수년간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한데서 오는 지속적인 후퇴, 그것이 바로 우리 노동자들이 직면한 “일상적” 위기인 것이다.

박용석 동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노동자의 삶이 자본의 공격에 의해 벼랑에 내몰리고 있는데, 조직노동자는 스스로의 덫에 걸리고, 계급전체는 분리되고, ‘지양’의 전망은 여전히 어두운 것”, 그것이 바로 노동계급의 위기다.

또한 박 동지는 산별교섭에 관한 이야기를 했는데, 이 과정에서 자기 논리를 방어하기 위해 현실을 가공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반박글은 “산별교섭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양보교섭도 감수해야 할 만큼 우리 사정이 열악하다. 따라서 사회적 교섭이 자연스럽게 도출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은 민주노총 지도부가 조직을 어떻게 산별로 재편하고, 산별교섭을 정착시키겠다는 계획과 비전이 없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사회적 교섭을 제기하는 것이라고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현실은 산별교섭이 잘 안 될 때 사회적 교섭이 요구되는 게 아니라, 산별교섭이 정말 잘 될 때, 그래서 산별 차원에서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걸러지고 남았을 때, 비로소 현장의 요구와 전산업적인 투쟁을 통해 사회적 교섭이 정권과 자본에게 강제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시기 사회적 교섭은 단위사업장 수준의 모든 문제들을 모아서 제기하고 정작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불임의 교섭으로만 그치는 게 아니라, 산별전환을 거부하고 사업장의 틀에 안주하려는 경향에 면죄부를 주게 될 것이다. 결국 산별전환을 가로막는 “운동의 자살행위”로 전락할 것이다.

이제 글을 정리하겠다. 우선 “투쟁의 승리는 사회적 교섭을 ‘뛰어넘어’, ‘세상을 바꾸는 큰 투쟁’을 필요로 한다고 선언”해야 한다는 박용석 동지의 말에 100% 동감한다. 그래서 임성규 동지는 자신의 글에서 사회적 교섭 ‘안건’을 넘어서서 다시 세상을 바꾸는 투쟁에 나서는 자리로 이번 임시대의원대회를 만들자고 호소한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많은 동지들이 지금 사회적 교섭에 들어가면 세상은 못 바꾸고 민주노총만 바꾸어버릴 수 있다는 우려를 가지고 있다. 이 우려를 묵살하는 것이 아니라 덜어내주는 것이 지도부의 임무 아니겠는가.

다시 한번 박 동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총연맹차원의 단순한 교섭전략에 불과한 것을 왜 위원장이 자기 불신임까지 해가면서 완강하게 밀어붙이는 것”인가?

‘노동해방’의 꿈을 여전히 견지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낡은 운동방식”을 고집하겠는가. 그러나 이미 7년 전에 파산난 기획을 ‘새로운 것’이라고 고집해서도 안 된다. 지도부를 위해 한번 눈감아 주기엔 파산의 아픔이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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