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 지도부 사이의 ‘과거사법-행정도시법 빅딜’ 의혹이 불거지면서 사태가 일파만파 번지고 있다.

열린우리당 정세균 원내대표가 지난 3일 기자간담회에서 “(한나라당이) 행정도시법을 원만하게 처리하기 위해서는 과거사법을 연기해주는 것이 좋겠다는 완곡한 요청이 있어서 제가 수락한 것”이라며 ‘빅딜을 시인하는 듯한’ 발언을 하면서 불붙은 이번 파문의 최대 피해자는 일단 한나라당이다.

가뜩이나 행정도시법의 국회처리를 둘러싼 내분으로 ‘분당’ 위기까지 치달았던 한나라당 지도부는 이로 인해 치명타를 맞은 셈이 됐고, 이는 결국 김덕룡 원내대표의 사퇴로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번 사태와 관련 줄곧 한나라당에게만 비판의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는 점이다. 의혹이 확인될 경우 빅딜의 ‘핵심 당사자’일 수밖에 없는 열린우리당에 대한 비판이나 문제제기는 찾기 어렵다. 특히 이른바 범개혁진영 세력들의 태도는 더욱 그렇다.


지난 4일 홍준표 한나라당 혁신위원장이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박근혜 대표를 겨냥, “과거를 숨기기 위해 수도를 팔아먹었다”고 직격탄을 날린 것을 필두로 개혁진영은 한나라당 공격의 닻을 올렸다. 홍 위원장은 이번 협상을 보면 “결국 한나라당 지도부가 일방적으로 당한 것”이라며 “그래서 한나라당이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인 사쿠라당이란 말이 나오는 것”이라고 지도부를 맹성토했다.

홍 위원장의 ‘사쿠라 발언’ 이후 개혁성향 언론들은 일사분란하게 한나라당을 흔들기 시작했다. 예컨대 친노 성향의 인터넷매체 데일리서프라이즈(데일리서프)에서 ‘행정도시’로 검색한 결과, 관련 보도목록은 ‘대략’ 이렇다.

한나라 내분 여진…“박근혜 사퇴하라 vs 사퇴 말도 안돼”  2005-03-06 13:36
우리당 “한나라 집안싸움 핑계를 왜 떠넘기는가” 2005-03-06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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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당, 법사위 농성 한나라 4인방 윤리위 제소 2005-03-05 14:03
[분석] 내분 봉합…‘가늘고 길게 박근혜 흔들자’로 결론  2005-03-04 21:10
이명박-손학규 내홍대응 달라 2005-03-04 17:41
원희룡 “조기전당대회는 무슨말? 박근혜 결정 옳다” 2005-03-04 16:15
행정도시법 후폭풍 박사모 안에서도 내전 2005-03-04 16:26
정세균, 행정도시법-과거사법 ‘빅딜설’ 무마나서 2005-03-04 16:08
 
빅딜설과 관련, 한나라당의 내분 양상은 키우되, 열린우리당의 ‘담합’ 책임론에 대해선 비껴가고 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정세균 대표의 빅딜설에 대해선 “무마에 나섰다”는 식으로 보도하는 반면, 한나라당에 대해선 ‘내전’ ‘여진’ ‘가늘고 길게 박근혜 흔들자’ 등의 표현을 사용해가며 ‘분석’ 기사까지 실었다.

이같은 보도태도는 ‘내분과 국회깽판’의 원초적 책임이 한나라당에 있다는 점을 십분 이해한다 해도, 사태 책임의 한 축인 열린우리당에 대해선 이상하리만치 ‘관대함’을 보이고 있다는 지적을 면키 어렵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들 매체들의 경우 3일 오전 정세균 대표의 ‘빅딜 시인성’ 발언이 터진 이후 한동안 관련 보도에 소극적이었다는 점이다.

데일리서프는 다음날 오후에야 박근혜 대표의 발언을 인용 “정세균 대표의 발언에 대해 법적대응을 검토하겠다”는 내용의 기사를 내보냈고, 오마이뉴스 역시 홍준표 위원장의 ‘사쿠라 발언’ 단독보도와 함께 정세균 대표의 해명을 덧붙여 뒤늦게 ‘빅딜설’을 보도했다.

데일리서프는 정세균 대표의 3일 기자회견을 보도하긴 했으나 “법사위 월권 개선하겠다”는 내용을 제목으로 뽑은 뒤, 빅딜설과 관련한 정 대표의 멘트를 “과거사법을 2월 임시국회에서 처리하려 했으나 행정도시법 처리에 밀려 연기돼 아쉽다”로 처리해 사실관계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오마이뉴스의 경우 정 대표의 발언이 나오기 전날인 2일, ‘행정도시법이 과거사규명법 발목 잡았다?’ 제하의 기사에서 김부겸 의원의 발언을 인용해 빅딜설을 ‘먼저’ 보도했다. 그러나 이 기사는 한나라당 ‘난동’ 등에 초점을 맞춘 기사들에 밀려 화면 하단부의 ‘작은제목’ 기사로 처리되고 말았다.

아직 ‘시인인가, 말 실수인가’라는 논란 지점이 남아있긴 해도 여당 실세의 발언인데다 정국의 흐름 속에서 충분히 ‘뉴스가치’가 있음에도 이를 보도하지 않은 것은 뭔가 석연치 않은 대목이다. 더욱이 국회 신행정수도후속대책특별위원회 소위원장이기도 한 박병석 열린우리당 의원이 4일 “정부와 여당은 (행정중심복합도시)특별법 통과를 이번 임시국회의 최우선 과제로 선정했다”며 “통과를 위해서 많은 것을 고려했다”고 밝히는 등 재차 빅딜 시인성 발언을 했음에도 이를 크게 보도하지 않은 점 역시 석연치 않다. 

대표적 친노 성향 사이트인 서프라이즈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첫 화면의 대문 글 중엔 빅딜 관련 글은 아예 없을 뿐 아니라, 그나마 쟁점토론방에 두어건 정도 올라온 과거사법 관련 글엔 특별한 댓글도 달리지 않았다. 과거사 문제와 관련, 누구보다 ‘역사 바로세우기’를 주창하며 피를 토했던 서프라이즈 필진들은 약속이나 한 듯 침묵을 지키고 있다. 

열린우리당측 역시 마찬가지다. 열린우리당 홈페이지 당원게시판은 4월로 예정된 전국대의원대회와 관련, 각 후보들간의 ‘당권경쟁’만 치열할 뿐 과거사법 처리 연기 등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눈에 띄지 않는다.

이미 빅딜설 파문으로 쏠쏠한 재미를 본 열린우리당은 사태의 ‘진화’에만 열심이다. 우리당 오영식 원내부대표는 6일 “있지도 않은 빅딜설을 제기해 여당의 원내대표를 몰아세우는 것은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하는 식의 잘못된 행태”라며 “당 내분을 호도하려는 정치적 술수”라고 비껴갔다.

이같은 개혁진영의 태도는 다분히 ‘정략적’이라는 비판을 면키 어려울 것 같다. 과거사 문제를 이슈화시키는 과정에서 이들 개혁세력들이 어떤 ‘절절한 언어’들로 자신들의 정당성을 선전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한승조 전 고려대 명예교수의 ‘식민지배 축복’ 망언과 관련, 국민적 분노의 맨 앞에 서 있는 이들이 ‘개혁세력’들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침묵은 다분히 ‘이중적’이다.

지금으로부터 꼭 1년 전 국회에서 ‘친일규명법’ 문제가 논란이 됐을 때, 당시 노원희망포럼 대표 우원식씨(현 국회의원)는 서프라이즈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린 바 있다.

“과거를 알지 못하는 민족에게 그 역사는 반복되기 마련이다. 한나라당은 지금이라도 ‘친일규명법’을 축소시킨 자신의 잘못을 국민들 앞에 사죄하고 ‘친일규명법’을 원래의 취지대로 추진하는 데 함께 해야 할 것이다. 연예인 이승연씨의 위안부 누드 파문에서 알 수 있듯이, 국민들은 ‘친일규명법’을 반대하는 한나라당 총선후보자들에게 준엄한 심판을 내릴 것이다.”

마찬가지로 묻고 싶다. 그렇다면 오늘 이 순간, 과거를 비껴가고 침묵하는 세력들은 과연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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