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전태일 열사가 지켜지지 않던 근로기준법전을 안고 자기 몸을 불사른 청계천 평화시장을 지나면 을지로 인쇄골목이 나온다. 대부분 10인 이하의 영세 인쇄업체들이 모여 있는 이 골목에서 최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인간답게 살고싶다”는 구호가 메아리 치고 있다.

사장 욕설 참다못해 노조 결성 - 성진애드컴

“나보다도 한참 어린 사장 아들이 ‘이사’라는 직함을 달고 직원들에게 ‘이 새끼’, ‘저 새끼’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이를 참지 못하고 그만 둔 직원들만 해도 열손가락이 부족할 지경입니다.”

“욕설도 참기 힘든데 어느 날은 한 여자직원을 향해 저렇게 뚱뚱한 년은 뽑지도 말고 일도 시키지 말라고 거침없이 말하더군요.”

을지로 인쇄골목에서는 꽤 규모가 큰 ‘성진애드컴’ 노동자들은 지난해 5월 사장과 그 아들인 김아무개 이사가 내뱉는 욕설과 인격모독성 발언들을 참다 못해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언론노조 서울경기인쇄지부 성진애드컴분회(분회장 이지훈)는 을지로 인쇄골목에서 단일 사업장으로는 최초로 결성된 노동조합이다.

“생리사실 증명하는 진단서 가져와라”

이들 성진애드컴분회 조합원들은 노조가 결성되고 나서야 근로기준법에 근로시간이 명시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보통 이 일대 인쇄업체들은 24시간 맞교대 근무를 하고 있다. 이지훈 분회장은 “하루 평균 12시간을 꼬박 일하는 것은 물론 연장근무 역시 밥 먹듯이 하고 있다”며 “사장이 ‘오늘은 1시간 더 연장한다’거나 ‘내일은 1시간 더 일찍 출근하라’고 하면 어쩔 수 없이 일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한다.

이 뿐 아니라 연월차휴가와 보건휴가도 전무하다. 노조 결성 이후 성진애드컴 여성조합원들은 보건휴가 사용을 요청했지만 회사는 “생리 사실을 증명하는 병원 진단서를 제출할 것”을 요구하는 공문을 전 여직원들에게 발송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언론노조에 따르면 인쇄업계 특히 상업인쇄를 주로 하는 중소영세업체에는 연월차 휴가 개념과 명시적 노동시간에 대한 규정이 대부분 없다고 한다. 이렇게 근로기준법마저 철저히 무시되고 있는 상황에서 성진애드컴분회는 단체협약을 체결하기 위해 지난해 6월부터 회사쪽과 교섭을 벌여왔다.

주요요구안은 △근로시간 정형화 △경조휴가 및 경조금 지급 △연월차 휴가의 즉각 실시 △전임자 규정과 월 4시간 유급 임원회의 시간 보장 등 근로기준법 준수와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나 회사쪽은 다른 업체들과의 형평성 등을 이유로 교섭에 적극 나서고 있지 않다.

1월 파업, 53일째 투쟁 중

지난해 8월 서울지노위의 조정과정에서 성진애드컴 노사는 근로시간 정형화, 연장근로 시 노사합의 등 일부 조항에 합의하고 추후 교섭키로 했으나 사쪽에서 돌연 취업규칙을 변경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에 따라 성진애드컴은 지난 1월 파업에 돌입, 4일 현재 53일째에 접어들고 있다. 지난 3일 파업 이후 처음 열린 교섭에 김아무개 사장이 자리했지만 교섭진행 상황과 관련된 경과를 전혀 모르고 있어 또다시 무기한 연기됐다.

언론노조 한 관계자에 따르면 을지로 인쇄업체들은 성진애드컴분회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한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성진애드컴분회의 외침이 인쇄업체들이 밀집한 이 지역에서의 노동자들을 술렁이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진애드컴분회는 민주노총 서울본부, 민주노동당 중부지역위원회 등과 함께 연대해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매주 목요일마다 집회를 개최하고 있다. 이진훈 분회장은 "노조를 인정하고 노동자를 인간답게 대할 때까지 계속 싸울 것"며 "앞으로 철야농성 등 투쟁수위를 더욱 높여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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