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1920년대 이후 일제하 독립운동사 또는 민족해방운동사에서 사회주의운동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의 황국신민화정책 등 민족말살정책에 포섭돼 많은 조선인 지식인들이 친일과 변절의 길을 거듭했지만 일제하 사회주의자들은 대부분 지조를 지켜나가는 대조적 모습을 보였다.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이 성공하면서 조선을 비롯한 중국, 인도 등 식민지·반식민지 나라에는 사회주의사상이 물밀 듯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특히 1919년 3·1운동 이후 중국과 일본뿐 아니라 지리적으로 러시아에 인접한 우리의 경우도 예외 없이 사회주의사상의 조류가 유입됐다.
1922년 초 ‘김윤식 사회장 사건’은 민족주의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의 첫 번째 대립이었다. 한말의 대제학으로 일제 때 작위를 받았던 김윤식의 사회장 문제를 둘러싸고 사회주의세력은 격렬한 반대를 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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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 창립당시 중앙집행위원 50명 가운데 노동운동 중앙위원명단과 사회주의 분파, 소속 단체를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다.<표 참조>
이 시기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 대중운동은 사회주의운동과 밀접한 연관 속에서 이뤄졌다. 예컨대 이번 서훈 대상자 가운데 권오설은 조선노농총동맹 집행위원이면서 조선공산당 산하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한 2004년 서훈됐던 서울파의 지도자 김사국은 1922년 자유노동조합 대회 조직, 1923년 고려공산동맹 창립, 전조선청년당대회 조직(1923년), 사회주의자동맹 창립(1924.6), 조선사회운동자동맹 상무위원(1925.4), 전조선노농대회 준비위원(1925년) 등 노동운동, 사회주의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사회주의운동, 노동운동은 일제하 민족해방운동,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
그동안 잊혀져왔고 잊혀지기를 강요당해왔던 사회주의운동,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복권은 우리사회가 그동안 극악한 반공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좀 더 균형 잡힌 사회로 나아가는 과거청산의 의미와 한국근현대 역사 서술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