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사회는 과거청산의 열기가 어느 때보다도 높다. 역사적인 합법칙적인 발전의 단계에서 당연한 수순을 밟고 있는 것이다. 즉 과거 권위주의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을 통해서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는 과정이다. 과거청산은 탈권위주의 운동 또는 민주주의로의 이행기에 사회적으로 ‘정의의 회복’ 문제와 관련이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세력’의 정당성의 근거를 축적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과거청산을 둘러싸고 한나라당의 일부의원과 우리사회의 기득권층을 형성해 온 세력들은 과거청산 작업이 국민을 분열시킨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과거청산의 본질인 진실에 대한 기반을 중요한 가치로 간주하지 않고 정권유지를 위해서 갖가지 살인, 고문을 자행하고 이를 조작, 은폐해왔던 과거의 잣대에 젖어있기 때문이다.
 
가해자의 역사인식은 파시즘으로 이어진다. 이에 반해 우리의 사회적 기억이 피해자의 고통과 아픔을 착목한다는 것 자체가 민주주의의 골간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과거청산은 바로 피해자의 역사인식이며 나아가 민주주의의 완성을 위한 하나의 주요한 여정이다.

최근 과거청산을 둘러싸고 국가기관들 스스로 과거청산을 위한 노력을 벌이고 있다. 국정원의 과거사 발전위원회나 경찰의 과거사위원회가 이미 활동을 개시했고, 국방부와 검찰도 곧 이들 활동을 벌일 예정이다. 국가기관이 스스로 과거와의 단절을 통해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은 칭찬받을 일이다. 하지만 이런 과거청산 방식은 두 가지 점에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국가기관이 과거청산에 대한 체계적인 기관의 반성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둘째는 법적인 조건이 마련돼 있지 못하기 때문에 과거청산의 중요한 요소인 피해자에 대한 조치를 제대로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과거청산은 과거 권위주의 체제에서 벌어진 인권피해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과 더불어 그 피해자들과 유가족들에게 대한 명예회복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이들에게 적절한 피해 배·보상과 함께 재발방지를 위한 제반조치를 수행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러한 유엔의 기준에 부합하는 작업은 일상적인 국가 사무를 분장하고 있는 법체계에서는 할 수 없고 따라 별도의 기관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 과거청산법의 제정 문제가 제기된다.

과거청산 문제는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 즉 국가폭력의 피해자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다. 따라서 과거청산법 제정과 관련해서도 피해자의 문제가 자리 잡아야 한다. 그런데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합의한 법안의 내용을 보면 이해 집단의 이익을 조합한 것이다.
 
이 법안은 역사해석의 문제와 과거청산의 문제를 구분하지 못하고 과거의 일에 대한 정리(이른바 과거사 정리론)을 제기하고 있다. 이것은 과거청산을 결국 과거에 대한 현재의 타협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암울했던 과거를 극복하기 위한 역사적인 진실에 대한 사회적 기억의 공유를 통한 재발방지라는 과거청산과는 거리가 있다.

사실 우리 사회는 과거청산과 관련해 입법적인 조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거창사건명예회복법이 있었고 5.18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법률이 제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삼청교육대 피해자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을 규정한 법률이 제정됐으며, 일제강점기의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문제와 친일 진상규명법 개정안이 마련됐다. 하지만 이런 모든 노력은 파편적이거나 진실에 대한 접근을 생략하거나 상당히 어렵게 만든 것이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 이런 노력들은 인권피해자들의 장기 민원문제를 해결하는데 급급해 사회적인 기억을 복원하고 공유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과거청산법은 통합법적인 성격을 갖고 있으며 어떤 면에서 과거청산에 대한 최초이자 마지막 입법이다.

과거청산은 단순히 역사를 해석하는 일을 넘어 국가가 공식적으로 조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 조사를 위한 충분하고 필요한 권한을 가진 독립적인 기구를 마련하는 일이 첫 단추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합의하고 있는 과거청산법은 현실의 타협물이지 진정한 과거청산법이기는 어렵다. 제대로 된 과거청산법을 제정하는 일 자체가 과거청산의 첫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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