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의 위기에 대한 말이 넘쳐난다. 이 위기는 외부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왔기 때문에 더욱 심각하다고들 말한다. 이런 현상을 증폭시킬 수도 있는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는 다행스럽게도 토론 기간을 거친 후에 재개되는 것으로 결정됐다. 이 기회에 제대로 된 토론을 하기 위해서는 내부의 뿌리 깊은 이견을 밑둥째 드러내 보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참에 노동조합운동의 근원적 정당성마저 부정하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오랜 기간 들어왔지만 이번 일로 새삼 귀담아 들을 새로운 내용이 있는 건 아니다. 상생과 통합의 새로운 노사관계로 전환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새로운 건 아니다.
 
세계사적으로 노사관계란 ‘비합리적인 갈등’으로서 근본적으로 ‘지양’돼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는 체제통합적 사고의 뿌리가 존재했다. 현실의 한국 노동운동의 문제점을 지목하면서 말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노사 갈등이란 피치 못할 대립이 아니라 조정·타협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있다. 한국에서는 87년 이후 독재의 하수인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벗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입에서 이와 비슷한 얘기가 나온 적이 있다. 91년 전투적 노동조합주의 ‘논란’ 이다.

91년은 어떤 시기였나? 사이비 민주주의의 시기였던 노태우 정부 시절, 87년 이후 급성장한 한국 노동운동이 일시 침체를 겪던 시기였다. 80년대 장기호황의 몰락과 중소기업의 줄도산으로 민주노동운동의 중심축인 전노협 소속의 중소영세 사업장들이 무너졌다.
 
87년 이후 노동운동의 기대주로 등장한 재벌 대기업 노조는 정권과 치열한 대결을 펼치다 공안정국 시기에 집중 탄압을 받아 침체 국면에 접어드는 듯했다. 당시 노동운동은 ‘뒤늦은 성장과 때이른 쇠퇴’를 경험한다는 조롱 섞인 진단을 들어야 했다. 그리고 노동운동에게 제시된 해답은 임금인상 위주의 양적 쟁점보다는 생산체제의 질적 전환을 추구하는 대안적 노동운동이었다.
 
또한 노동운동은 갈등만 부추기는(또는 패배만 경험하며 국민으로부터 외면받는) 파업을 일삼기보다는 경영참가, 정책참가의 수단을 개발하고 노동의 인간화를 실현하는 사민주의적 노사관계 대타협 모델을 따를 것을 요구받았다.

이런 논란을 마무리 지은 건 반론이 아니라 현실의 흐름이었다. 노동운동은 문민 정권과 맞서는 동시에 자본과 직접 대결하면서 이 갈등이 간단히 해결될 문제도 아니며, 노동운동이 그냥 소멸하는 것도 아니라는 걸 입증했다.
 
하지만 전투적 노동운동 비판은 정권이 바뀌고 절차적 민주주의가 진전될수록 강도를 높여 줄곧 제기됐다. 그 밑바탕에는 날로 가혹해지는 반(反)노동을 겨냥한 ‘시장’의 힘을 진전된 ‘제도’로 제어해 대립과 갈등이 소멸할 수 있다는 시각이 깔려 있다. 노사정위든 사회적 교섭이든 현 정부 하에서 제도적 해법을 통해서도 가능하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자유시장을 축으로 한 민주주의 과제에 초점을 두는 자유주의 정부와 노동운동의 일치점이 어느 정도일까? ‘전술적 활용론’의 진의는 노동운동이 나아갈 길에 대한 상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판단할 길이 없다. 자유주의 개혁마저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정부와의 협상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만으로 불충분하다. 이 시대 진보의 가치가 무엇인지 분명한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는 노동운동 일부의 무능력과 현실 대응력 부재가 현 위기의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현장으로 돌아가자는 활동방식 강조와 정치경제학 교과서의 한 대목을 따오는 이념 제시 사이의 공백을 무엇으로 메울 것인가? 분열의 상처보다는 분열이 갖는 종파주의의 징후가, 그보다는 별다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진보의 불명료함이 더욱 심각하다.

그래도 노동운동만이 희망이다. '시장'에 대항할 힘은 '노동'밖에 없다. 민주의 과제를 선차적으로 제기하는 개혁동조세력은 시장의 과제에 침묵하며 삶의 세계를 방치해 상대에게 전권을 양도하고 있다. 타락하고 분열하고 퇴락현상을 보여도 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집단은 노동이다. 노동에 희망이 없다면 세상에 다른 희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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