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만이 유일한 선택의 길인 것 같은 가장 열악한 상황을 불굴의 의지로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들의 ‘실제 이야기’를 영화는 참 좋아한다. 그런 면에서 지난해 6월 74세로 생을 마감한 전설적인 흑인 맹인 가수 레이 찰스는 필연적으로 영화화되어야 할 인물이었다.
 
레이 찰스는 알려진 대로 녹내장을 얻어 7살 때 시력을 잃었지만 시각장애와 흑인이라는 악조건을 극복하고 40여 년간의 음악 활동을 통해 무려 13차례나 그래미상을 수상한 전설적인 뮤지션이다.
 
지난 13일 개최된 올해 제47회 그래미 시상식에서는 이미 고인이 된 그가 마지막 앨범 ‘천재는 친구를 좋아해’(Genius Loves Company)로 올해의 음반, 최우수 앨범, 최우수 보컬 등 무려 8개 부문을 석권했다.
 
당시 시상식이 열린 미국 LA 스테이플스센터. 영화 <레이>의 주인공 제이미 폭스가 레이 찰스의 히트곡 ‘조지아 온 마이 마인드’(Georgia on my mind)를 부르기 시작했다. 대형 무대 뒤편 스크린에서는 레이 찰스의 생전 모습이 비춰졌고 관객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터뜨렸다. 그는 세상에 없지만, 혼을 부르는 것 같은 음악의 감동은 여전히 살아 있었고 이미 레이를 너무 닮아 버린 제이미 폭스는 다시 한번 그를 관객들의 곁에 영원히 머물도록 만들고 있었다.
 

 
마냥 착하지만은 않은, 그래서 인간적인 영화
 
영화 <레이>는 성인 레이(제이미 폭스)가 음악인으로서 성공하는 시간의 흐름을 쭉 보여 주면서, 별다른 설명 없이 중간 중간 과거 어린 시절 장면으로 갑자기 돌아가는 ‘플레시백’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소작농으로 일하며 가난하지만 강인한 생활력을 가진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레이. 그는 어느 날 동생의 사망 사고를 목격하고 “왜 동생이 죽는 것을 보고만 있었니?”라는 질타를 받은 후부터 녹내장을 얻어 서서히 시력이 나빠지다 7살에 완전히 맹인이 된다.
 
눈이 먼 아이를 무조건 돌봐주기보다는 홀로 설 수 있는 강인함을 길러 주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한 그의 어머니는, 비록 가난했지만 아이를 맹인주립학교까지 보내 체계적인 교육을 받게 한다. 그 후, 오히려 벌레의 움직임이나 새의 날개짓 등 미세한 소리의 움직임까지 느낄 정도로 예민한 청력을 갖게 된 레이는 15살 때 유일한 혈육인 어머니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게 된다. 그렇지만 ‘세상 밖’으로 나가도록 도와준 그 어머니 덕분에, 그는 편견과 마약 중독 등 온갖 시련을 극복하고 결국 최고 뮤지션으로 우뚝 선다.
 
영화 <레이>는 이야기 구성상으로는 어쩌면 식상하다고 느낄 수 있는, 평범한 ‘전기영화’의 구성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인종차별이 극심하던 시대, 흑인이자 장애인이라는 ‘치명적 단점’을 오직 음악에 대한 열정 하나로 극복해 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여느 ‘착한’ 전기영화들과는 달리 레이 찰스 개인의 ‘위대함’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는다.
 
처음으로 클럽 가수 일자리를 얻어 도시로 가는 버스를 타려고 하지만 흑인과 백인의 버스 좌석도 다르던 그 시대, 백인 운전기사는 그의 탑승을 거부한다. 그러자 그는 불합리함에 저항하기보다는 ‘노르망디전 상해 군인’이라며 백인 기사의 애국심에 호소해 차를 탄다. 차별에 대한 억울함과 분노보다는 당장 음악을 하러 가야 한다는 열정이 워낙 컸기 때문이다.
 
종교음악인 가스펠과 블루스를 접목해 ‘소울’이라는 장르를 새롭게 개척할 정도로 음악에 관한 한 타고난 천재이자 독보적 존재였지만, 그는 자신의 재주로 장사치들과 거래를 할 줄도 안다.
 
그는 또 무명 때부터 동고동락을 했던 밴드 연주자도, 그를 스타로 만들어준 음반 기획사도 돈과 이해관계가 얽힌 일이라면 거침없이 내쳐 버린다. 스타가 되면서 여성편력이 심해지고 마약에 한층 탐닉하게 되자 단란하던 가정은 만신창이가 된다. 그래도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에게 가정은 깰 수 없다고 고집을 피운다.
 
영화는 이처럼, 어쩌면 미국 대중음악계에서 흑인의 신분으로 최고의 위상을 갖기 위해서는 필연적이었을 수도 있는 레이의 과거도 미화하지 않고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음악에 대한 열정 때문에 현실에 순응해 왔던 것처럼, 역시 또 음악 때문에 자신을 추스르기도 한다. 질긴 마약의 유혹을 단호히 뿌리 칠 수 있었던 것은, 약 때문에 음악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백인 관객에게만 공연 좌석을 주고 흑인에게는 입석밖에 배정하지 않는 조지아주의 차별 정책에 맞서 공연을 거부한 것을 시작으로, 그는 흑인에게 동등한 권리가 부여되지 않는 공연을 거부한다. 이후 그는 흑인 인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는데, 사실은 인종차별에 대한 반감보다는 그의 음악이 차별받고 있다는 반감에 가깝다.
 
“몸에는 장애가 있어도 마음에는 장애를 가져서는 안된다”고 가르치던 그의 어머니의 말처럼, 그는 음악을 통해 자신의 장애를 극복했으며 음악을 통해 누구보다 눈을 부릅뜨고 세상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었던 것이다.
 
영화와 어우러진 40여곡의 주옥같은 히트곡들
 
사실 이 영화는 모든 걸 제쳐두고 전설적 천재 음악인의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곳곳에 삽입된 40여곡의 선율과 가사는 관객들에게 레이의 인생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원래 시력을 잃기 전인 5살 때부터 피아노 연주에 재능을 보이던 레이는 눈이 먼 다음부터 더욱 예민해진 청력과 리듬감을 바탕으로 블루스, 재즈, R&B, 컨츄리 등 장르를 넘나들며 주옥같은 곡을 쏟아낸다.
 

 
영화 줄거리를 따라 배치된 그의 히트곡들은 그의 고난과 역경, 행복과 불행의 과정을 기가 막히게 표현하고 있다.
 
레이가 사랑하는 여인인 델라비아를 만났을 때 그가 부르는 곡은, 신성한 가스펠의 리듬을 이용해 성적 욕망을 노래를 했다는 이유로 ‘신성모독’이라는 논란을 일으켰던 < I've got a woman >이다.
 
또 전통 컨트리 풍에 그만의 정열적 음색으로 새롭게 창조한 곡 < I can't stop loving you >를 부르면서 그는 음악인생의 전환기를 표현한다.
 
그를 사랑하던 악단 코러스 마지가 그에게 가정을 버릴 것을 요구하자 그는 매몰차게 떠나는 남자를 원망하는 내용의 노래 < Hit the road Jack >을 부르며 능청을 떤다. (이 곡은 최근 송혜교가 한 이동통신 광고에서 피겨 스케이팅을 타는 장면 위로 흐르는 노래로도 잘 알려져 있다).
 
흑인 관객을 차별하는 공연을 거부하면서 < Unchain my heart >, 즉 ‘내 마음의 사슬을 풀고’라는 제목의 노래를 그가 힘차게 부르는 장면에서는 전율이 느껴질 정도다.
 
<라밤바>, <사관과 신사>, <백야> 등 특히 음악적 감성이 두르러진 영화를 연출해 왔던 테일러 핵포트 감독은 이 영화에서도 음악과 영상을 조화시키는 특별한 재주를 보여준다. 게다가 15년간의 사전 준비 기간을 거친 이 영화의 음악은 생전의 레이 찰스가 녹음에 직접 참여한 것이기도 하다.
 
특히 제이미 폭스의 연기는 그저 놀랍기만 하다. 그는 레이가 녹음한 곡들에, 혼을 불어넣는 ‘완벽한 립싱크’ 연기로 죽은 레이 찰스를 다시 부활시켰다. 제이미 폭스는 레이처럼 3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대학에서도 피아노를 전공했으며 레이 찰스의 곡을 직접 연주하기도 했다고 한다.
 
세상의 편견과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은 불멸의 거장 레이 찰스, 그를 다시 스크린에서 다시 만나 보자. 25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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