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상 노동운동은 격동과 시련에 부닥치기 마련이지만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는 조직 안팎에 전례없이 큰 충격으로 다가와 있다. 기아자동차 광주공장의 입사비리에 이어 민주노총의 연이은 대의원대회 유회와 폭력사태는 그 대표적인 사례이거니와 그 밖에도 금속연맹과 금융노조의 선거 파행 등 조직내 시행착오와 갈등들이 있기 때문이다.
 
민주노총 스스로 올 5월 ‘세상을 바꾸는 강력한 투쟁’을 통해 노동운동의 전기를 마련하겠다고 천명한 바 있고, 노동운동이 도약의 전환기를 맞고 있다는 기대도 있던 터여서 실망과 우려는 깊고 크다.
 
수구언론들이 쾌재를 부르면서 민주노총을 ‘악의 축’으로 갈갈이 분해하여 매도하는 데서 민주노총의 참담함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고 심지어 한겨레신문까지 몰아붙이는 형국이니 무엇을 더 말하겠는가. <매일노동뉴스>는 2월14일치 표지 설명에서 ‘참담, 자조, 탄식’을 민주노총의 분위기로 표현했지만 당사자들과 노동운동의 발전을 바라는 사람들은 다시는 돌아보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었을 것이다.

허망하게 무너진 노조민주주의

민주노총의 두 차례 대의원대회 경과는 이미 많은 매체들이 소상히 보도한 것처럼 파행을 거듭하였다. 1월 21일 정기대의원대회가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진 장시간 회의 끝에 결국 정족수 미달로 유회된 데 이어 2월1일 임시대의원대회는 ‘폭력적’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아수라장 속에 “회의가 진행되지 못하거나 무산되면 사퇴하겠다”는 이수호 위원장의 절박한 호소조차 물거품으로 만들면서 막을 내리고 말았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참담한 심경으로 사태의 진상을 조사해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히는 한편 2월22일에 다시 대회를 열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대해 대회를 중단시킨 장본인들은 이수호 집행부의 그릇된 결정을 막기 위해 정당한 투쟁을 했을 뿐이라고 강변하고 나섰다. 이들은 민주노총 지도부를 ‘자본가계급의 파견자’로까지 서슴없이 몰아붙였다. 마구 극단으로 치닫는 아슬아슬한 모습들이다. 아마도 그것이 문제 해결의 길이라고 생각한 결과이겠지만 '나는 모두 옳고 너는 모두 틀렸다'면서 사생결단으로 내닫는 방식으로 요구 관철이 가능할 것인지 의아스럽기 그지 없다.

여기에다 일부 논자들의 평론이 가세해 사태를 분간하는데 혼란을 부추긴다. 이번 일은 이수호 집행부와 강경 반대파간의 대립이며 그 본질은 ‘투쟁없이 실리를 추구하는 사회적 교섭파’와 ‘정권과 자본과의 투쟁으로 요구를 쟁취하려는 투쟁파’ 간의 대립이라는 것이고 강경 반대파의 주장은 상당수 조합원들의 뜻을 반영하고 있고 방법상의 문제는 있어도 일정한 타당성을 갖고 있으며 다수 대의원들이 폭력사태를 관망한 것은 그 때문이라는 따위의 분석이 그 예이다. 이것은 민주노총에 대한 충정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이런 기조 위에 제시된 해법이 얼마나 도움이 될는지 쉬 이해되지 않는다.

쟁점에 대한 주장이나 해석은 자유다. 어느 쪽이든 자신의 요구를 내놓고 그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한 수단이 어떤 것이든 모두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며 조직이 정한 일정한 절차에 따라야 한다.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는 최고의 의결기관이며 대회에 오기까지 이런 저런 기관의 심의와 의결을 거쳐 안건이 상정됐다.
 
그런데 그 안건이 자신의 주장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정해진 절차가 아니라 힘으로 파괴하려 한다면 그것은 곧 민주노총을 부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또한 이수호 집행부가 대의원의 토론 요구를 묵살했다는 주장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토론종결과 표결에 찬성한 다수의 대의원들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 자본가계급의 파견자에 세뇌된 어리석은 대중인가 아니면 자기와 같은 지위와 권리를 가진 대의원인가? 이런 점들을 두고 어느 한 대의원이 털어놓았다는 탄식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의미한 바가 크다.

“사회적 대화는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그것은 대의원들이 판단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오늘 사태는 너무 안타깝다. 최고 의결기구인 대의원대회의 절차적 민주주의가 심하게 훼손 당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느냐.”

사리가 이러하고 심각한 우려가 예상되는데도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인가? 여기에는 운동 조건의 변화와 조직 안팎의 상황을 종합해서 판단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혹시 민주노총 스스로 권위와 자존을 지켜오지 않은데서 비롯된 결과는 아닌지 되짚어 볼 일이다. 대의원대회가 참관인들의 야유와 폭언으로 유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민주노총은 그 동안 조직 안팎에서 민주노총을 마구 헤집어도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대의원대회에서의 소란이나 횡포도 자제를 구하거나 가벼운 경고에 그치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그러나 민주노조라는 이름으로 웬만한 횡포는 가벼이 넘겼던 이런 관행이 민주노총의 체계와 질서를 마구 뒤흔드는 데까지 이르고 자기 집단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힘을 행사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극단적인 불감증으로 발전한 것은 아닌가?

자정력 발휘해 노동운동 권위 회복 계기되길

상황은 갈수록 엄중해지고 있다. 지난달 30일, 한나라당 배일도 의원이 “정리해고를 할 때 사용자가 노조와 사전에 협의하도록 하는 현행 근로기준법 조항을 삭제하는 등 정리해고 요건을 완화하는 내용을 뼈대로 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준비하는 중”이라는 보도가 나오는가 하면 산자부는 정리해고의 핵심적 요건 가운데 하나인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라는 조항을 삭제하는 것을 추진중이라고 했다. 거기다 노동부 장관은 비정규직관련법안은 2월 임시국회에서 처리하고 노사관계 로드맵을 올해 안에 마무리할 것임을 거듭 밝히고 나섰다.
 
민주노총을 더 이상 기다릴 수는 없고 ‘국회시계’에 맞추겠다는 것이다. 언제 민주노총 일정에 맞춰 정책시행이 지연된 예가 있는지 잘 알지 못하지만 이토록 극단으로 노동을 몰아붙이고 조급하게 치닫는 이유 역시 이해하기 어렵다. 비정규직법안을 지금 처리하지 않으면 나라가 무너지는지, 대량실업의 고통과 고용불안이 갈수록 높아가는 판에 정리해고 요건을 완화하는 것이 과연 참여정부의 사회통합적 노동정책인지 되묻고 싶지만 노동진영에 위협이 가중되어 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며칠 후면 민주노총 대의원대회가 다시 열린다. 노동상황은 견디기 어려울 만큼 긴박하게 변화하고 있지만 위기는 기회라는 말도 있다. 민주노총이 스스로의 자정능력으로 사안을 마무리하고 오랜 동안 가혹한 탄압과 시련을 이기고 쌓아왔던 민주노조운동의 정통성을 재확인하면서 운동의 권위와 자존을 되살리는 계기로 삼기 바란다. 그리하여 스스로 제시한 '세상을 바꾸는 투쟁'으로 힘있게 나설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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