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기아자동차 노조의 일부 간부들이 계약직 노동자 입사를 둘러싸고 돈을 받은 것으로 밝혀진 사건은 노동계뿐만 아니라 전 국민에게 큰 충격을 준 일이었다. 특히 불리한 처지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채용을 조건으로 노조 간부가 금품을 수수한 이번 사건은 그 동안 도덕성과 민주성을 큰 무기로 해 왔던 한국의 민주노동운동에서 매우 부끄러운 일로서 비록 일부 단위노조에 국한된 일이라 하더라도 민주노총은 구구한 변명을 하기보다는 일단 모든 노동자와 국민들에게 머리 숙여 사과해야 할 일이다.

이번 사건이 단순히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노조의 구조와 행태에 그 중요한 원인이 있다는 점에서도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 
 
한국의 노조는 주로 개별 기업의 정규직으로만 구성돼 있는 경우가 많으며 임금, 근로조건 등 조합원의 경제적 이익추구에 1차적 목표를 두고 있는데 이러한 노조의 구조와 행태가 이번 사건을 일으키는 간접적 원인이 됐던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노조는 이번 일을 그 동안의 운동방식과 노조 구조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성찰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담합에 의한 채용비리, 책임도 함께 져야

그러나 조금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번 기아사태가 전적으로 노조에게만 책임을 돌릴 일은 아니라는 것은 곧바로 알 수 있다. 이번 사태의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면 과거 김선홍 회장 시절부터 전문경영인에 불과한 김 회장이 자신의 경영권과 이권을 유지하려는 욕심에서 노조에게 각종 이권을 주면서 자신의 지지자로 끌어들였던 데서부터 노사간 검은 거래가 시작되었다는 데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다. 또 아직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기 때문에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번 사건의 핵심적 내용인 계약직 노동자의 채용 추천권 일부를 노조에 준 것도 그 이면에는 무언가 노사간 거래가 있지 않았던가 하는 의심을 받고 있다.
 
한편 계약직 노동자의 채용 추천권 가운데 노조 몫인 30%를 제외한 나머지 70%는 회사쪽 간부, 인사담당자나 혹은 정치권, 지역유지, 관계기관 등에 줬다는 증거도 속속 드러나고 있으며 그 가운데 일부는 금품을 수수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즉 이번 사건의 본질은 일부 언론에서 보도하듯이 '노조에 의한 채용비리'가 아니라 '기아자동차 노사 및 외부 유력인사의 담합에 의한 채용비리'로 규정돼야 마땅할 것이며 그 책임도 함께 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번 사건에서 노조의 행태 못지않게 납득할 수 없는 일은 정부와 언론의 태도이다. 정부와 언론은 기아 사태가 일어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노조 공격에 나서고 있다. 현 정부의 고위인사들과 정치인들은 연일 노조를 비판, 비난하고 있으며 보수언론들은 이를 대문짝만하게 보도하고 있다. 이번 기아사태를 계기로 노조의 온갖 '비합리적' 행동들을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가 들춰내고 있으며 민주노동운동 전체를 한꺼번에 싸잡아 비난하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노조 때리기'는 단순히 말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법률과 제도로 연결될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즉 정부와 여당이 비정규직 관련 법안을 노사정 협의 없이 곧바로 입법화하기로 방침을 정한 것을 비롯, 지난해 노동계의 반대로 유보했던 노사관계 로드맵을 노조의 반대가 있더라도 조기에 추진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산업자원부에서는 정리해고제 완화를 추진할 것이라고 하고, 한나라당에서는 노조의 회계 등 내부운영에 대한 정부 개입을 강화하는 내용의 법안개정을 추진하겠다고 한다.
 
그야말로 노조에 대한 전면적 공격이라 아니할 수 없다. 신자유주의적 노동정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80년대 초 영국의 대처 정부에 의해 추진됐던 노조에 대한 전면적 공격정책이 이제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를 목표로 내걸고 있는 참여정부에 의해 공공연히 추진되고 있는 이 사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한국의 민주주의는 쇠퇴하고 있다"

며칠 전 DJ 정부 때 중요한 직책을 맡았던 C교수를 만나 뵙고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이번 기아사태가 거론되었다. 그러자 C교수는 뜻밖의 말을 하였다.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가 쇠퇴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깜짝 놀라 “그래도 참여정부 들어서서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통치행태가 사라지고, 정경유착이 줄어들면서 정치가 투명해지는 등 민주주의의 발전이 있었지 않습니까?”하고 반문하자 C교수는 “분명 참여정부 들어서서 절차적, 외형적 민주주의가 신장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실체적 내용을 이뤄야 할 재벌개혁, 근로자 경영참여 등 산업민주주의, 노사정간 사회적 대화 등은 DJ 정부 때보다 오히려 못한 편이다. 어떤 정부건 그 실질적 민주주의의 발전 정도는 노동에 대한 대접을 보면 알 수 있는데 현재의 상태는 과거보다 오히려 후퇴한 것 같다. 이대로 가다가는 민주주의도 쇠퇴하고 노동도 쇠퇴하는 묘한 상황이 올 것 같다”고 걱정하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과연 C교수다운 날카로운 통찰력이라고 속으로 고개를 끄떡거렸다.

참여정부는 그 출범 초기에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를 내걸고 과거의 노동배제적 국정운영을 개선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후 보수언론과 기득권층이 참여정부를 '친노동적 정권' 혹은 '좌파정권'이라고 공격했고, 일부 대기업노조의 파업이 지속되면서 곧 참여정부는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를 포기했으며 현재는 정부 내의 그 누구도 이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러한 가운데 비정규직 급증, 소득의 양극화 등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하면서 노무현 대통령은 올 신년사에서 다시 모든 계층이 함께 하는 '동반성장'을 향후 국정 운영방향의 기조로 새롭게 내걸었다. 동반성장은 글자 그대로 정부 혼자가 아니라 국민 각계각층 모두의 참여를 통한 성장과 공정한 과실분배를 지향하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러나 정부가 동반성장의 가장 중요한 주체의 하나라고 할 노조를 백안시하고 '이기적 집단'이라고 몰아붙일 때 과연 진정한 의미의 동반성장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노조 쇠퇴의 피해자는 '전 국민'

노조에 대한 공격은 단순히 노조의 쇠퇴로만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효율과 성장지향 일변도의 기업과 관료에 맞서 공정과 통합을 외치는 노조의 세력이 쇠퇴될 때 과연 우리 사회는 어디로 가게 될 것인가? 마침 오늘자 신문에는 'IMF 경제위기 이후 자살자가 급증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오직 경쟁력 향상과 이윤추구만을 바라는 기업과 경제관료의 무분별한 독주 속에서 노동자들은 구조조정과 고용조정에 내몰리고 결국 실업, 빈곤, 가정해체, 질병, 범죄, 자살이라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 속에서 노조의 역할은 단순히 노조원의 이익을 지키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경제개혁, 사회개혁, 정치개혁을 통해 공평한 소득분배와 평등한 사회 구현 및 정치의 민주화를 추진하는 주요 동력을 제공하는 것이 건강한 노조의 또 다른 중요한 기능임을 생각할 때 노조의 쇠퇴는 결코 조직노동자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그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번 기아사태는 노조는 물론이고 기업, 정부, 언론 모두에 커다란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부디 이번 사건이 '노조 때리기'라는 천박한 수준을 벗어나 노, 사, 정 등 경제주체 모두가 그 동안의 잘못된 관행을 반성하고 이를 개혁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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