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한해 동안 진행된 한국의 단체교섭 관행에서 우리는 기업별 조직 중심의 교섭 체제로부터 산업·업종·부문·지역 등을 중심으로 진행된 새로운 교섭 관행의 등장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중간 조직들의 역할이 새롭게 부각되는 배경에는 지난 90년대 동안 축적되어 온 노동조합운동 내부의 의미있는 조직적 변화가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기업 중심의 활동에서 한계에 직면한 기업별 조직들이 점차 산업이나 업종별 조직으로 진화하거나, 공공부문 등에서 전국적 단위의 노동운동이 발전하면서 그 토대를 강화해 온 것으로 보인다.

애초부터 전국 단일 조직으로 출범한 전교조와 전국의 10만 여 명에 달하는 공무원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공무원노조의 등장은 기업별 노조 체제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킬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다. 또 이보다 앞서 금속, 보건의료, 금융 등 부문에서도 이러한 흐름이 강화돼 온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기업 단위 조직을 넘어서려는 움직임은 제조업 부문에서도 느리지만 꾸준히 그 노력을 축적해 오고 있다.

단체교섭 관행에서도 초기업적 조직과 단체교섭 관행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초기업 단위의 조직을 구성하고 관행을 형성하기 위한 노력이 곳곳에서 일시적 후퇴를 보이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초기업 단위의 조직적 관행들은 상당한 성과를 축적해 오고 있다. 지난 2004년 한 해는 기업 단위를 넘어서는 새로운 단체교섭 관행들이 활발히 시도되었던 중요한 한 해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지난해 단체교섭에서 더욱 주목되는 것은 산업 업종별 조직에 대한 사용자들의 저항이 과거처럼 맹목적 반발로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산업·업종·지역 중심의 단체교섭을 통해 기업 단위의 소모적 교섭이 안고 있는 문제를 어느 정도 보정할 수 있다는 합리적 기대가 사용자들이나 그들의 대표조직들을 통해 일정 부분 공감대를 확보한 것 역시 중요한 변화로 인지돼야 한다. 사용자 단체와 조직들은 어느 정도 수준에서 산업별 교섭이나 조직을 수용해야 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상당한 고민에 빠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노동의 산업별 조직 기반이 강화되고, 그들의 권한이 커지고, 요구가 강화되는 것과 더불어 사용자 단체들의 조직적 역량 역시 불가피하게 보강되지 않을 수 없다.

초기업 단위의 다양한 교섭 형태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노사관계에서도 새로운 패턴이 형성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제조업 부문의 대형 노조들이 산업별 조직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으며, 공공부문과 다양한 업종노조 조직들이 여기에 효과적으로 결집된다면 초기업 단위 조직들의 영향력은 계속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새로운 조직과 관행들이 자기 정체성을 잡기 위해서는 노동운동 자체에서 조직 혁신, 비전 설정, 리더십 확립, 조정 능력 강화가 요구되고 있다. 노조운동이 대규모 사업장들의 거대 노조들을 중심으로 주도되는 상황에서 초기업 단위의 강력한 ‘우산 조직’을 형성하는 것은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조직의 개편은 기존 조직이 유지해 오던 권한, 위계, 자원, 기회의 재배분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기득권을 지닌 기업별 노조들과 초기업 조직 간의 갈등은 불가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초기업 단위의 산업·업종별 조직들 역시 노조원들에 대해 산업별 조직이 노동자들의 이익을 실현하는 효과적이고 강력한 수단이라는 것을 입증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노동운동 진영이 초기업 중심의 새로운 조직화 드라이브를 어느 정도 까지 진행시킬 수 있을지는 상당한 부분 미지수로 남아 있지만, 산업별 조직을 향한 노동 진영의 오랜 노력과 투자는 결코 불가능한 목표만은 아니라는 전망을 열어주고 있다.

그러나 초기업 단위의 노사관계가 활성화되고, 관행들이 생산적 결실을 거두기 위해서는 산업별 조직과 기업별 조직 사이의 적절한 역할, 기능, 권한의 배분이 요구된다. 초기업 단위의 중간 조직들이 성장하고, 그들의 권한이 강화되는 경향이 있지만, 한국의 노사관계는 기본적으로 기업 단위 조직들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기업 중심의 노사관계만으로는 현재 한국의 노사가 직면하고 있는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 제도, 정치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풀어가기 위해서는 기업 단위를 넘어서는 초기업 단위의 중간 조직들이 성장하여 더 많은 권한과 자원을 활용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노사관계의 당면한 주요 과제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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