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딸들에게 어머니는 극복할 수 없는 존재다. 모 자동차의 광고처럼 나를 넘어설 수는 있지만, 어머니를 넘어설 수는 없을 것 같은, 끊임없이 애증이 교차되는 묘한 감정을 세상의 모든 딸들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느낄 것이다. 이미 다 성장해버린 보통의 딸들에게 보통의 어머니들의 삶은 대략 칙칙한 과거다. 동시에 내 성장의 순간순간이 어머니의 그 칙칙한 과거와 함께 하고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도 없기 때문에 어머니의 현재는 연민이기도 하다.
 
독일 최고의 여성감독인 헬마 잔더스-브람스 감독의 <독일, 창백한 어머니>는 얼핏 보면 나치독일 흥망의 틈새에서 전쟁의 광풍을 꿋꿋하게 견뎌낸 어머니의 이야기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여성의 희생을 강요하면서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고 추켜세우는 사탕발림과는 다르다. 어머니의 강인함 역시 사랑받기를 원하는 한 사람의 여자였기에 가능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딸의 시선과 목소리를 통해 강인한 어머니의 여성으로서의 비극을 보여 주고 있다.
 
전쟁이 임박한 독일,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단란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꿈의 전부였던 소박한 아가씨 리네(에바 마테스 분)는 어느 날 댄스파티에서 한스(에른스트 야코비 분)를 만난다. 그리스에서 일리아드를 읊는 것이 꿈인 낭만적인 젊은이 한스는 평화를 사랑하고 정치적 이념보다 사랑하는 여자를 중요하게 여겼던 로맨티스트이자 평화주의자. 그들은 단번에 사랑에 빠지고 소박하지만 행복한 신혼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이 터지고 나치당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한스는 제일 먼저 징집되어 서부전선으로 끌려가게 된다. 남편을 전장으로 떠나보내고 홀로 남은 리네. 그녀는 옆집에 폭탄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힘겨운 산고 끝에 딸 안나를 낳는다.
 
연일 계속되는 공습으로 살던 집마저 무너지자 리네는 딸을 데리고 정처 없는 피난길에 오르고 변변한 잠자리조차 없어 폐허가 된 도시와 숲 속을 헤맨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 어린 딸이 보는 앞에서 미군에게 강간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리네는 남편이 돌아오면 모든 것이 좋아지리라는 희망 하나로 고된 삶을 견뎌낸다.
 
드디어 전쟁이 끝나고 남편 한스도 무사히 돌아왔다. 리네는 다시 행복한 가정으로, 사랑받는 아내로 돌아가리라는 꿈에 부푼다. 그러나 현실은 잔인하게 그녀를 배반하고 그녀의 영혼과 얼굴은 일그러져 간다.
 
이 영화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 광기가 어떻게 인간을 지배하고 한 가정을 파멸로 몰아갔는지, 독일 사회에 얼마나 파시즘을 길게 드리웠는지의 문제를 보여 주고 있다.
 
리네는 수려한 외모를 지녔거나, 흥미로운 모험을 하거나, 정치적인 소신으로 권력에 저항했거나 하는 특별한 주인공이 아니다. 전쟁 뒤에 남겨진 그냥 평범한 여자다. 남편이 첫 휴가 때 오면 예쁘게 보일 새 옷을 만들겠다며, 나치의 횡포로 쑥대밭이 된 유태인 상점에 가서 색이 고운 실을 찾아달라고 부탁할 만큼 세상 물정에 어둡다.
 
그러나 한스는 변했다.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위안부와의 관계를 거부할 만큼 순정적이어서 동료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하고, 아내를 닮은 선량한 민간인에게 총구를 들이대는 것을 괴로워하기도 했던 ‘착한 남자’ 한스를 전쟁이 바꿔 놨다.
 


첫 휴가 때부터 리네가 그렇게 정성스럽게 만든 블라우스를 섹스를 하면서 ‘부욱’ 뜯어 버리는 남편은 이제는 나치와 다를 것 없는 냉혈한이 돼 있고 남들을 짓밟고서라도 성공하기를 열망한다.
 
냉혹한 전쟁에서 나약하던 남자는 변해서 생존하는 법을 배웠고, 남자보다 훨씬 전쟁을 쉽게 극복해 가던 여자는 변한 것이 없기 때문에 절망한다.
 
변치 않은 남자와 변치 않은 사랑을 나누길 원하는 여자와, 이미 변해 버린 남자는 더 이상 참혹한 전쟁을 견딜 수 있도록 지탱해주는 애틋한 존재가 아닌 것이다.
 
이 영화를 통해 우리는 ‘강하고 위대한 어머니’라는 수사 속에 가려졌던 한 여자로서의 어머니를 주목하게 된다. 사랑 없는 가정 속에서 비참하게 울부짖는 리네의 절규 속에서 말이다.
 
“상황은 갈수록 나빠졌지만 나는 그럴수록 더 노래를 불렀어요. 아이보다는 나 자신을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살아서 아이와 함께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
 
<독일 창백한 어머니>는 잔더스-브람스 감독의 개인적인 체험을 다룬 영화이다. “이것은 나와 내 어머니의 이야기다”라며 딸 한나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나래이션은 감독이 직접 맡아서 했다.
 

 
영화는 독일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독일>을 낭송하면서 시작되는데, 브레히트의 딸 한나 히옵이 직접 낭송했다. 독일을 어머니로 의인화하면서 전쟁의 광기에 휘말린 조국의 비극을 말하는 브레히트의 시처럼 감독은 어머니와 그녀의 수난을 통해 전후의 비극을 이야기한다.
 
또한 브레히트의 ‘낯설게 하기’ 기법도 다양한 영화적 기법으로 사용해 리네의 비극적인 상황을 정확히 묘사해주고 있다. 폭탄이 투하되는 도시의 전경을 찍은 필름과 폐허가 된 베를린을 찍은 기록영화가, 영화가 진행되는 틈틈이 자연스럽게 삽입된다. 특히, 리네가 길을 물었을 때 기록영화 속의 꼬마가 답을 해주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가슴 아픈 결말을 암시하는 다양한 상징적인 표현을 찾아보는 것도 흥미로운 관람 포인트. 일례로 리네와 한스가 만나는 댄스파티에서 모두 빠른 템포로 춤을 추지만,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음악은 느리고 암울하기만 하다. 또 신혼생활 첫날 리네가 새 커튼을 만지다가 바늘에 손가락을 찔리는 장면 역시 예사롭지 않은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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