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버마(미얀마), 베트남, 태국, 파키스탄…. 초등학교 운동회 때 늘상 보던 만국기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낯선 국기들이 탁자 위에 좌르륵 쏟아진다. “벼 그림이 새겨진 것은 버마구요.” “산 모양은 네팔이에요. 예쁘죠?”
 
25일 오후 서울 홍대 앞의 한 전통찻집. 탁자 위에 놓인 형형색색의 동남아 국기들을 꺼내 보이며, 나라 이름을 대는 문화활동가 박경주(37)씨와 전민성(35) 기자의 표정이 밝다. 3월 개국을 목표로 ‘이주노동자 인터넷방송국(www.migrantsinkorea.net)’을 준비중인 박경주씨와 전민성 기자에게 이들 나라 국기는 자신들의 분신과도 같아 보였다.
 

소외받는 국가, 차별받는 이주노동자의 문제를 다룰 이주노동자 인터넷방송국을 만들기 위해 두 사람이 의기투합한 것은 지난해 여름. “주요 언론에서 소수자 문제를 다루는 것에는 한계가 있죠. 이주노동자를 위한 ‘전문채널’이 생기면 극복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박경주씨가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대구 성서공단에서 이주노동자 FM라디오 방송을 준비하듯, 이제 이주노동자의 목소리를 담을 매체의 필요성은 차고 넘치는 상황이죠. 향후 이들과 컨텐츠 공유나 통합운영 등도 할 수 있으리라고 봐요.”
 
옆에 있던 전민성 기자가 말을 거들었다. “이주노동자가 죽거나 하지 않으면 메인에 올라가질 못하죠. 이주노동자 관련 글을 매체에 기고하면서 늘 부수적으로 다뤄지는 것이 아쉬웠어요.”
 
이주노동자에 대한 이들의 관심과 열정은 확실히 남달랐다. 박경주씨는 유학시절 경험이 이주노동자에 대한 관심을 불러온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제 나라 말과 역사를 배우는 학생일 때는 독일인들도 환영하죠. 하지만 학생비자가 만료된 99년 무렵이 되니까 체류하기가 까다롭고, 태도도 달라지더라구요.” 이후 박씨는 재독한인회 사무국장으로 일하며 재독 광부, 간호사 등을 만나 속사정을 알게 되고 깨우치게 된다.
 
지난 93년부터 독일 유학생활을 시작한 박경주씨는 유학 말미인 99년 이래 사진, 음반, 퍼포먼스 등 다양한 장르를 선보이며 이주노동자 문제에 천착하고 있다. 미국유학 시절 소수민족에 대한 일상적 차별을 느낀 전민성 기자도 귀국 후 다년간 <오마이뉴스>에 이주노동자 관련 기사를 집중 소개했다.
 
박경주씨는 이주노동자의 권익 보호를 넘어 퍼포먼스를 통해 ‘이주노동자를 국회로 보내자!’는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기도 했던 문화활동가. “이주노동자들 음반을 냈을 때처럼 인터넷방송국도 무지막지한 도전이기는 해요. 하지만 음반을 낼 때 민중가요 전문가들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을 해냈잖아요. 할 수 있어요.” 남들은 무모한 도전이라고 생각할지언정, 박씨는 일단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다.
 

전민성 기자도 이런 박씨의 남다른 열정에 끌려 선뜻 무급 ‘노동’을 자처하고 나섰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공장에서 시다로 일했던 70년대 소위 공돌이, 공순이의 모습이 현재 이주노동자들의 모습이에요.”
 
유독물질인 노말헥산에 중독돼 하반신이 마비된 태국의 이주여성노동자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은 도처에 깔려 있다. 이주노동자들은 우리들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는 ‘거울’인 셈이다.
 
“마스크가 없어, 한 여름에도 목도리를 둘둘 감고 일해야 하는 이주노동자들이 곳곳에 널려있어요. 우리는 그런 얘기들을 다룰 거예요.”
 
박경주씨는 자신감에 가득차 있었다. 하지만 인터넷방송국을 만들고 운영하는 데는 만만찮은 인력과 재정이 들어 갈 터. “이주노동자들의 자치공동체와 연계를 하는 등 1년 동안은 실험적인 운영을 할 계획이에요. 인력은 충분하구요. 부족한 재정은 기금, 후원금 등을 통해 마련해 나가야죠.”
 
인터넷방송국 사이트 디자인(닉네임 '양아치'로 불리는 인터넷 관리자가 담당)이 거의 완성되면 외노협과 평등노조 이주지부 등 각 이주단체에 조만간 개국 소식도 알리고 협조도 요청할 계획이다. 이주노동자 단체나 뜻있는 개개인의 후원과 지원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박씨가 구축해 놓은 인적 네트워킹은 풍부한 편이다. 대안언론 기자, 예술가, 이주노동자 등 벌써부터 많은 사람들이 참여를 희망하고 있다고 한다.
 
이란주(‘말해요 찬드라' 저자), 황필규(‘아름다운 재단' 공익변호사), 서선영(평등노조 이주지부), 뚜라(버마행동 한국지부 대표), 아느와르(평등노조 이주지부 지부장), 임선일(샬롬의 집 이주노동자 복지관 간사), 연영석(문화노동자), 석성석(경일대학교 전임강사), 윤수연(대구 성서노동자쉼터 상담실장) 등등.
 
박경주씨의 작품과 열정적인 활동에 매료된 박영균 경희대(회화과) 강사는 ‘만평’에 도전할 계획이다. “일상의 차별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잖아요. 만평을 통해, 인종, 국가 등에 대한 우리들의 뿌리 깊은 차별의식이 변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획일적인 우리나라 문화에 다양성을 제공하는 장을 만들겠다는 박 강사의 다짐은 우직해 보였다.

이주노동자 인터넷방송국은 이주노동자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자발적 기자’로 참여할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다.
 
“노동비자 쟁취만이 아니라 영주권을 확보하고, 이주노동자의 국회의원 진출 필요성까지 얘기하는 것에 놀랐다. 앞으로 방송국 일을 꼭 같이 하고 싶다.” 한 이주노동자의 말처럼 ‘이주노동자 인터넷방송국’은 희망을 가득 안고 성큼성큼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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