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인척이나 친구 등 주변 사람들 중에는 내가 인권운동을 업으로 삼아 살았던 지난 십수년 동안의 세월을 ‘투자’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돈 되는 일도 아닌데 저렇게 매달리는 것은 결국 정치를 하기 위한 효과적인 투자가 아니냐는 것이다. 언론 인터뷰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평생 운동을 하고 싶다고 아무리 되풀이해도 나를 보는 시각은 요지부동이다.

한국사회에서 운동가로 산다는 것은 팍팍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좀 더 행복해지고 싶어서 하는 일이겠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대가인 과로와 가난은 언제나 녹록치 않다. ‘투신’하고 ‘헌신’한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영역이 바로 시민운동일 게다.

그러나 시민운동가를 보는 평범한 시민들의 눈은 투신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 지금 고생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 고생은 뭔가로 나아가기 위한 ‘투자’가 아니냐는 것이다. 당신은 아니라고 하지만, 이름 꽤나 얻은 사람들의 행보는 대체로 그런 것이었다며 솔직히 속내를 드러내라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듣는다.

어디 시민운동을 발판으로 정치적 진출을 도모하는 것 뿐이겠는가. 시민운동이 위기라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온다. 물론 위기라고 해도 도덕성을 생명으로 하기에 보다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 탓이지 정부, 기업 등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도덕적 해이나 부패는 아직 시민운동과는 너무도 먼 거리에 있다. 시민운동은 여전히 국민들에게 신뢰할만한 집단으로 남아 있다. 과잉권력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영향력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이 위기는 아닐지 몰라도, 이대로 가면 곧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는 설득력 있게 들린다.

위기는 아니지만, 위기를 예비하는 신호는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지역을 무시하는 중앙집권화의 가속화, 돈 문제를 둘러싼 이러저러한 잡음들, 건강하지 못한 정권 친화적 움직임들, 시민운동의 경력을 정치적 상업적 진출의 발판으로 삼는 일부 무책임한 운동가들의 행태, 관성적인 연대운동,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을 연상시키는 일부 메이저 단체의 전횡, 감당도 못하고 일만 잔뜩 벌리는 백화점식 사업행태 등이 시민운동의 위기를 예비하는 신호로 읽히고 있다.

오로지 음해만을 목적으로 하는 조중동의 비난이나, 기생충 운운하는 수구정당의 비아냥은 그렇다 쳐도 시민운동 내부에서 이 같은 위기 신호에 대해 적극적인 성찰이 모색되지 않거나, ‘동업자’ 의식을 발휘해 애써 모른 채 하는 것은 정말이지 의아한 일이다.

하긴 사람과 사람의 긴밀한 관계가 강조되는 한국 사회에서 운동을 하자니 괜히 불편해질 것이 뻔한 비판을 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고, 시민운동보다 더 잘못하고 있는 숱한 영역을 비판하고 고치기도 바쁜데 구태여 현미경을 들이대는 식으로 시민운동의 이런 저런 잘못을 따지는 것이 비생산적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 선의의 비판이라고 해도 엄연히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가 엄존하는 상황에서 비판이 수구세력들에게 악용당하게 될 경우에 대한 우려까지 보태지면 동업자끼리의 애써 모른척 하기는 그럴듯하게 여겨지기까지 한다.

아무리 생명을 건지는 약수라도 고이면 썩게 마련이다. 흐르는 물이 썩지 않듯이 시민운동에도 흐름의 원칙이 적용돼야 한다. 조직 운영 전반이 민주적인지, 정치적 편향은 없는지, 아무리 고까운 비난이라도 새겨들을 이야기는 없는지 거듭 살피고,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정확하게 적용해야 한다. 스스로의 성찰이 신통치 않다면 건전한 상호비판이라도 활성화돼야 한다.

애정 어린 비판과 쓴 소리가 우리의 운동을 보다 성숙하게 만들 것이다. 선출되지도 않았으며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고, 법적 근거도 없이 활동하는 우리가 운동의 근거인 도덕성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에게 더 엄격해져야 한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기껏해야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의 티끌에나 딴지를 건다는 비아냥'을 듣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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