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참 희한한 나라다.
 
군대를 안 가려고 수천만원의 뇌물이 오가지만, 군에 말뚝을 박고 별을 달기 위해서 수천만원의 돈을 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권력에 줄을 대기 위해 수백억의 차떼기를 해대는 기업가 정신이 있는가 하면, 그런 차를 운전하려고 한달에 몇 번 집에 들어갈까 말까한데도 수천만원의 카드빚을 내서라도 회사가 떠넘기는 지입차를 울며 겨자먹기로 강제로 떠안는 노동자 신세가 있다.

억대 광고CF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연기자들이 몸을 판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퍼뜨리는 기자들이 있는가 하면, 그런 기자들의 정보를 잘 버무려서 수백억 돈벌이의 기초자료로 써먹는 재벌 기획사들도 있다.

그렇다. 손에 기름때 안 묻히는 좋은 회사에 취직하기 위해 명문대 교수에게 수천만원을 갖다 바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동차공장에서 잔업 특근에 쉴 새 없이 컨베어벨트를 타려고 노조 간부에게 그만한 돈을 갖다 바쳐야 하는 사건이 터진다.

그뿐인가. 조합원들을 위해서 노조 일에 앞장섰다가 수억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당하고 집이고 선산이고 월급이고 몽땅 가압류당하기도 하지만, 그놈의 노조를 탈퇴해 버리면 수천만원의 명퇴금에 억대의 돈을 더 얹어주기도 하는 나라다.

또 있다. 영화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에는 어린 아이들을 위해 24시간 의회연단을 내려오지 않았던 촌뜨기 상원의원 미스터 스미스가 등장하지만, 한국의 유스호스텔에는 그런 고의적인 필리버스터가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장에서 활용된다. 차이가 있다면 막판에 나가떨어진 사람이 스미스씨의 경우처럼 24시간 발언대에 섰던 장본인이 아니라 12시간 동안 이를 지켜보던 민주노총 대의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기아자동차 광주공장의 일만 해도 그렇다. 중간착취가 판치는 간접고용 사내하청을 없애고 최소한 직접고용의 원칙이라도 확립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합의된 것이 ‘생산계약직’ 제도였다. 1년을 초과한 계약직은 자동으로 정규직으로 전환하도록 했다.

이것은 물론 최선의 방법은 아니었지만, 지난 2001년 말 이후 비정규직 사내하청노조와 정규직노조가 일구어 낸 연대투쟁의 값진 성과물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노조 간부를 매수해 지원세력으로 삼으려 했던 사용자와, 그들에게 영혼을 팔아 황금을 얻으려 했던 일부 노조간부는, 노동조합과 떳떳한 다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명예와 정당성까지 함께 더럽히고 말았다. 나아가 노조 역시 의혹을 발견한 뒤에도 당당하지 못했고 실상을 덮는 데 급급했던 것이 사실이다.

경우는 좀 다르지만, 민주노총 대의원들도 자신들이 결정해야 할 문제와 정면으로 대면하지 않았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회적 교섭’에 관한 안건은 토론되지도 않았고 결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60만 조합원이 1박2일의 시간을 부여했지만, 그들은 12시간을 딴전을 피우는데 소모했다. 대의원대회가 열리기 직전 ‘사이버’ 세계의 게시판을 메우던 연서명의 열기와는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토론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는 늘 있었지만 정작 멍석이 깔린 ‘리얼’ 마당에서 토론에 나서는 의지는 보여주지 않았다.

‘침묵’도 의사표현의 한 방법이고 ‘딴청’도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수단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택한 방법에 대해 조합원과 관객들이 돌려줄 ‘평판’까지 지연되지는 않을 것 같다.

물론 언론도 자유로울 수 없으며, 비판의 손가락은 나와 우리에게도 향해져야 할 것이다. 진짜 무서운 것은 공안기관의 음모가 아니라 비판정신의 마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희희낙락해하며 파리떼처럼 달려드는 보수언론들의 사이비 ‘비판정신’도 동시에 철저히 ‘정신비판’ 받아야 한다.

유념할 것은 수천만원의 취업대가는 오히려 그것을 훨씬 더 뛰어넘고도 남을 실업자와 비정규직의 불안과 차별을 재입증하는 역설이며, 민주노총의 지도력을 문제 삼는 정부의 오만한 여유 역시 사회적 교섭을 둘러싼 주체와 여건의 미성숙을 역으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진짜 바로잡아야 할 것은 노조의 인사개입이 아니라 노조를 포함해 지역주민 위에 군림하고 있는 소소한 권력들간의 불공정하고 음험한 유착과 뒷거래 채용관행이며, 민주노총에 대한 비판도 ‘결정 무산’이라는 결과가 아니라 지지부진한 ‘유보 과정’에 맞춰져야 한다. 그래야만 인간다운 삶을 갈망하는 노동자들이 자꾸만 자신의 생명을 내던지는 ‘거꾸로’된 세상도 ‘올바로’ 뒤집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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