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공개한 협정 문서에도 우리 문제는 언급도 안 됐다고 하잖아. 그런데 왜 아직도 일본한테 ‘벌벌’ 떨고 있는 거야. 난 지금 창자도 반은 잘려나가고 뼈도 구멍이 숭숭 나 있어서 살아있는 게 신기하지만, 우리 문제 해결될 때까지는 절대 못 죽어. 억울해서 절대 안죽어.”

19일 오후, 벌써 641번째를 맞은 일본 대사관 앞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사진>에 참석한 이옥선(83) 위안부 할머니는 이렇게 분통을 터뜨렸다.


영하 10도가 넘는 너무나 추운 날씨. 젊은이들도 서 있기조차 힘든 매서운 겨울바람을 견디며 집회를 하고 있는 고령의 위안부 할머니 9명은 더욱더 ‘살아 생전 반드시 짓밟힌 명예와 인권을 회복하고 말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올해로 해방을 맞은 지 60년. 그 긴 세월 동안 몸서리치도록 치욕스러운 기억으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벌써 15년 동안이나 눈물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할머니들은 올해도 역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사이 많은 할머니들이 감당할 수 없는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다가, 혹은 노환에 세상을 뜨셨고 새해 벽두에도 2명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하지만 아직도 126명의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병마와 싸우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하고 있다.

이날 수요 집회에서는 이런 힘겨운 싸움을 해오신 할머니들에게 올해는 반드시 ‘명예회복과 정의’를 안겨드리자는, 그리고 ‘진정한 해방의 기쁨’을 느끼게 해드리자는 ‘일본군 위안부에게 정의를!’ 캠페인 발대식도 함께 진행됐다.

정부는 지난 17일, 한일협정과 관련한 5개의 문서를 공개했다. 그동안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관련 사안은 지난 65년 한일협정의 청구권에는 다뤄지지 않은 사안이다”고 주장해 왔는데, 이번에 공개된 문서에도 역시 이 문제가 포함돼 있지 않았다.


정숙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동대표는 “한일협정 문서를 공개하는 것으로 한국정부가 해야 할 일이 끝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를 시작으로 한국 정부는 더 이상 주저함이 없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대일외교 협상에서 주체적으로 제기하고 피해자에 대한 진상규명과 자료공개, 공식사죄, 법적 배상 등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대협은 또 일본 고이즈미 총리 앞으로 “일본정부는 한일협정에서 제외됐던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정부와 새로운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일본 정부에전달할 예정이다.

정대협은 노무현 대통령 앞으로도 서한을 보내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한일 청구권 협상에서 논의되지 않았던 사안의 해결방안과 관련, 정부 입장을 밝혀 달라”고 요구했다.
노동계와 민주노동당 등도 정신대 문제 해결을 위한 행보에 동참했다.

이날 시위에 참석한 민주노총 이창근 국제부장은 “일본 정부의 당시 강제노동과 강제징집에 대해 양대노총은 일본정부를 ILO에 제소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또 정신대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100만인 국제 서명운동도 함께 동참하고 있는데, 국제적으로 여론으로 불러일으켜 하루라도 빨리 일본 정부의 사죄를 받아 내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한국노총 임채웅 부장도 “한국노총도 1월에 열리는 세계사회포럼에 참가할 예정인데 이 자리에서 한국의 정신대 피해자들에 대한 상황을 국제 노동운동가들에게 널리 알리겠다”고 말했다.

민주노동당의 김혜경 대표는 “민주노동당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등 7만 당원이 같이 결합해 위안부 할머니들의 원한을 풀어 드리겠다”고 밝혔다.

이날 집회는 할머니들이 자신들의 소망이 담긴 대형 퍼즐을 맞추는 행사로 마무리 됐다. 이 퍼즐을 맞추자 ‘명예회복’ ‘인권회복’ ‘투쟁 박물관 건립’ ‘신사참배 중단’ 등의 글씨가 드러났다.
 
올해 돌아가신 김상희(84) 할머니와 김분선(83) 할머니는 모두 “내가 이렇게 죽는 것은 억울하지 않지만 (일본 정부에) 사죄받지 못한 것이 원통하다”고 마지막 말씀을 남겼다고 한다.

매서운 겨울바람을 의지 하나로 버티고 있는 고령의 할머니들이 하나둘 사라져 가고 있는 오늘날, 정부는 과연 어떤 대답을 내놓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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