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영화판에 휘날리는 것은 자랑스런(실은 어처구니 없는) ‘1천만 관객시대’의 깃발만이 아니다. 20세기적 ‘노동 착취’의 깃발 역시 부끄러운 줄 모르고 휘날린다. 열악한 노동환경, 임금체불, 비인격적 대우로 상징되는 ‘방화시대적’ 착취와 억압의 카메라가 여전히 돌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영화를 ‘말하는 것과 만드는 것’은 포스터와 필름의 차이처럼 전혀 다른 이야기다.
 
 
#1 영화명 ‘B’

한국영화 대박시대를 연 특급배우의 출연작.
 
2003년 개봉되었으나 흥행에 실패한 이 영화는 당초 개봉 전에 지급돼야 했던 연출부와 제작부의 임금을 체불한 상태다. 체불 임금은 제작부 5명 합계 1천5백10만 원, 연출부 5명  합계 1천2백80만 원으로 총합 2천7백90만 원.
 
스탭들의 계약서엔 영화제작사가 개봉 전까지 잔금지급을 ‘완료’하기로 돼 있으나, 개봉 후까지 잔금 지급을 미루더니 급기야 영화사가 문을 닫아버린 상태. 영화사는 파산했으나 대표는 현재 새로운 영화사 간부로 재직중이다.
 
대표는 영화사가 파산했으므로 나에게 ‘무한책임’을 묻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입장이다. 그는 ‘나중에라도’ 돈이 생기면 지급할 의사가 있느냐는 추궁에도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위에서 소개한 사례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지난 수십년간 그래왔고,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중’인 영화판의 일상에 불과하다. 이 영화사의 대표는 ‘법적 소송’에 들어가겠다는 압력에도 불구하고, ‘배째라’는 태도다.
 
이미 영화사가 법적 파산을 했고, 영화 제작 여건상 대부분 비정규직이거나, 용역직일 수밖에 없는 스탭들의 신분 탓에 법적 소송에 들어갈 경우, 영화사 대표에게 불리하지만은 않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습적인 임금체불을 저지르는 것은 물론, ‘고의 파산’ 의혹까지 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결국 영화제작 스탭들의 처우개선을 위해 활동중인 ‘한국영화조수연대회의’는 최근 한 영화사를 상대로 3억여 원의 채권가압류 신청을 서울중앙지법에 냈다. ‘한솥밥을 먹는 식구끼리’ 법적 대응으로까지 치달아야 하는 현실이 서글프지만, 이들은 이번 사안이 영화계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레이버투데이>는 한국영화조수연대회의가 파악한 몇 가지 사례를 입수해 소개한다. 사안이 민감한 만큼, 영화 제목과 관계자 이름은 이니셜로 처리했다.
 
#2 영화명 'S'
 
1990년대 여러 편의 히트작을 만든 C씨가 대표인 영화사가 제작중인 영화.
 
2002년 봄부터 촬영이 시작됐으나 그해 겨울 영화사 사정으로 촬영이 중단됐다. 그 이후 연출부 5명의 임금, 2천여만 원이 체불된 상태. 계속되는 제작파행에도 대표는 “반드시 촬영을 재개할 것”이라고 호언해 일부 스탭들은 꼼짝없이 발이 묶여 사실상 ‘실업자’ 신세로 대기해야 했다.
 
지난해 다시 제작을 재개했으나 영화사측은 약속과 달리 잔금은 촬영종료 이후에나 지급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더욱이 남은 분량의 촬영에 ‘고용승계’를 하지 않겠다고 말해 스탭들이 발끈하자, “돈 안 받고도 일할 사람 많다”며 연출부를 교체해버렸다. 
 
조수연대회의측은 위 영화의 경우 “영화 제작사가 스탭들을 어떤 시각으로 보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한다. 이들은 제작사 사정으로 촬영이 중단됐을 경우 스탭들은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일을 ‘그만 둬야’하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한다.
 
더욱이 ‘프리프러덕션’이라 불리는 사전준비 단계 ‘5개월 동안’ 스탭들에게 아무런 임금도 지급하지 않는 것이 영화계의 ‘관행’이다. 결국 영화 한 편이 ‘엎어질 경우’ 단순히 임금체불 문제가 발생하는 수위를 넘어 영화 노동자의 생계마저 엎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영화제작 공정상 1년에 2편 이상 참여하는 것이 불가능한 스탭들 입장에선, 3년간 제작이 중단되면 3년간 ‘백수’ 신세를 면할 길이 없음을 의미한다.
 
연대회의측은 “통상 편당 3백만 원 정도에 계약하는 연출부 막내스탭이 이런 영화에 참여했을 경우, 그가 3년간 얻은 소득은 처음에 받은 계약금 1백50만 원에 불과하게 된다”며 “문제를 제기하고 싶어도 손바닥만한 영화판에서 한번 찍히면 끝이기 때문에 아무 소리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3 영화명 ‘N’
 
2003년 상당한 흥행작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개봉 후 실패한 영화. 촬영이 종료된 이후 투자자의 변심으로 막판 자금이 모자르자, 16명의 스탭들에게 지급해야 할 잔금을 제작비로 사용했다. 이 과정에서 영화감독 C모씨는 스탭들에게 잔금을 자신에게 위임한다는 위임장을 받았으나, 하위 스탭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개봉 후 영화가 실패하자, 영화사 대표는 잔금을 감독에게 위임했으므로 자신은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스탭 중 한명이 소액재판을 청구한 결과 위임장은 무효이고, 남은 잔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나왔으나 영화사는 이미 재산이 없는 상태.
 
이 경우는 한국 영화판의 투자시스템이 얼마나 ‘허술’한가 보여주는 사례다. 제작 초기 구두로만 투자약속을 받은 뒤, 무조건 촬영을 강행하다 중간에 투자자의 ‘변심’으로 약속된 투자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그 부담이 고스란히 제작진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연대회의측은 “힘들 때는 ‘우리는 한 가족’이라며 스탭들에게 리스크를 분담하라고 강요하지만, 영화가 잘 됐을 경우엔 약속한 잔금 외엔 적절한 인센티브가 없는 게 현실”이라며 영화사의 무책임함을 질타했다. 
 
 
1천개가 넘는 영화사들이 ‘난립’하는 가운데에는 부도덕한 곳들도 적지 않다. 영화가 ‘돈이 된다는’ 욕심에 구멍가게 차리듯 제작사를 차리곤, 아니다 싶으면 곧장 정리해버리는 것이다. 관계자들은, 이 과정에서 임금체불-책임회피-고의파산으로 이어지는 악덕영화사의 수습책이 이미 하나의 법칙까지 됐다고 이야기한다.  
 
이같은 악질적 관행은, 드물지만 ‘흥행영화’에까지 적용된다. 유명제작사 T영화사가 만든 영화 ‘K’는 지난해 개봉해 평단과 관객의 좋은 평가를 받으며 상당한 흥행실적을 기록했다.
 
하지만, 제작사는 촬영이 끝난 후에도 자금사정을 내세우며 잔금지급을 미뤘고 결국 스탭들 대부분의 임금이 7개월 가량 체불되고 말았다. 다만, 이 영화사측의 경우 체불임금 해결을 위해 전향적으로 나서겠다는 다짐을 받았다고 한다. 
 
영화계의 노동착취 현실은 이미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영화사들의 노동착취 사례 역시 이밖에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위 사례들은 연대회의측에 접수된 22건의 고발내용 중 일부분에 불과하다.
 
이름을 들으면 누구나 알 만한 유명감독이 제작사 대표이자 감독인 영화 ‘H’는 2년이 넘는 제작기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탭 대부분의 임금을 체불하고 있다. 이들은 연대회의측이 임금지급을 요구하자 “당신들은 참견하지 말고, 누가 고발했는지나 밝히라”고 요구했다. 배신자를 찾아내 ‘응징’하겠다는 이야기다.
 
기가 막힌 것은 이 영화의 계약서엔 스탭들의 계약기간이 ‘영화 상영시까지’라고 명시됐다는 점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개봉이 늦어지거나, 아예 영화가 개봉되지 못할 경우 영화사측에서 잔금지급을 한없이 미룰 수 있는 핑계가 생기는 셈이다.
 
연대회의측은 “심지어 분쟁발생시 협의는 가능하되, 고소·고발은 할 수 없다는 독소조항까지 넣는 경우도 있다”고 항변한다. 정말이지 ‘노비문서’가 아닐 수 없다.
 
1년에 만들어지는 한국영화는 보통 많아야 50편 정도다. 한편당 현장 인력이 50여명 정도 기용된다고 따지면, 1년에 2천5백여 명에게 저임금이나마 ‘일자리’가 돌아가는 셈이다. 하지만, 전국의 33개 영화학과에서 매년 배출하는 영화인력은 이를 훨씬 웃돈다.
 
조수연대회의측 관계자는 “결국 구조적으로 아주 값싼 파견과 비정규노동이 판칠 수밖에 없는 조건”이라면서도 이렇게 항변한다. 그의 말은 ‘1천만 영화관객 시대’란 말이 무색한 한국영화판에 대한 준엄한 경고다.    
 
“내가 처음에 영화판에 발 디뎠던 94년도에 영화 한편 찍으면 50만 원 받았다. 그런데 10년이 넘은 지금 고작 2백 만원에 불과하다. 웃기는 건 영화제작사측 사람들의 말이다. 이들은 영화판이 옛날에 비해 아주 좋아졌다고 한다. 자기들은 평균 연봉 3~4천 씩 받으면서 1년에 2-3백씩 버는 후배들더러 세상 좋아졌으니 참으라고 하니까 어이가 없다. 물론 악덕영화사보다 좋은 영화사들이 더 많지만, 이런 일들이 계속되면 우리도 노동조합으로 갈 수밖에 없다. 교섭을 통해 임금을 쟁취하겠다는 것이다. 10년을 일해도 생계가 불안정한 한국영화판에 도대체 무슨 미래가 있는가.”
 

사진제공 : 월간 <말>(사진은 특정 사실과 관계가 없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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