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쯤 됐나 보다. 이철순 대표를 처음 만난 때가. 대학교 졸업반 마지막 학기.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는 빈 시간이 많아지자 기자는 여성노동자회가 뭐하는 곳인 줄도 잘 모르고 그저 자원활동을 하고 싶어 찾아갔다.
 
여성 노동자로서 사회에 첫 발을 내딛기에 앞서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전부였다. 사회생활 경험이 전무 했던 그 때, 전국 8개 여성노동자회의 협의체인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한여노협)라는 곳에서 중년의 노동계 인사를 만나는 것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거리감이라는 건 느껴지지 않고 외려 동등한 위치에서 ‘계급장 떼고’ 말해도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렇지만 그건 그저 편하다는 느낌과는 조금 다른, 어떤 긴장감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한여노협의 대표로서 여성노동자들의 맡언니로 9년이란 세월 동안 그 자리에 서 있던 이철순 대표(52). 그가 오는 15일 총회를 거쳐 차기 주자로 예정돼 있는 최상림 전국여성노조 위원장에게 바통을 넘겨주게 됐다.
 
지난 95년 당시 대표직을 맡고 있던 이영순씨가 구로구에서 서울시의원에 당선되면서 대표직을 사임하자, 이철순 대표는 뒤이어 한여노협의 대표를 맡았었다.
 
“이영순씨의 잔여 임기 1년까지 내가 했으니 만 9년이 맞아요. 줄이면 안돼. 왜냐면 내 인생은 여성노동자회를 떠나서는 앞으로도 생각 할 수가 없거든요.”
 
87년 민주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울을 기점으로 수출자유지역과 공단, 저소득층 지역을 중심으로 여성노동자들도 지역여성노동자회를 결성했고 뒤이어 90년대에는 마산·창원, 광주, 인천, 부천, 부산 등에도 속속 지역 여성노동자회가 설립됐다. 이들 여성노동자회는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고 공동사업 수행능력과 정책대응력을 높이기 위해 지난 92년 7월 전국적인 지역여성노동자회의 협의체인 한여노협을 창립하게 된다. 이철순 대표는 창립 후 약 2년 정도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고스란히 한여노협의 역사와 함께 해 온 것이다.
 
묻혀버린 그 ‘찬란한’ 여성노동운동 역사
 
18살, 야간고등학교를 다닐 때 전태일 열사의 분신을 목격한 친구로부터 그 소식을 전해 듣고 힘없는 노동자를 위해 살기로 결심했다는 이철순 대표는 73년 화양동 고무공장인 대동화학에 입사하면서부터 본격적인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이후 가톨릭노동사목(JOC)의 조직책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YH, 태광산업, 동일방직 등 여성노동자들의 노조 활동과 야학을 지원하는 일을 10년 동안 했다.
 
그리고 88년 아시아지역 여성노동자 단체들을 지원하고 연계하는 국제단체인 CAW(Commitee for Asia Women, 아시아여성위원회)에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기 위해 홀연히 홍콩행 비행기를 탔다. 당시 소위 ‘운동권’ 여성 활동가가 국제단체 실무자로 외국에서 일을 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CAW 활동을 하면도 한국 여성노동자들의 상황과 여성노동자회 활동을 국제적으로 알려내는 일을 꾸준히 해왔던 이철순 대표는 6년간의 해외 활동을 마치고 한여노협의 대표직을 ‘덜컥’ 맡은 까닭을 이렇게 설명한다.
 
“내가 함께 했던 70년대 여성노동자운동은 노동운동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차고 엄청난 운동이었다. 그런데 80년대 후반 대공장 남성중심의 노동운동이 주류를 이루면서 당시 여성노동자운동은 평가절하된 채 묻혀버리고 ‘과거가 없는 운동’이 돼 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를 비롯해 당시 활동가들은 점점 늙어가는 것 같았다. 뭔가 사명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우리들이 살아 있을 때 이 운동에 대한 자료와 증언을 정리해 역사화해야겠다는 그런 사명감 말이다.”
 
그 사명감으로 5~6년 동안 여성노동운동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고증을 거쳐 온 한여노협은 지난 2001년 관련 학자들과 <한국여성노동자운동사>를 출간한 데 이어 지난해에는 이 책에서 다 다루지 못한 이야기를 엮어 <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를 발간하기도 했다.
 
“물론 그 일도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았다. 이미 30년도 더 지난 일이다 보니, 당사자들도 감정이 무뎌지면서 굳이 들춰내는 것을 꺼리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힘든 시기에 노동운동 시발점을 만들었던 이들 여성노동자의 인간적인 이야기는 그 자체로 훌륭한 역사였다.”
 
모두가 궁기를 벗지 못하던 어려운 시절, 줄줄이 달린 가족들의 부양을 위해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밤낮 없이 일을 했던 70년대 여성노동자들. 오로지 섬세한 손기술만을 아낌없이 발휘할 것을 강요하는 섬유·고무 공장 등에서 노예처럼 일하던 그들은 목숨을 위협하는 온갖 협박 속에서도 노동조합 운동의 불씨를 당겼다. 그러나 아직도 자신들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냈는지에 대해서는 ‘사실대로 말하는 것’조차 서툴다는 것이다.
 

 
전국여성노조, ‘대표운동’의 종지부를 찍다
 
여성노동자들의 역사만 묻힌 것이 아니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자들 권익은 점점 향상된 것처럼 여겨졌지만, 노조가 없는 중소영세 업체 등에서 대부분 비정규직으로 근무하고 있는 여성노동자들의 경우는 노동운동으로부터도 별반 보호받고 있지 못했다.
 
“97년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대부분 여성들이 가장 먼저 실업자가 됐다. 차별은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실업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여성노동자 운동은 완전히 망할 것 같은 위기감마저 들었다. 온 나라가 ‘위기’로 움츠리고 있을 때 극한의 빈곤으로 내몰리고 있는 여성노동자들을 사회안전망으로 보호해야 할 필요가 강하게 대두됐다. 이를테면 여성실업자들에 대한 기초생활 보장과 재취업훈련, 그리고 결식아동 문제 해결, 여성가장 지원 등이다.”
 
한여노협은 98년부터 전국의 지역 여성노동자회에 부설기관인 여성실업대책본부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실업 여성들을 지원했다. 또한 정부 지원정책을 요구, 실업 여성가장에 대한 문제를 사회적으로 부각시켰다.

“하지만 여성들은 실업문제가 해결돼 취직이 된다고 해도 비정규직으로 실업과 취업을 반복하기 때문에 또다른 대책이 필요했다. 법을 만들고 정책을 만들어도 현장 여성노동자들이 직접 수혜를 받도록 하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이들이 처해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는 위해서는 스스로 노조를 만들어서 요구해야 하는데 기존의 기업별노조 틀에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당시만 해도 양대노총이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을 조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같았다. 여성노동자들의 이해를 기반으로, 여성친화적인 조직방식으로 노조를 만드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설립을 추진한 것이 전국여성노조다.”
 
전국여성노조는 이처럼 각 지역 여성노동자회의 회원들을 기반으로 지난 1999년 400명의 조합원으로 발족했다. 지금은 골프장 경기도우미, 영양사, 도서관 사서 등 기존에는 조직화의 사각지대에 있던 여성 비정규직 직종을 포괄하면서 5천여명의 조합원 규모로 성장했다.
 
“독립적인 여성노조를 만들겠다고 하니까 당시는 여성계가 들썩들썩 했다. 꼭 노조로 가야하느냐는 선배 여성운동가들의 반대도 많았다. 노동계 역시도 성으로 노동자들의 조직형태를 가르는 것에 대해 드러내놓고 그러진 않았지만, 불만이 많았다. 그러나 70%가 넘는 현장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끌어내지 않고는 여성 노동운동은 살 길이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몇몇 운동가들의 ‘대표운동’으로 전락하고 마는 거다. 그런 우려 속에서 절박함으로 출발한 전국여성노조는 이제 비정규직 여성의 조직화와 노조 운영 등과 관련 하나의 모델을 제시하는 혁혁한 공을 세워냈다고 본다.”
 
이철순 대표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또 하나의 과제를 던져 본다.
 
현실은 가사노동의 사회화를 필요로 한다
 
“전국여성노조를 통해 이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조직화는 한 획을 그었다고 본다. 그런데 아직도 노조 형태로 담을 수 없는 ‘비공식’ 분야의 노동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가사서비스노동이다. 그런데 여기 종사하는 노동자들이야말로 40~50대의 가장 열악한 여성들이다. 다른 데 갈 곳도 없다. 지금은 이 분야를 ‘사회적 기업’ 모델인 협동조합 형태로 전국조직화 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 협회는 단순히 구인구직을 연계를 하는 목적이 아니라 가사서비스 분야를 사회적 일자리로 만들고 전문 영역화하는 운동을 할 것이다.”
 
가사서비스를 사회적 일자리로 만든다? 흔히 ‘파출부’나 ‘가정부’로 불리고 있는 이 영역을 전문화하는 것은 모든 직업이 전문화되는 추세에 맞춰 그렇다 치고, 꼭 사회적 일자리로까지 만들어야 하는 것일까?
 
“가사서비스를 누가 가장 필요로 하는가? 바로 맞벌이 부부들이다. 맞벌이 부부들이 서로 분담한다고 해도 가사노동에 찌들리면 그들이 제공하고 있는 노동력은 질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모든 사람이 필요로 하지만 비용 때문에 감수해야 했던 ‘돌봄’노동을 사회화하면 맞벌이 여성뿐 아니라 가족 전체의 노동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영역을 전문화하고 공익화함으로써 중년여성의 일자리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사실 정말 집안일을 도와줄 일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보통 TV에서 나오는 것처럼 부잣집 마나님들이 아니라 직장과 가사 일에 시달리는 보통의 맞벌이 부부들일 게다. 현재 7개 지역 지부를 가지고 있는 한여노협의 가사서비스협회는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사용료의 절반 정도를 세금에서 공제받는 형태를 정부에 요구할 예정이다.
 
“차별시정위원회에서도 이런 제안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벨기에는 이미 이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협동조합 설립도 추진하고, 이런 정책도 내놓는 한여노협에 정부는 감사해야 한다.”
 
자랑하듯 말하며 웃는 이 대표의 눈이 아이처럼 해맑다. 그는 이제 며칠 남지 않은 임기를 마치면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

여성 정치세력화? 이미 여노회는 정치세력이다
 
수많은 여성단체들의 수장들이 제도권 정당의 ‘콜’을 받고 의회 진출을 하는가 하면 정부 각료가 됐다. 그러나 유독 한여노협은 물론, 각 지역 여성노동자회들은 지난 총선 등에서 제도권 정당뿐 아니라 민주노동당 등 진보정당에까지 지지의사를 표현하는 일조차 없었다. 초대 이영순 대표가 95년 민주당 시의원으로 출마해 당선되기는 했지만 여성노동자회는 마치 지난 2004년 총선의 무풍지대에 있는 듯 보였다. 여기에는 이철순 대표의 소신이 강하게 작용했다.
 
“대표가 그러니까 그렇게 보였겠지. 난 정치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정당운동은 내가 할 영역이 아니라고 본다. 그렇지만 지역 여노의 자체적 결정이나 개인적인 정치활동은 모두 자율적으로 보장됐다. 조직적으로 막은 것이 아니니까. 그렇지만 단체운동에 정당의 이해가 작용하면 그 의미가 퇴색된다고 난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정당의 이익을 생각하다 보면 순수하게 여성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철순 대표는 이미 여성노동자회는 ‘정치적으로 세력화됐다’고 말하기도 한다.
 
“정당정치를 통해서만 정치세력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여성노동자회는 정치세력화돼있다. 어느 정치인이든 여성노동 관련 정책을 세울 때는 여노회의 의견을 경청하고 반영하지 않을 수 없다. 참여시키지 않으면 여노회가 가만히 있지 않는다. 그것이 정치고, 세력화다. 꼭 국회에 가서 정치를 해야 하나? 국회를 움직이는 운동권 세력이 되면 된다. 물론 정당을 통해서 국회에 들어간 여성운동가들을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의 역할이 있는 것이고 훌륭하게 분담해서 수행하면 된다. 한쪽만 발달해서는 안 되고 같이 가야 한다. 정치는 민(民)이 살아 있어야 한다. 정당만 있고 현장 운동세력이 죽으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데 여노회는 힘을 가지고 있다.”
 
정당정치나 관료직에는 일찌감치 마음이 떠나서인지 이제는 별로 유혹도 못 느낀다는 그는 앞으로도 여성노동자들의 주변에 있겠다고 말한다.
 
“나는 노동운동과 개인을 분리시켜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한여노협에 들어올 때부터 마지막 인생은 여성노동운동으로 마감하겠다고 결심했다. 앞으로 몇 달간 휴식을 취한 후에는 여성노동운동 활동가를 양성하는 한편 비공식 여성노동자들의 조직화를 돕는 측면지원을 할 것이다. 그러니까 아주 떠나는 것도 아니어서 떠나는 기분도 담담하다. 후배들에게 내 자리를 물려주고 커가는 것을 보는 것도 50살을 넘긴 나이에는 얼마난 즐거운 일인 줄 모른다.”


 
사진 = 박여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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