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동설한에 어디로 가란 말이냐.” 세입자들은 눈물로 하소연한다. 그러나 법에는 눈물이 없는 법.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전국 곳곳의 재개발 현장에서는 해마다 철거가 되풀이된다.
 
가옥주들이야 두둑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지만 집도 절도 없는 세입자들은 딱한 처지에 빠지고야 만다. 세입자들이 받을 수 있는 보상이라고는 고작 몇 백만 원의 이주보상비나 임대주택 입주권 가운데 하나를 택일하는 것. 
 
그러나 몇 백 만원의 이주보상비로는 인근에 전셋집 구해서 들어가기는 ‘하늘의 별따기’ 수준이다. 개발에 따른 주변 시세 인상으로 살던 곳에서의 전세, 월세 보증금으로는 방 얻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또 몇 년 뒤 임대주택을 들어갈 자격이 된다 하더라도 문제다. 1천만원 이상의 임대보증금과 한달 20여만원 이상의 임대료, 관리비 등을 감당하기에 서민들의 살림살이는 곤궁함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에 따라 전국 곳곳의 철거지역에서 세입자들의 공통된 제일의 요구사항은 ‘가수용 단지’로 모아진다. 재개발기간 동안 임시로 거처할 수 있는 주거시설을 마련해 달라는 것. 그러나 현행법규 어디에도 세입자를 위한 ‘가수용 시설’ 설치 의무조항은 없다. ‘도시및주거환경정비법’에 ‘임시주거시설’ 설치 조항이 있기는 하지만 ‘주택의 소유자’에 한정될 뿐이다.
 
우는 아이 떡 주듯 ‘가수용 단지’ 합의
 
그러나 법에 보장된 것은 아니지만 세입자들을 위한 ‘가수용시설’이 마련된 곳도 적지 않다. 서울 봉천3동(3세대), 수원시 권선구(23세대), 경기도 고양시 풍동지역(11세대)이 대표적이다. 전국철거민연합(전철연)에 따르면 재개발조합이나 주공 등 시행주체들과 협상을 벌여 공증까지 거친 곳은 전국 50여 곳에 달한다.
 
지난해 12월 17일 타결된 풍동지역의 경우, 근 3년여 주공과의 벼랑 끝 투쟁을 통해 얻어낸 눈물겨운 과실이었다. 1월 17일 입주할 예정인 11세대 세입자들은 살던 지역 인근의 14평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살게 된다. 이후 세입자들은 2006년 이후 재개발이 끝나면 국민임대아파트로 입주하게 된다.
 
풍동철거민대책위의 성 아무개 주민은 “주민 11세대 가운데 9세대가 영세민으로 ‘기초생활보장수급자’였기 때문에 영구임대아파트로 들어가기가 무리가 없었다”며 “약속불이행이 다반사라 마지막까지 경계하고 있다. 다른 재개발 지역에서도 이런 사례가 확대될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늦게나마 ‘가수용 단지’ 합의가 이뤄진 것은 다행한 일이지만 300여 세대 가운데 11세대만이 혜택을 본 셈. 사정은 다른 지역도 비슷했다. ‘가수용 단지’ 합의는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주는’ 식으로 끝까지 투쟁해 남은 10여 세대 안팎의 소수만이 남았을 때에나 그나마 가능한 일이다. 재개발조합이나 주공 등 시행사들이 공기차질과 사회문제 등으로 더 확산되는 것을 우려해 마지못해 봉합 차원에서 허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수용 단지’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삶은 어떨까. 지난 97년부터 조립식 주택에서 살고 있다는 수원시 권선구 권선동 19-1번지를 찾았다. 조립식 임시거처는 흡사 ‘수용소’나 군대 내무반 숙소처럼 보였다.
 
14평(4인 가족), 12평짜리 임시숙소에 살면서도 주민들은 “불편한 걸 모르고 살고 있다”고 말한다. 불편함에 이골이 난 듯한 모습들이었다.
 

“나간 사람들, 아파트 관리비, 임대료 못 내 쩔쩔매요”
 
주민들은 자신들이 사는 거처를 ‘둥지마을’로 부르고 있었다. 11일 저녁 7시. 가로등 하나 없어 어둠이 일찍 찾아온 마을. “건물이 7~8년 됐어도 쓸만해요. 월세 생활보다는 낫잖아요.” 찬바람을 이기기에는 허술해만 보이는 집인데도 주민들은 만족해했다.
 
바로 옆 고급주택가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주민들 간에 위화감은 없을까. “얘들이 언제 이사가냐. 우린 왜 안가냐고 보채기도 하죠.” 전철연 산하 권선3지구 홍경희 철대위원장은 왜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지 아이들에게 이해를 시킨다고 했다.
 
홍 위원장은 “공원부지인 이 주거 터가 조만간 또 철거될 가능성이 높다”며 “현재 3천만원 무이자 대출(입주시 상환)이나 국민임대아파트 가운데 택일해 나가라지만 남자는 공사판 막일이 주고, 여자들은 청소, 식당, 파출일 등이 대부분인 주민들이 임대아파트에서 살 형편은 못된다”고 잘라 말했다.
 
현재 권선지역 주민들은 23세대 가운데 15세대만 남았다. 한 집, 두 집 이곳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이주한 세입자들은 잘 살고 있을까. “아파트 관리비, 임대료 못 내서 쩔쩔매죠. 다들 영세민들이니까요.” 해마다 5%씩 오르는 임대료와 보증금, 관리비를 현실화하라는 주공임대아파트 입주민들의 주장이 일고 있는 저간의 사정은 이를 잘 설명해준다.
<레이버투데이 12월 24일자 “누구하나 옥상에서 떨어져야 정신차리지” 기사 참조>
 
주민 김경숙(45)씨가 말을 이어갔다. “화성, 용인의 임대아파트에 가서 살라는 건 생활권을 무시하는 일방적 처사에요. 직장도 문제거니와 아이들이 전학하면서 생기는 부작용은 만만치 않아요.”
 
저녁 8시 무렵, 전철연의 간부들이 회의를 하러 이곳을 찾았다. 전철연의 장석원 연사국장에게 ‘가수용 단지’ 합의가 왜 그렇게 어려운지를 물었다. “건설사들은 가수용시설 비용이 1억여원 밖에 들지 않더라도, 용역을 동원해 철거하는 데 4~5억여원을 쓰는 것을 선호합니다. 다른 재개발지역에서 선례가 되면 안된다는 판단이겠죠.”
 
전철연 남경남 의장은 재개발 정책 일반에 대해 문제를 지적했다. “쾌적한 주거환경을 꾀한다는 재개발이 이윤추구의 장으로 되고 있고, 있는 사람 위주의 개발정책이에요. 한마디로 서민 죽이는 정책이에요.” 의장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땅값, 집값 인상을 부채질하는 재개발이 되지 않으려면 ‘순환식 개발’이 되어야 합니다. 또 대부분이 가난한 노동자인 서민들이 살 수 있는 임대주택의 현실화가 필요해요.”
 
그런데 왜 ‘가수용 단지’ 법제도 개선 투쟁은 이뤄지지 않는 걸까. 남 의장은 “가수용 단지에 합의한 50여 공증 서류를 바탕으로 세입자를 위한 ‘가수용 단지’ 의무화 등 법제도 개선 투쟁을 해야 하는데, 현재 여력이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가수용 단지’ 요구는 구실일 뿐?
 
상도5동, 인천 주안주공, 용산5가동, 판교 등 전국 곳곳의 세입자들이 오매불망 요구하고 있는 ‘가수용 단지’. 경기도 성남시 판교지역의 경우, 현재 500~600여 세대가 ‘가수용 단지’ 요구를 핵심으로 내걸고 있다.
 
“가수용 단지는 세입자 숫자가 줄어들면 몰라도, 현재는 얘기도 못 붙일 형편이다. 주공측은 주민들의 요구에 일체 언급이 없다.” 전국철거민협의회(전철협) 산하 판교택지개발주민대책본부의 이춘재 위원장은 답답함을 토로했다.
 


사정은 다른 곳도 비슷했다. 주안주공아파트 세입자들은 연말 강제철거로 인해 아파트 옥상으로 쫓겨났고, 철거로 집을 잃은 용산5가동의 세입자들은 용산구청 앞에서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우리 집 어디 갔어.” 세밑을 울린 철거민 김옥순 할머니 손주들의 울부짖음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애틋한 사연을 접한 시민들의 성금이 줄을 이은 곳인 서울 용산동5가.
 
“보증금 200만원에 월 30만원, 보증금 100만원에 월 10만원 등으로 살았어요.”
“몇 백 만원 이주비 받아서 어디 가서 살겠어요. 또 임대주택은 들어갈 보증금도, 살 형편도 못돼요. 그래서 ‘가수용 단지’를 만들어 달라는 거예요.”
 
용산동5가 빈민해방철거민연합(빈철연) 소속 세입자들은 용산구청 앞에서 지난해 12월 29일부터 텐트를 치고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6일 아침, 세입자들은 추운날씨에 일주일 넘게 텐트에서 농성을 하느라 얼굴과 입술이 튼 채로 꾀죄죄한 몰골이었다.
 
주민 이덕기(41)씨는 용산구청과 재개발조합이 주민들과 대화나 중재 노력도 없이 작당을 벌이고 있다며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명도집행’은 물건만 들어내는 것이지, 건물철거하란 게 아니잖아요. 29일 벌어진 철거는 강제철거 입니다. 이 엄동설한에 철거를 하면 우리는 어디서 살란 말입니까.”
 
“재개발 승인나자마자 임대아파트 준다고 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죠. 그런데 구청은 지난해 11월이 되어서야 임대아파트 입주가 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이미 늦은 거죠. 주민들은 1년 반 동안 생업을 포기하며 철거반대에 매달리느라 적금을 해지하는 등 이제 돈이 바닥이에요. 냄비하나 없는 처지에 어디 갈 수가 있나요.”
 
빈철연 소속 세입자대책위의 심순자 위원장은 “구청측이 구민들 돕기는커녕 4번씩이나 강제철거를 하고, 중재할 노력도 대화도 일절 없다”며 분개했다.
 
이른 아침 8시 30분경 취재를 마치고 돌아서는 순간 구청 직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서 나오셨어요.” “명함 하나 주시죠.” 철거민들은 “명함 주지 말라”며 말린다. 행여나 구청의 잘못된 정보와 회유로 자신(철거민)들의 보도가 잘못되기를 꺼렸기 때문이리라.
 
용산구청측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서울신문의 3회에 걸친 용산5가동 철거민 보도에 민감해져 있었다. 용산구청 도시정비과의 이재문 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세입자 대책은 주거이전비나 임대주택 입주 가운데 택일하는 것인데, 지금 세입자들은 ‘들어갈 돈 없다’ ‘이전비를 더 달라’고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다.”
 
그는 할 말이 많은 듯 보였다. “세입자들의 ‘가수용 단지’ 요구는 구실일 뿐이에요. 가옥주가 아닌 세입자에게는 법적인 근거가 없어요. 당장 공공임대주택이 비어있는데 세입자들이 왜 안들어 갑니까.”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세입자들이) 보증금, 관리비 등이 비싸다고 하는데 그러면 기초생활보호대상자 신청을 해서 영구임대주택 들어가면 되죠. 이전비도 별도로 받을 수 있어요. 그런데 지금 세입자들 가운데는 단 한사람도 신청대상자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용산구청측은 이와 관련 홈페이지에 세입자들의 주장과 집회에 대한 구청측의 입장을 밝히고 있었다. “명도집행은 구청의 관여사항이 아니다.” “구청장의 김옥순씨 폭행은 사실이 아니다.” “김옥순씨는 불우한 세입자가 아닌 두 채의 집을 갖고 있다.”….
 
구청측의 주장은 또 원래 주택재개발이 아닌 도심재개발에는 임대주택 적용이 안되는데 구청에서 세입자들의 어려운 처지를 감안해, 서울시에 수차례 건의한 결과, 작년 11월 40세대가 임대주택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
 
구청측은 이와 함께 “투쟁을 하면 더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재개발현장에 만연된 풍조에 따라 외부세력인 빈철연 등과 연계해 위법행위를 행하고 있는 것에 대해 적법한 절차에 따라 대응할 것”이며 “동절기에는 명도집행을 자제할 것을 조합측에 행정지도 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법에 따라서 공무집행을 하는데 세입자들은 법 이상을 요구하고 있다. 세입자대책이 부족하고 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사회복지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부분이라는 주장이다.
 
마구잡이, 대단위 아닌 ‘순환식 재개발’ 이뤄져야
 
세입자 이주대책과 관련 한국도시연구소의 이호 책임연구원은 “정부의 무분별한 재개발에 따른 ‘세입자 이주대책 부족’이라는 근본적 문제로 인해 파생되고 있는 것”이라며 “광역 지구별로 ‘순환식 재개발’이 이뤄져야 하고, 세입자들에게 ‘가수용 단지’나 인근 임대아파트 활용 등 실제적인 이주대책 수립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 연구원은 또 “철거민들은 보증금, 임대료, 관리비 등 임대아파트에서 살 형편이 못된다고 하소연하는데, 일본 등 선진국에서처럼 소득에 따라 임대료를 차등부과하는 정책 등이 아쉽다”고 말했다.
 
민주노동당의 민기호 정책연구원도 재개발과 철거지역 세입자 대책이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민 연구원은 “근본적으로 지역별로 조금씩 순환식 재개발이 이뤄져야 하는데, 건설사와 지자체는 ‘수익성’을 이유로 대규모 재개발을 시행하다 있다”며 “이에 따라 끊임없는 철거민 투쟁을 부르고, 또 몇 년 뒤 대형 재개발 물량이 나오면 투쟁이 반복되는 악순환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민 연구원은 또 “세입자용 ‘가수용 단지’의 법제도화는 가옥주의 ‘재산권’과 세입자의 ‘주거권’의 범위를 면밀히 따져봐야 하고, 부동산 정책, 주공, SH공사 등의 운영방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입법발의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구잡이, 대단위 재개발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순환식 개발’이 절실하다는 것이 관련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세입자들이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주거권’을 제대로 보장받을 수 있는 날. 더 이상 이 땅에서 세입자들이 집이 없다는 이유로 서러운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되는 날은 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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