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 다섯 개로 상징되는 특급호텔. 특급 가운데 특급으로 불리는 신라호텔에서 가장 비싸게 판매되고 있는 단일 상품 1위는 프레지덴셜 스위트룸. 이용가격은 700만원이다. 2위는 신라스위트룸으로 650만원, 3위는 타임레스(Timeless)라는 술로 600만원이다. 그 뒤를 이어 4위에는 루이 13세라는 술이 390만원, 로얄 스위트룸이 280만원으로 5위를 차지했다.
 
물론 이 가격에는 부가세, 봉사료가 포함되지 않았다. 부유층의 소비문화를 상상할 수 있는 한 단면이다. 이쯤 되면 서민들은 이걸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어안이 벙벙할 지경일 것이다.
 
커피 한잔에 7,500원, 자장면 한 그릇이 1만1,000원선, 스테이크가 5만원선…. 호텔이니 당연히 비싸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도 해보지만 서민들의 살림살이와는 동떨어진 ‘너무 먼 당신’인 셈이다.
 
신라호텔이 소개한 최장기 투숙자를 보자. 미국계 전자회사의 한국 지점장이었던 미국인 P씨. 그는 지난 79년부터 84년까지 6년 4개월간 투숙해, 지불한 객실요금만도 1억원이 넘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 객실요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저렴한(?) 요금이다.
 
방문 횟수로는 홍콩은행에서 활약 중인 우리나라 사람 N씨가 꼽힌다. 무려 537회나 신라호텔을 방문해 호텔 종업원들 가운데 이 손님을 모르면 간첩일 정도라고 한다. 일본인 S씨가 363회 투숙해 약 17억을 사용했다는 것을 보면 N씨가 사용한 금액은 미루어 짐작이 가능하다.
 
평생에 한번 신혼여행 때나 호텔을 이용해 봄직한 서민들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을 일이다. 하지만 연말연시, 다채롭고 화려한 각 호텔의 특별 행사에 참여한 돈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처럼 ‘만원’이었다.
 
종업원들이 ‘상냥함’으로 무장하는 시간
 
이제 조금 더 친숙하게(?) 특급호텔의 럭셔리한 새해맞이 풍경 속으로 들어가 보자.
 
서울 종로의 프라자호텔. 서울시내 화려한 야경을 발 아래에 놓고,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 아이스 쇼장에서 벌어지는 송년행사를 눈 아래로 바라보며 그윽한 새해맞이를 하는 사람들.
 
식사부터가 남달랐다. 신선한 굴, 칵테일 소스, 쇠안심 스테이크, 자연송이 소스, 망고무스, 가리비 새우 무슬린에 그린소스, 자라 콩소메에 라비올리, 인삼 셔벗…. 낯선 이름들로 가득 찬 ‘새해메뉴(New Years Menu)’의 1인분 한 끼 식사 값은 10만원. 물론 각각 10%씩 붙는 부가세와 봉사료는 별도다. 돈 많은 사람들이 연인과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데 이 정도 금액이야 얘들 껌 값 아니겠는가.
 
밥을 먹었으니 이제는 즐겨야 할 시간. 송년을 기념해 호텔 나이트클럽이나 바에 들러 댄스파티로 흥을 돋운다. 각 특급호텔에서 마련한 송년 댄스파티는 풍성했다. ‘연말댄스 파티’ ‘브랏츠(큰바위 얼굴) 인형과 함께하는 송년 댄스파티’ ‘황금 마스크 파티’ ‘새해맞이 카운트다운 파티’ ‘가면 댄스파티’ ‘빙상위의 프러포즈’ ‘조PD와 친구들 파티콘서트’….
 
기자도 럭셔리가 뭔지 한번 느껴보고 싶었다. 댄스파티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술이나 한 잔 하기로 했다. 삼성동의 한 호텔 바. 할인이 된다는 ‘해피 아워(오후 6시~8시)’ 시간에 맞춰 친구와 함께 들렀다.
 
“포크가 없네요.”
“저기 뷔페 자리에 있어요.”
 
여종업원은 퉁명스레 답하더니 마지못해 포크를 가져다준다. 호텔답지 않은 불친절함에 의아했지만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해피아워 시간이 끝나는 저녁 8시. 필리핀 그룹사운드의 새 음악이 펼쳐진다. “매니저님, △번 테이블 ‘발렌타인’ 17년산이요.” “필요한 것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종업원들이 상냥함으로 무장하는 시간은 따로 있는 것 같았다.
 
14년째 그 호텔서 청소 일을 하고 있다는 한 아주머니와 화장실에서 마주쳤다. “IMF 때 보다 못하죠. 벌이가 시원찮아요. 이 불황에 여기 오는 사람들 보면 부럽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고 그래요.” 환경미화원들이 한 방송에 나와서 했던 이야기도 뇌리를 스쳤다.
 
“요즘 소주 한잔 마시기도 무섭고, 두려워요.”
 
친구와 둘이서 맥주 두잔 씩 걸친 가격은 3만1,460원. 2만6천원 기본료에 부가세와 봉사료를 합한 금액이다. 싼 맛에 호기를 한번 부려봤지만 역시 호텔은 호텔이었다. 친구와 서둘러 그곳을 빠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호주머니 사정은 호텔 바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새벽까지 ‘술과 춤’으로 광란의 시간을 보냈으니 이제는 그들도 자야 할 시간. 그들이 지친 몸을 누이는 장소도 호텔이다. 하룻밤을 묵는 데 20~50여만원. 그들 세계에서 그다지 비싼 가격은 아닌 셈이다. 새해 아침, ‘벨 서비스’에 잠에서 깨어난 이들은 호텔서 제공하는 ‘떡국’ 한 그릇을 우아하게 비우고, 서둘러 짐을 챙긴다. 그리고 떠난다. 스키장으로, 골프장으로….
 
2박3일 150만원…아이들 ‘식탁예절’ 교육까지
 
가족, 친구들과 함께 연말연시를 보내려는 이들은 각 특급호텔에서 내놓은 ‘패키지’ 상품을 주로 이용한다. 연말연시 각 호텔의 특별 상품이 나오는 족족 만원 사례에 가깝다는 것이 호텔관계자의 설명이다. 살펴보자.
 
메이필드호텔이 내놓은 ‘해피 패밀리 패키지’는 2박3일 동안 150만원. 스위트룸에서 지내면서 부모들은 호텔 스파(온천)와 9홀짜리 야외골프를 즐겼고, 자녀들은 수영이나 스쿼시 강습도 받을 수 있었다.
 
리츠칼튼 호텔은 가족이나 친구들이 스위트룸에서 함께 연말을 보낼 수 있는 ‘스위트 뉴이어 이브 패키지’를 1월2일까지 운영했다. 이용 고객들에게는 주방장 특선요리가 제공되었고, 방에서 조촐한 파티를 즐길 수 있도록 와인 1병도 선물로 주었다. 또 이용객들은 휘트니스센터 안의 체력단련장 및 수영장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다. 
 
요금은 4인 이용 기준으로 100만원. 호텔측은 “스위트룸 정상가격이 1박당 150만원에 이르는 것에 비교하면 그다지 비싸지 않다”고 설명했다.
 
밀레니엄 힐튼호텔도 4인 가족이 스위트룸에서 연말연시를 보낼 수 있는 ‘럭셔리 패키지’를 운영했다. 아침 제공에 1명은 무료로 ‘바디 케어’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요금은 4인 이용 기준 49만9천원. 이들 각각의 호텔 요금에는 세금, 봉사료가 별도이다.
 
이렇게 해서 이들이 하룻밤에 쓰는 돈은 수백만원에 이른다. 부유층들의 화려한 돈쓰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은 방학을 맞은 자녀들을 위해서도 아낌없이 돈을 쏟아 붓는다.
 
호텔에서 이들 자녀들을 위해 마련한 상품은 글로벌 시대에 맞춘 ‘식탁예절 교육’과 ‘골프 수영 스쿼시 등 몸 가꾸기 특별 프로그램’ ‘어린이 영어 뮤지컬’ 등등. 한달에 40~50만원 정도인 이들 프로그램의 예약은 거의 꽉 찬 상태다. 해마다 하는 프로그램들이지만 매년 자리가 모자란다는 것이 호텔 관계자의 설명이다. 
 
종로거리 수만 인파와 부유층 ‘그들만의 새해맞이’
 
을유년 닭띠 해. 2005년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서민들은 두툼한 옷을 챙겨 입었다. 연인끼리, 가족끼리 손에 손을 잡고 그들은 서울 종로 도심으로 몰려 나왔다. 한 밤의 추위를 피하기 위해 시민들은 거리의 포장마차나 편의점에서 우동과 오뎅 국물에 몸을 녹였다.
 
수만 여명의 인파는 연신 폭죽을 터트리며 2005년 새해를 맞는 기쁨을 만끽했다. ‘5, 4, 3, 2, 1’. 보신각에서 울려 퍼지는 제야의 종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화려한 불꽃놀이의 감격과 환호도 잠시, 시민들은 서둘러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새벽 2시까지 연장 운행하는 지하철을 놓치면 할증요금을 내고 택시를 타야 하기 때문이다.
 

같은 하늘 아래 서로 다른 ‘새해맞이’ 풍경인 것이다. 지난해 생계를 비관해 자살한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연말 한진중공업 하청노동자 김춘봉씨의 자살에 이어 새해벽두에도 ‘사업실패 비관 40대 부부 자살’ 소식이 들려왔다. 죽음을 강요받는 사회, 신빈곤의 시대. 서민들의 살림살이는 갈수록 쪼그라들어 울상인 반면 다른 한 편에서는 부유층들의 향락소비 문화가 서민들의 삶과는 무관하게 끝없이 이어진다.
 
종로거리의 수많은 인파와는 질적으로 다른 듯이 보이는 럭셔리한 삶을 즐기는 부유층들. 내수경기의 침체와 ‘올 상반기 경제는 더 어렵다’는 전망에도 이들은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들만의 새해맞이’에 충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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