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31일, 2004년 한 해의 마지막인 그날 89명을 제외한 전국경찰청고용직공무원 전원이 직권면직됐다. 그 수만도 574명에 달한다. '직권면직 철회'를 요구하며 지난달 16일부터 민주노동당사에서 거점농성을 시작한 경찰청고용직공무원노조는 이날 경찰청 앞 서대문 의주로 공원에서 전조합원 결의대회를 열었다. 최혜순 노조위원장과 간부 3명의 단식농성 11일째, 전조합원 단식농성 5일째인 31일, 그들을 만나봤다.<편집자주>


솔직히 울음바다를 예상했다. 경찰청고용직공무원노조(위원장 최혜순)에게 2004년 12월31일은 공무원이라는 신분에서 벗어나 민간인이 되는 ‘직권면직의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복을 입은 40여명의 조합원들이 의주로 공원에 들어서는 순간, 그 예상이 정확히 빗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합원들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밝았기 때문이다.

31일의 풍경은 그동안 경찰청고용직공무원노조의 집회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소속 경찰서 고용직공무원 참석여부를 확인하느라 집회 때마다 넘쳐나던 각 지역 정보과 형사들의 모습이 이날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최혜순 위원장의 지적대로 “전경들이 들고 있던 플라스틱 방패도 쇠방패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민간인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풍경이었다.

그러나 집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활기찼다. 22일 삭발을 했던 5명의 간부는 ‘바위처럼’ 노래에 맞춰 문화선전을 선보였고, 노조의 몸짓패인 ‘몸치패’가 공연한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라는 문화선전처럼 조합원들 그 누구 하나 얼굴을 찌푸리지 않았다.


한 시간여의 집회를 마치고 거점농성장인 민주노동당으로 돌아간 조합원들을 만나봤다. 마치 사랑방에 모인 것처럼 자유롭게 얘기를 풀어내던 조합원들은 이날 집회를 끝으로 단식농성을 푼 탓인가 더욱 생기가 있어보였다.

문자메세지로 전송된 직권면직 통보

거점농성에 참여하고 있는 조합원들에게는 이날 모두 문자 한 건씩이 전송됐다. “직권면직되셨습니다. 어디로 통보해 드릴까요?”라는. 심정이 어땠을까?

먼저 장희정 사무국장이 말문을 열었다. “사실 직권면직 자체가 실감나지 않는다. 다만 기능직으로 임용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새해에도 기능직 전환을 위해 끝까지 투쟁할 것이다.”

노조의 유일한 남성조합원이며, 22일 삭발투쟁에도 동참했던 유금영 전북지부 총무가 다음 말을 이었다. 유 총무는 “최하위직 공무원이면서도 경찰서의 모든 일들을 도맡아 해왔는데, 이제 와서 우리를 희생양으로 삼는다는 것에 분노를 금할 수 없으며 서글픈 일”이라고 솔직한 심정을 털어놨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경찰청 고용직으로 들어와 경찰서 직원의 자취방 연탄불까지 갈았다고 했다. “고용직 공무원이기 때문에 착실하게 시키는 일만 다하면 고용이 보장되고, 정식 직원이 될 수 있다는 말을 항상 들어왔다”고 했다. 그랬기 때문에 직권면직이 더 실감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들에게 기자는 솔직히 오전 집회에서 눈물 바다를 예상했다고 얘기했다. 한 조합원이 말을 받았다. “슬펐지만 슬프다고 인식하지 않고, 기능직 쟁취를 위해서라도 활기차게 해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울고 싶을 때에는 울어야 하는 데도 입술을 깨물고 웃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조합원은 “웃고 있어도 웃는 게 아니었다”고 덧붙였고, 다른 조합원은 “직권면직에 굴하지 않으려는 자존심이었고, 적어도 경찰청 앞에서는 울고 싶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내 조합원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또 한 조합원은 “아무리 잘해도 인정을 해주지 않는다. 고용직들이 일처리는 다해도 뒤돌아서면 그 공은 모두 경찰 직원들에게 돌아가 있다”며 억울해 했다. 그러나 문제는 일선 경찰서와 지구대의 직원들은 고용직의 필요성을 공감하지만 경찰청의 직권폐지 방침에 대항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조합원들은 “같이 일했던 직원들은 없어서는 안 된다는 걸 공감하지만 ‘내가 무슨 힘이 있냐’고 얘기한다. 그게 사실이다. 상명하복의 조직사회, 그게 공무원 사회다.”, “한 계장은 ‘고용직 직권면직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도 처자식이 있는데 어떻게 하겠느냐’며 끝까지 투쟁해서 (기능직 전환을) 얻어가라고 얘기했다”라고 전했다.

김향실 전북지부장은 “행자부의 잘못도 크다”고 지적했다. 경찰청이 고용직 직제 폐지 방침을 정했더라도 행자부에서 실사를 했었어야 한다는 것. “일선에서 모든 일은 고용직들이 다하지만 '기안'에 올라가는 것은 담당공무원의 이름이다. 현장에 나와 실사만 했다면 고용직들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알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무원 사회의 관료주의를 꼬집은 말이었다.



경찰의 날 때 그 흔한 기념손수건조차…

이윽고 묵묵히 얘기만 듣고 있던 한 조합원이 말문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처음부터 젖어 있었다. “지금은 지구대로 바뀐 파출소에서 90년부터 일해왔다. 그 15년 동안 직원들의 식사를 책임져왔다. 쉬는 것도 한 달에 이틀 정도에 불과했다. 내가 꼭 있어야 된다고 해서, 매일 같이 저녁 7시, 8시까지 근무했다. 15년 동안 이렇게 부려먹고, 경찰서 근무도 못해봤는데….”
 
더이상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까지 시간외 수당으로 2만원을 받아왔다. 그런데 얼마전 고용직 동료의 말이 시간외 수당이 10여만원이라는 것이다. 15년 동안 시장봐서 식사 준비하고, 은행 심부름까지 다해왔는데 정당한 수당조차 받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같이 일했던 정 때문에 면직당하기 이틀 전까지도 식사를 차려주고 왔는데…. 내 고유업무보다도 밤에 근무했던 사람들이 어지럽혀 둔 것을 치우고, 화장실 청소에 직원들 뒤치다꺼리 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오죽했으면 남편이 집을 팔아서라도 (투쟁해서) 꼭 기능직 전환하라고 그랬겠냐.” 그 조합원은 서러움이 북받치는 목소리로 말을 마쳤다.

유금영 총무는 “필요할 때만 공무원이고, 직원이었다”며 “과장이나 계장이 초도 순시를 나오면 고용직들은 눈에 띄면 안 된다면서 쫓아냈다. 순시온 사람들이 나가야만 경찰서에 들어올 수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직원으로서 대우도, 인정도 안 한 것이다. 그런 비애감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러자 한 조합원이 “경찰의 날 행사 때도 그 흔한 기념 손수건조차 고용직의 몫은 없었다”고 거들었다.

2005년 그들의 소망과 각오는 한가지뿐이었다.

“생존권 보장될 때까지 열심히 투쟁할 것이다. 우리가 하던 일 그대로 제자리로 돌아가 일하고 싶다. 월급을 올려달라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단지 고용안정을 원한다. 고용직 직제가 없어졌기 때문에 기능직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다.”

'기능직 전환'을 위해

경찰서 내부에서 거의 모든 업무를 맡았던 고용직공무원들은 경찰관들의 비리와 부정부패에 대해서도 깊이 알고 있었다. ‘양심선언’과 법정투쟁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아직도 함께 일했던 경찰 직원들을 가족처럼 생각하는 조합원들은 입을 꼭 다물고 있다. 그러나 경찰청의 태도가 변하지 않는다면 이들도 언제 태도를 바꿀지 모른다고 했다. 12월21일 이미 발표한 ‘직장내에서 희생을 강요당했던 사례’들은 일차적인 대응에 불과하다. 부당한 탄압사례에 대한 수집을 계속하고 있는 노조는 곧 법적 투쟁도 준비할 예정이다.

한 조합원이 했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15년 동안 우리가 했던 것처럼 식사준비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그런 일들 다 해 보라.” 그 한마디에 경찰청고용직들의 서러움이 다 스며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이 경찰청고용직공무원으로서 투쟁을 시작했을 때, 경찰청으로부터 온갖 협박과 회유를 받았지만 그들은 아직까지 건재하다. 지방에 있는 어떤 조합원은 수배가 떨어졌다는 협박까지 들었다고 털어놓았으며, 조합원들 대부분의 남편과 결혼할 사람, 친척들은 물론 동네 사람들에까지 경찰들이 회유 작업을 일삼아왔다는 것도 밝혔다. 2005년 민주노동당사에서 떡국을 끓여먹으며 새해를 맞이한 그들은 이제 '공무원'이 아니라 '민간인'으로서의 투쟁을 시작한다. ‘직권면직 철회’ 대신 ‘기능직 전환’을 요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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