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활동 인구의 20%인 500만 신용불량자’ ‘개인 빚 사상 첫 500조 넘어서’ ‘연이은 생활고 비관 자살’…. 2004년 연말 대한민국의 우울한 풍경이다.
 
‘쫓겨날 신세’ ‘집 없는 설움’. 서민들의 살림살이는 갈수록 팍팍해지고 등골이 휘는 가운데 ‘주공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는 일부 입주자들이 벼랑 끝 삶의 위기에 처했다. 23일 오후 경기도 의정부시 신곡2동 금오주공아파트 9단지. 인근 대규모 고층 아파트 단지 정글 숲속으로 깊숙이 들어가자 금오주공9단지가 나왔다.
 
“무주택 서민 울리는 임대료·보증금 부당인상 거부한다!” 조용한 아파트단지에 현수막이 펄럭이고 있었다.
 
국민임대아파트인 금오주공의 주민들은 대부분 2002년 11월 이후 입주해 이달이 2년째로, 재계약을 코앞에 두고 시름은 깊어가고 있었다. 주공의 매년 5% 임대보증금 및 임대료 인상에 주민들이 반발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임대료 연체, 가압류 세대의 문제는 더 심각했다.
 
전국임대아파트입주자대표연합회(이하 임대련)가 최근 조사한 ‘갱신계약이 도래한 주공임대아파트의 가압류세대 현황(12월 13일 기준)’ 자료에 따르면 전국의 가압류세대는 242세대나 된다. 이 가운데 의정부 금오주공9단지는 총 1,450세대 가운데 5.7%인 84세대로 가압류세대가 제일 많다. 대구 칠곡주공5단지는 총 714세대 가운데 9.8%인 70세대, 서울 신림주공2단지가 총 818세대 가운데 6.2%인 51세대, 부천 상동하얀마을이 총 636세대 가운데 5.8%인 37세대 등이다.
 
금오주공 관리사무소 2층 ‘입주자대책회의’ 사무실 한 켠에 ‘가압류세대 비상대책위원회’를 찾았다. 이 아파트 단지의 3개월간 임대료를 연체한 세대는 전체 1,450세대 가운데 432세대나 되었고, 84세대는 가압류 상태였다. 이달말까지 임대료, 보증금, 가압류 금액을 납부하지 못하면 ‘갱신계약’을 못하고, 길거리로 내몰린 판.
 

 
‘가압류’가 재계약 금지 사유?
 
대부분의 가압류 세대의 사연은 이랬다. 2002년 11월 이후 임대아파트 입주시 ‘전세자금대출’을 해준 제일은행이 최근 원리금 미납자와 신용불량자들을 대상으로 원금회수에 나서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제일은행측은 보증인인 ‘주공’과 ‘주택신용보증기금’을 상대로 대출금액을 회수해 갔고, 주택신용보증기금측은 주공이 입주자들로부터 받은 ‘임대보증금’을 가압류 한 것. 이에 따라 주공은 가압류세대에 이달 말까지 임대료, 관리비는 물론 가압류 금액을 일시불로 납부해야만 ‘갱신계약’을 해주겠다고 지난 10월에 통보했다.
 
제일은행측이 채무자 본인에게 특별한 통보도 없이 채권회수를 진행해, 채무자들은 주공과 임대차 갱신계약을 하는 과정에서 뒤늦게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현행법 어디에도 가압류를 이유로 재계약을 하지 말라는 규정이 없어요. 국민고충처리위원회나 공정거래위에서도, 또 대법원의 2002년 1월 판례에도 그렇게 나와 있어요. 그런데 주공은 안하무인식으로 나오고 있는 거죠.” 가압류세대비대위의 박우철 위원장은 주공의 횡포를 비판했다.
 
“채권확보를 위해 가압류 하는 것이지 당장 채권회수를 집행하기 위해서 가압류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주공이 가압류를 이유로 갱신계약을 거절하는 일은 너무나 부당하죠.”
이에 대해 주공측은 “법적자문을 받아본 결과, (주공에) 손해배상 책임 등의 문제가 발생된다고 판단했던 것”이라며 원칙적인 입장을 밝혔다.
 
 
“엄동설한에 어디로 가란 말이냐”
 
“주공이 서민들 가지고 장난치는 곳이냐. 엄동설한에 쫓겨나면 오갈 데도 없는데 어디로 가란 말이냐. 노숙자가 되란 말이냐.”
 
907동에 살고 있는 김아무개(59)씨는 남편과 함께 수십년 세탁소를 운영해 왔다. 2년여 전부터는 150~200여만원의 운영비도 빠지지 않아 지난달 폐업을 결정했다. 최근 신용회복위에서 채무재조정까지 받아 빚의 분할상환을 하고 있는 과정인데, 주공은 채권가압류 금액 799만원과 5% 인상된 보증금을 합해 862만원을 이달 말까지 일시불로 내라고 하고 있는 것.
 
“10~20만원 관리비도 없어 쩔쩔매며 못내는 판인데, 그 많은 돈을 어떻게…. 살기 위해 빚도 갚는 건데 이러면 살 이유가 없어요.” 아주머니는 금새 눈시울이 붉어지며 참았던 눈물을 쏟고야 말았다. 남매가 매달 보내주는 몇 만원 외에는 이들 부부의 생계대책은 전혀 없었다. 남편 김모(64)씨는 세탁소 실패로 시름시름하다가, 최근에는 이가 흔들리고 이빨이 빠지는 등 후유증이 커 보였다. “건강보험료도 체납돼 병원도 가지 못해요. 휴~.”
 
909동에 산다는 조아무개(45)씨가 말을 이어 나갔다. “은행 이자 꼬박꼬박 내고 있었어요. 그런데 다른 곳에서 신용불량이 뜨니까 주공이 원금을 회수하러 나서는 꼴이잖아요.” 조씨는 “식당에서 일하며 어렵게 살고 있는데, 3개월째 임대료를 체납하니까 전기도 끊어버리더라”며 주공의 횡포에 치를 떨었다. 그는 최근의 심정을 죽고 싶다는 말로 표현했다.
 
“워낙 불안하고 신경이 쓰여서 입도 돌아가고, 안면근육이 마비되기도 해요.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 내려 자살하면 이 억울함이 세상에 알려질까요. 그래야 (주공이) 정신차리려나요.” 
 
“국회 건교위 의원들은 서민들의 삶의 위기에 ‘콧방귀도 안 뀌고’ 우리가 보내준 자료에 보좌관들은 ‘바빠서 볼 시간이 없다’고 합디다.” 15년째 택시를 몰고 있는 박우철 비대위원장. 그도 급여와 퇴직금에 대한 가압류 금액 589만원에 추가납부보증금을 합하면 이달말까지 603만원을 납부해야 한다. 100여만원 벌이에 ‘개인회생’ 채무재조정으로 50%를 떼이면서, 두 아이 학교 보낼 일이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 와중에 600여만원 일시불 납부는 까마득할 뿐이었다.
 
비대위 사무실에 모인 주민들이 너나 구분할 것 없이 말을 던졌다.
 
“보증금에 대한 채권압류 등 만으로는 갱신계약을 거절할 수 없다는데, 유독 주공만 억지를 부리고 있어요. 완전 독불장군이에요.”
 
“당첨되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데요. 그런데 막상 들어와서 보니 너무 후회가 되요. 이젠 주공 임대아파트에 입주하려는 사람들 있으면 도시락 싸들고 가서 말리고 싶어요.”

“관리사무소에서 매일 아침 체납요금 독촉방송을 해요. 그거 들으면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혀요.”
 


소득 146만원 초과했으니 20%할증
 
909동에 살고 있다는 한 아주머니가 대책위 사무실로 찾아왔다. 자신은 ‘소득초과자’인데 너무 억울해서, 하소연 좀 하러 왔다고 했다.
 
“임대아파트에 살려면 소득이 146만7천원 이하여야 하는데, 소득초과 됐다고 20% 할증요금을 내라네요.” 한 아무개(57)씨의 사연은 기가 막혔다. “육십이 넘은 남편이 ‘계약직’으로 화물차 운전하면서 소득이 조금 많아졌는데, 20% 할증요금을 내라는 게 말이 됩니까. 그것도 나이, 가족, 소득편차 상관없이 일괄적으로 똑같이….”
 
건교부의 주택공급에 관한 규칙 32조 임대아파트 입주기준에는 도시근로자 가구 월 평균 소득의 50% 이하로 규정되어 있다. 입주기준 소득을 초과했기 때문에 한씨는 이달 말까지 임대료 5% 인상분에 20% 할증요금을 합해 총 380만원을 내야 할 처지였다. 9단지의 경우, 한씨 외에도 ‘소득초과자’로 할증요금을 내야 할 가구가 100여 세대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황당한 것은 ‘소득초과’ 기준이 ‘세대주’가 아닌 ‘세대원’에 부여된다는 것. 맞벌이를 하는 가정이나 자식들의 소득도 포함된다는 얘기다. 나이, 식구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소득산출이다 보니 멀쩡한 가정이 이혼(형식상)하거나, 같이 살고 있는 자녀들이 주민등록을 옮기는 촌극도 종종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주민들의 설명이다.
 
이에 대한 주공측의 입장은 “건교부 규칙(훈령)을 고치지 않는 이상 주공이 임의로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차등 적용 요구 등 비현실적, 비합리적인 부분이 있다면 정책적으로 먼저 개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자님은 140여만원으로 생활할 수 있어요. 관리비 임대료만 20~30만원이에요. 그 돈으로 애들 학교 보내고, 먹고 살 수 있냐고요. 주공에 좋은 일 만들지 않으려면 돈 더 벌 생각하면 안돼요.” 한씨의 한탄은 계속되었다.
 
“너무 기가 막히고 억울해요. 법이란 게 생활하기 편하게 고쳐져야 하는 것 아니에요. 멀쩡한 집들을 이렇게 만들어놓는 주공은 ‘가정파괴범’이에요.”
 
옆에 있던 분들도 한 두 마디 씩 말을 거들었다. “병원에 근무하는 아내에게 남편이 할증요금 안 내려고 (형식상) 이혼하자고 했어요. 그러자 아내는 이런데서 사느니 차라리 ‘이사가자’고 해서 나갔어요.” “주공은 서민들을 상대로 폭리를 취하는 ‘고리대금업자’에요. 천하의 악독한 인간들이라니까.”
 
도시근로자 평균 소득의 50%에 해당하는 소득자들인 입주민들. 이들은 대부분 맞벌이 부부, 장애인, 독거노인, 비정규직, 영세자영업 등 ‘차상위 계층’에 해당한다. 임대료, 보증금 인상에 빚 독촉까지. ‘집 없는 설움’을 톡톡히 당하고 있는 그들의 눈에 각종 비리 연루로 줄줄이 쇠고랑을 차는 역대 주공 사장들과, 면담요청조차 거부하는 현 주공사장이 달가울 리 없었다.
 
“때려잡자! 주공” “해체하라! 주공”. 벼랑 끝에 몰린 상황에서 주민들은 험악한 구호를 외칠 수밖에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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