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판의 답답함도 그러려니와 경제 예측은 온통 어두운 잿빛이다. 정부가 내놓은 새해 4.0% 성장률은 성에 차기 어려운 것이지만 연구자들의 진단은 더 싸늘하다. 이미 올 경제 성적표는 바닥에 가깝다 못해 비상국면이라는데 입을 모으고 있다 한다.
 
경제의 구석구석이 온전한데가 없어 보인다. 농민들은 폐농 위기의 급박함을 호소하고 있고 자영업자, 봉급쟁이, 중소 영세기업 할 것 없이 모조리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다. 내노라하는 대기업들도 몇몇을 제하고는 결코 밝은 표정이 아니다. 이 예상대로라면 고용상황의 악화는 더 말할 것이 없을 것이지만 졸아들기만 한 허리를 얼마나 더 졸라매야 할런지 근로서민들의 걱정은 한이 없다. 과연 이 사회의 밑바닥을 채우고 있는 근로대중의 삶의 조건은 어떤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인가?

통계 뒤에 숨은 모순

아직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죽을 지경은 아니라고 정부의 실업 통계는 말해주고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지난 11월 우리나라 실업율은 지난 달과 같은 3.3%이였고 경기가 더 가라앉았다는데도 작년보다 0.1%나 낮아졌다.
 
이 수준으로 치면 한국은 완전고용에 가깝다. 미국 5.4%, 일본 4.7%, 독일 10.8%, 프랑스 9.9%의 외국 실업율이나 경제개발기구(OECD) 가입국중 가장 낮은 수준이라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청년 실업자가 전체 취업자의 7.3%이고 이른바 이태백, 사오정이 넘쳐나는 현실이 그 반증이다.

황량한 대량실업 시대에 이런 꿈깥은 통계가 나온 근거는 이렇다. 우선 1주일에 한시간이라도 일하는 사람은 실업자가 아니다. 따라서 소득이 얼마가 되든 조그만 일자리라도 있으면 그 사람은 취업자에 속한다. 우리나라에는 다른 나라에 비해 소규모 자영업자가 많다고 한다. 수입이라고 할 수도 없는 낮은 소득에 허덕이는 노점상이나 집안일을 돕는 사람들도 모두 취업자로 계산된다. 취업자 가운데 자영업주와 무급 종사자는 전체의 36%나 되는데 미국은 7%, 일본은15%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또 실업통계에는 이른바 실망실업자도 잡히지 않는다. 실망실업자란 일할 능력이 있고 일할 의사도 있지만 구직방법을 모른다거나 마땅한 일자리가 없을 것 같아서, 또는 임금이 너무 낮아서 아니면 자격이 없는 것 같아서 등등의 이유로 아예 구직을 포기한 사람들이다. 여기다 고시학원에 다니는 취업 준비생도 사실은 실업자인데도 제외되어 있다. 일주일에 하루 근로를 구분 기준으로 삼다 보니 노동시간이 아무리 짧아도 모두 취업자로 분류되기 마련이다. 3.3%의 실업율은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허점을 들어 삼성경제연구소는 색다른 자료를 발표하였다. 올 3.4분기 실질 실업자가 351만 3천명으로 경제활동인구 2331만 5천명의 15.1%를 넘어섰다는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실질 실업율은 정부의 공식 실업율 보다 4.3배나 많다. 여기에는 완전실업자(81만 7천명) 외에 일용근로자 등 고용이 불안정한 유사실업자와 구직 단념자(10만 1천명), 주35시간 미만 근로자 259만 5천명이 포함돼 있다.

‘노동력의 불완전활용도’라고 불리운 이 통계는 물론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이미 30~40년전부터 우리나라의 선구적인 노동경제학자들 사이에 불완전 취업 또는 잠재실업이라는 이름으로 분석되어 왔던 내용이지만 급속한 경제성장과 고용확대 추세에 묻혀버렸던 것을 재생시킨 것이다.
 
아무튼 정부의 공식 통계는 이런 외부 자료보다 실업과 고용불안의 실태를 밝히는데는 너무도 한계가 많다. 그리고 고용형태의 변화에 따른 고용불안의 확대와 그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실상을 완전 배제해버린다. 이들 속에는 이 사회에서 버림받을 위기에 놓인 빈곤층, 신빈곤층, 불안정노동층이 모두 들어 있을 터이다.

그런데도 역대 정권은 실업율 통계를 고치거나 새로이 작성하려 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될 수 있는대로 문제될만한 요소는 줄여서 내놓는 것이 최상이라고 생각하는 권위주의 정권의 통치술이 작용하고 있다. 이런 예는 비정규직 통계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규모와 심각성이 엄청나게 커지고 있음에도 애써 이를 감추려 한다. 객관적인 사실을 정치화하려는 지배권력의 기만적인 선동의 욕구가 숨겨져 있다고도 할 수 있는 요소다.

개혁입법 확실히 관철해야

그러나 자료를 잘못 짚으면 정책이 비뚤어지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아직도 낡은 통계방식을 고집하고 있는 데는 실업문제를 가벼이 여기는 정책적 함정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것을 양으로 재단하려는 성장론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장만 이루어지면 곧 해결될 수 있다는 고도성장시대의 유산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무너진 성장신화를 부여잡고 언제까지나 경기회복 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상황이 변화했으면 대응도 변화해야 하고 저성장 고실업시대에는 그에 맞는 정책이 나와야 한다. 이 점에서 최근 논의 되고 있는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은 우리 상황에 비추어 주목되는 대목이다. 당연히 일자리를 늘려야 하겠지만 고용의 질을 높이고 사회안전망도 확충해 가자는 뜻이리라. 하지만 언제 우리나라에 분배정책이 있었던가를 생각해 보면 정책 선택의 폭을 어느 쪽에 더 두어야 할지는 자명한 일이 아닌가 싶다.

경제의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걱정거리다. 빠르고 불확실한 변화 속에서 경기를 살릴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 쉽지 않다는 것도 고민이다. 그러나 경제의 어려움을 빙자하여 개혁의 발목을 잡으려는 시도가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다. 개혁 피로증후군이라든가 민생외면 운운의 논리에는 이런 주장이 깔려 있다.

한나라당과 수구언론들은 한결같이 개혁입법을 유보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경제가 엉망인데 웬 정치싸움이냐 4대입법과 같은 경제외적 불안감이 확대되면서 내년 경기전망을 더욱 암울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혁입법을 밀쳐두고 여야가 함심하여 민생을 챙기라는 얘기다. 이들 모두는 과거 일제와 미국의 지배 그리고 독재정권의 그늘 아래에서 정경유착 부정부패의 고리를 만들어 끼리끼리 기득권을 누려온 사람들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개혁을 저지하고 기득권을 옹호하는 것일뿐 경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데도 정부 여당은 이른바 원활한 정국운영이란 미명하에 타협을 모색하려 한다.
 
타협이란 수구보수세력이 비열한 목적을 버리지 않는 한 곧 개혁의 후퇴로 연결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들과 타협하여 적당히 얼버무리고 갈 경우 정부 여당은 타락의 동반자로 남기를 강요받을 것이며 민주 양심세력의 저항은 경제 어려움과 함께 참여정부의 전도를 괴롭히게 될 것이다. 어차피 경제의 어려움을 겪어야 할 것이라면 해묵은 과제들을 홀가분하게 정리해내는 것이 어려움을 헤치는 순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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