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도 픽션을 허용한다고 하더라도 ‘역사적 사실’에 어긋나는 구석이 많다는 지적도 있지만, 매주 토·일요일마다 7살 난 아이와 함께 보는 드라마가 있다. 드라마가 끝나면 아이를 바로 잠자리에 들게 한다. <한국방송> 역사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다. 역사적 사실과 다른 부분을 감안해 얼마 전엔 아이에게 이순신 장군 관련 만화책도 사줬다.

지난 ‘12·12’ 방송분에는 이런 장면이 있다. 이순신이 총애하던 한 병사가 화살을 몰래 여진족에 팔아먹다 들통이 나 참수를 당했다. 아내는 먹지 못해 젖이 말라 갓난아이에게 먹이지 못하고 딸들 역시 굶어죽을 상황에서, 그 병사는 적을 이롭게 하는 짓을 저지른 것이다. 그걸 보고 이순신은 스스로를 책망한다. ‘적보다 가난이 더 무섭다는 것을 네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면서.

이순신 만화책과 드라마에 번갈아가며 눈을 주는 아들 녀석을 힐끗 보면서, 몇 가지 생각이 머리에 꼬리를 물었다. 평소에는 별다른 문제를 못 느낀, ‘나쁘다는 것을 알고 행하는 것이 더 나쁘다’는 말이 갑자기 낯설어졌다. ‘민주주의의 가장 큰 적은 가난’이라는 의미가 생생하게 다가왔으며, 문제의 병사는 현재를 살아가는 수없이 많은 서민들이라는 생각에까지 다다랐다.

민주주의 최대의 적은 '가난'

역사 드라마를 보며 동화됐기 때문일까, 청와대를 언제나 구중궁궐로 묘사해온 <중앙일보> 김상택씨처럼 봉건적 사고방식에 빠져들었기 때문이었을까. 분노는 ‘한국형 뉴딜’이라는 말장난을 일삼는 현 정권으로 튄다. 연기금 일부를 서민들을 위한 임대주택을 짓는 데 사용하겠다, 외국인들이 너무 많이 우리나라 우량기업을 갖고 있는데 부작용이 적지 않으니 연기금이 적절하게 지분을 사들이게 할 필요성이 있다 등 이렇게 알리면 될 걸 가지고 ‘한국형 뉴딜’이라는 포장술을 펴는 데 대한 반감이었다. 이전에도 ‘할 일이 그렇게 없나’ 라는 생각을 들게 한 비슷한 분노가 있었다. 청와대 언론비서관이 "'盧'라고 부르지 말아 달라"는 장문의 내용으로 청와대브리핑을 도배질 했을 때였다.

하지만, ‘적보다 가난이 더 무섭다’라는 그 장면에서 도대체 얼마나 나처럼 생각할까 하는 ‘우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조중동’의 참주선동대로라면, 나는 ‘수구 레프트’에 속해서 그런 것일 테지만, 문제는 좀 더 근본적인 데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많은 한국인들에게 ‘적보다 가난이 더 무섭다’는 말은 ‘가난은 나라님도 어쩌지 못한다’는 결론을 조금도 방해하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결국, 가난은 ‘내가, 아니 내 가족이 빠지지 않기 위해 이기적인 몸부림을 쳐야 하는’ 어떤 것이 된다. 이런 모습을 두고 혹자들은 ‘한국에서 자유주의는 파편화한 이기주의’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정부가 있음을 '제대로' 보이라

올들어 3분기까지 총저축률은 34.2%였다. 2000년 33.7%에서 2001년 31.7%, 2002년 31.3%로 낮아졌다가 2003년 32.6%로 다시 올라선 뒤 반전 폭이 훨씬 더 커진 것이다. 분기별로 살펴보면, 2002년 1분기 27.4%에서 올해 3분기 35.2%로 급상승했다. 많은 원인이 있을 것이다. 경기가 불확실할 때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늘리는, 어느 나라에서나 공통적인 인지상정은 그 기본이다. 특수성을 들자면, 카드 거품과 부동산 거품을 통한 급격한 소비 증가를 들 수 있다. 소비가 급증된 만큼 그것이 반전되는 폭도 급격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건조한 수치의 급반전에는 ‘가난은 나라님도 어쩌지 못한다’는 말이 상징하는 ‘파편화한 이기주의’가 깔려 있다. 이는 카드 거품 및 부동산 거품 붕괴 이후 더 강화했으면 했지 줄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저축을 늘릴 여력이 있는 사람은 소득계층으로 보면 중상층 이상일 것이고, 그들 가족에게 미래는 온전히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다. 그러니 경기 둔화와 함께 저축을 급속히 늘리기 마련이다.

한국형 뉴딜이 있다면, 바로 이걸 깨야 한다. 많은 이들을 감동시킨 미국 뉴딜의 진수는 바로 노동권의 강화였다. 힌국형 뉴딜의 진수가 있다면, 그것은 ‘나라는 가난을 결코 좌시하지 않는다’는 의지를 통해 파편화한 이기주의를 정면에서 들이받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일부 국회의원들이 제안한 것처럼 국민연금은 결코 파산되지 않으며 나라가 지급보증을 하고 있음을 분명히 선언하는 게 필요하다. 뒤늦었지만, 극빈 생활계층 및 노동시장에 진출하는 청년 노동자 가운데 신용불량자가 된 이들의 채권을 탕감해주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다. 문제는 검토가 아니라 곧 시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갈라치기’라는 정치공학으로 여기까지 온 현 정권이 ‘적보다 가난이 더 무섭다’는 진실을 이제야 깨달은 것일까.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