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 연내 폐지가 결국 무산됐다.
 
7일 국회에서 열린 상임중앙위원회 기획자문위 연석회의 후 천정배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는 긴급기자회견을 갖고, 국가보안법 폐지안 연내처리 유보방침을 발표했다. 이날 천 대표가 “열린우리당은 어제 법사위에 상정된 국가보안법 폐지안의 연내 처리를 유보하겠다”고 밝힘으로써, 법 폐지를 둘러싼 지루한 논쟁이 ‘현실론’ 쪽으로 급격히 기울어지는 양상이다.  
 
천정배 대표는 “열린우리당은 이 시점에서 책임 있는 집권여당으로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중대한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며 연내처리 유보 이유를 밝힌 뒤, “민생과 개혁을 동시에 살리기 위한 여야대타협”을 제안했다. 
 

천 대표는 이번 결정이 “우리 앞에 놓인 엄중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민주개혁 정통세력을 대표하는 집권당으로서 수없이 고뇌한 끝에 내놓은 것”이라며 이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호소했다.
 
천 대표는 한나라당을 상대로 연말 임시국회 소집과 연내 입법청문회 및 국민대토론회 개최를 제안했다. “임시국회에서 민생·경제법안을 우선적으로 처리하고, 개혁법안도 국회 내에서 함께 토론하고 합리적 타협을 통해 연내에 처리하자”는 것이다.
 
천 대표는 “여야 대타협을 향한 우리당의 제안은 합리적인 토론 정치를 복원해 절박한 국가적 과제를 조속히 해결해 나가자는 것”이라며 “한나라당이 책임 있는 야당으로서 현명한 판단을 해주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천 대표의 이 같은 결정은 그러나 천 대표가 최근 연일 대 한나라당 강공발언을 쏟아냈던 사실 이외에도, ‘날치기’ 논란까지 불러일으키며 국보법 폐지안 법사위 상정을 시도, 당내 분위기를 한껏 고양시킨 바로 다음날 나온 것이어서, 다소 뜻밖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법사위 소동’이 있었던 6일 당내 인사들이 한 발언을 되짚어 볼 때, 천 대표의 발표는 어느 정도 예상됐던 지점이기도 하다.
 
기습 상정의 주인공이었던 최재천 의원은 법안 상정 소동 뒤 “7일 법사위 전체회의에서 상정 뒤 절차인 제안설명, 대체토론과 법안심사소위 회부 등은 하지 않을 것”이라며 “상징적인 의미에서 상정한 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밝힌 바 있다. 실질적인 폐지절차와는 무관하게 ‘상정 노력’을 대외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당 지지자들에게 법안 처리 의지를 확인시켰다는 점만으로도 일정 성과를 거뒀다는 것이다.
 
폐지안 법사위 상정 후 당장 추가 절차를 밟지 않을 것이란 전망은 김원기 국회의장의 제안에서도 점쳐졌다. 이는 국보법 폐지는 장기적 과제로 돌리고 민생경제 관련법과 사립학교법·과거사진상규명법·언론관계법 등의 처리에 우선순위를 두자는 것으로, 이날 천 대표가 발표한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천 대표가 ‘국가와 민족을 위한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곤 하지만, 현 상황으로선 대차대조표가 딱 떨어지긴 쉽지 않을 듯 하다. 당장 한나라당이 임시국회 소집을 거부하고 있는 데다, 법 폐지를 강하게 주장해 온 당 안팎의 동의까지 이끌어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집권여당으로서 한나라당의 반대를 돌파하지 못한 채 정기국회 폐회를 불과 이틀 남겨 둔 시점까지 몰린 열린우리당이 소득은 별로 없이 ‘시간끌기’로 일관해 온 한나라당 전술에 백기를 드는 형국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 
 
법 폐지를 둘러싼 지루한 공방이 내년 재보선까지 계속될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한편,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의 제안을 즉각 거절했다. 김덕룡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기자간담회를 열어 “9일까지 밤을 새워서라도 예산안 심의와 파병연장동의안 처리를 마칠 것이므로, 임시국회를 소집할 이유가 없다”며 “여당이 한나라당을 배제한 채 단독 소집을 강행하지 않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민주노동당은 열린우리당을 강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민주노동당은 천정배 열린우리당의 연내처리 유보 발표 직후 국회에서 최고위원-의원단 연석회의를 열고 “열린우리당의 사기행위를 규탄한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김혜경 대표는 “천정배 대표의 대타협 주장은 국민의 개혁열망을 정면으로 배신하는 행위”라며 “상정을 둘러싼 법사위의 우여곡절도 결국 한나라당과의 대야합을 위한 한편의 정치적 쇼이자 국민 기만극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열린우리당의 입장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이에 앞서 민주노동당은 7일 오전 열린우리당에게 ‘이라크파병연장 동의안’과 기금관리기본법과 민간투자법, 국민연금법 등 ‘뉴딜3법’, 기업도시법 등을 처리하려 든다면 임시국회 소집에 동의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천영세 의원단대표는 이와 관련 “민생법안 강행처리에 반대한다”며 “이라크파병연장 동의안도 전원회의에서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 당의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정기국회가 끝나는 9일까지도 이 같은 각 당의 줄다리기가 계속된다면 10일 임시국회 개회는 힘들어진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몇 가지 전제조건을 달아 열린우리당의 ‘양보’을 받은 다음 임시국회에 응할 것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다. 한나라당이 "현재로서는 임시국회를 열 필요가 없다"고 강조할 뿐 "절대 협조하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고 있는 점도 이러한 분석에 설득력을 더한다.

결국 국가보안법 폐지상정으로 한 때 화해할 수 없이 대결하는 듯 비쳤던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언제 그랬냐는 듯' 손 잡고 국회를 열어 이른바 뉴딜3법 등 경제관련법 등을 처리하려 들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렇게 될 경우 권영길 의원의 단식중단으로 캐스팅보트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이던 민주노동당은 또 한번 원내에서 '소외'의 쓴 잔을 마셔야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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