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안이 국회에서 심의되고 있다.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노사정위 논의를 거쳤다는 이유로 한 차례 공청회만 설정하고 있다. 다수의 전문가들은 이 법안이 영미식의 기업연금제도에서 정하고 있는 외부 감시장치조차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국회의원 가운데 이 법안의 내용과 앞으로 나타날 결과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도 드물다. 이에 이 법안의 통과를 우려하는 전문가의 글을 통해 국회가 다시 한번 이 문제를 심사숙고하기를 기대한다. <편집자주> 


2006년 시행을 예정으로 한 퇴직연금제가 정기국회 통과를 위해 환경노동위원회에 회부됐다.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안)이란 이름의 이 법은 현행 퇴직금제도를 유지하면서 확정급여(DB)형과 확정기여(DC)형을 병행하는 것이지만 사실상의 기업연금제인 셈이다. 기업연금제는 그동안 이해당사자들 사이에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퇴직 후 안정적인 노후소득을 보장하는데 있어서 현행 퇴직금제도보다 더 낳은 제도가 돼야 한다는 원칙은 비교적 분명하다. 물론 이러한 대원칙에도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테지만, 회부된 법안은 여러 가지 점에서 문제가 많다.

고삐 없는 주식시장화, 영미식도 아닌

우선 제출된 법안에 제시된 기업연금 적립과 운용, 감시 등과 관련된 규정들을 보면 기업연금제도를 본격적으로 시행하는 미국이나 영국의 그것과 차이가 많다. 예컨대 미국과 영국은 사용자를 포함해 연금 소유자의 이익을 위해 행동해야 하는 외부감시자가 존재하고 이 감시자의 역할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영국은 수탁자, 그리고 미국에서는 지명충실의무자가 외부감시자 역할을 수행하며 이들이 선임한 연금계리인과 외부감사인은 외부감시자를 대신하거나 보조하면서 전문적인 감시기능을 수행한다.

일반적인 기업지배구조보다 연금지배구조에서 외부감시인의 역할이 더 중요한 이유는 연금지배구조에서는 연금자산을 보호하기 위한 외부 감시장치로서 시장메카니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 기업에서 경영자의 대리인 행동은 주식소유자들의 주식매각이나 기업인수합병에 의해 부분적으로 규율된다. 그러나 기업연금 소유권자들은 정해진 수급연령 이전에는 급부금을 받을 수 없고, 이직을 전제하지 않는 연금계좌 이전은 연금가입 자격 상실을 의미할 뿐이다.

또 다른 이유는 연금제도에는 대리인 관계가 중층적이어서 당사자간 이해상충의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이다. 노동자가 자신의 계좌로 직접 주식투자를 하는 경우 이외에 대부분의 연금자산은 신탁에 의해 운용이 개시되며 따라서 대리인문제가 존재한다. 특히 법안의 확정급부형은 사용자가 최종 지급책임을 진다는 것을 이유로 연금사업자에 대한 규제 조항이 없다. 또 연금 계획의 설정단계에서부터 사무관리, 운용, 감독에 이르기까지 사용자에게 너무 많은 재량권을 부여하고 있다. 이는 필연적으로 연금자산 운용의 대리인 문제를 확대시킬 것이다.

한국판 뉴딜정책의 일환으로 국민연금의 주식투자가 확대되고 여기에 퇴직연금제가 가세하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자산이 주식시장에 유입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정부안은 자산을 안정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외부 감시장치가 없고, 또 사용자에게 너무 많은 역할과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연대와 참여, 노동계도 다시 생각해야

또 다른 문제는 퇴직금제도를 폐지하자는 경영자 단체들의 분명한 주장에 비해 노동계의 입장이 여전히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안정장치가 없는 상태에서 기업연금이 도입되면 연기금의 주식시장화가 초래할 위험을 노동자들이 고스란히 떠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대기업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사실상의 임금격차를 지속시키고, 또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배제하고 있는 현행 퇴직금제도 기능과 존폐에 관한 노동계 내의 동의가 없다는 데 있다. 새로운 제도 도입에 관한 다양한 노동계층 간 합의나 연대의 노력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정부안이 통과될 경우 노동계의 목소리를 담을 구체적인 법안들에 대한 고민도 거의 없다. 기업연금의 설계와 운용에서 노동자들의 참여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비정규직에 대한 사회적 보호를 확보하는 기업연금제는 어떤 형태여야 되는가? 확정기여형을 도입하면 대안은 없는 것인가? 기업연금의 사회적 투자 방안은 무엇이며 의결권 행사를 통한 기업 감시는 가능한 것인가?

퇴직연금제 법안이 그동안 노사정위원회에서 충분히 검토됐다는 정부 측의 주장을 곧이곧대로 인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약 그랬더라면 현재와 같은 절충적이고 허점 투성이인 법안이 제출됐을 리 없기 때문이다. 도입 반대로 일관했던 노동계의 준비 부족 말고도 현재의 법안이 국회를 통과해서는 안 될 이유로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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