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26일 서울 중국 태평로1가 한국언론회관 12층에서는 무려 6시간30분에 걸쳐 한국언론학회 주최의 ‘언론법 제·개정에 관한 토론회’가 열렸다. 언론·시민단체들의 언론개혁입법에 대해 시대착오적인 엘리트·계몽주의적 접근,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힌 메시아주의라는 수준 이하의 일부 발제문(임상원 고려대 명예교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발제문은 많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했다.

‘모든 언론전쟁(?)을 중지하자’는 다소 돌출적인 결론을 뺀다면, 강명구 서울대 교수(언론학)의 분석도 그 하나다. 강 교수의 논지는 ‘노무현 정권 아래에서 벌어지는 언론전쟁은 87년 이후 쇠퇴하는 옛 지배연합과 새 지배연합의 헤게모니 쟁탈전에서 언론이 대리전을 치르는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한겨레를 포함해 한국방송, 문화방송 등 역시 ‘조중동’과 마찬가지로 권투장갑을 끼고 링 위로 올라갔다’는 판단이 전제돼 있다.

하지만, 한 마디로 말해 강 교수의 이런 판단은 틀렸다. ‘조중동’은 ‘대리전’을 치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옛 지배연합을 복원·확대·강화하기 위해 직접 전투를 지휘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한겨레나 경향신문 등과 다른 지점이다. 이전에 사용했던 필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렇다.

“한국에서 수구언론은 시민사회의 일부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이다. 이전에 수구언론은 반공 파시즘 국가라는 ‘몸통’의 직접적 일부를 이뤘다. 반공 파시즘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수구언론은 시민사회의 일부로 자리잡기는커녕, 재벌을 ‘몸통’으로 하는 국가기구로 변신했다. 자신이 직접 전면에 나서서 시민사회 내부의 보수적 흐름을 한편으론 추동하고 다른 한편으론 제한하며, 탐탁치 않은 주인 아래에서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기존 ‘국가’와 맞선다.”

최근 이들 수구언론이 제기하는 이른바 ‘뉴라이트’(신우익)는 그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 신지호 서강대 교수(정치학)가 대표를 맡은 ‘자유주의연대’의 창립을 계기로, 이들 언론은 ‘자생적 자유주의 세력’이니 ‘합리적 자유주의를 지향한다’느니 ‘전향한 386’이니 하는 낯 뜨거운 개념을 마구 생산해 내고 있다. 자기 신문의 정체성을 찾을 목적에서 한국일보 역시 ‘뉴라이트’에 거의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신문의 논설위원으로 있는 한국에서 보기 드문 진정한 자유주의자 고종석씨가 통곡할 일일 것이다.

한 마디로 ‘뉴라이트’에는 새롭고 합리적인 게 없다. 수구의 논리를 그대로 빼박았다. 졸지에 전향한 극렬한 운동권으로 뉴라이트의 상징이 돼버린 신지호씨는 말한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가장 귀중하게 여기지만 그것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여야 한다. 그런 면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있는 양심의 병역 거부는 용납하기 힘들다고 본다. 사상을 통제할 수는 없지만 이것이 행동으로 이어지면 곤란한다. 즉, 국가보안법상 찬양고무죄는 없애도 되지만 잠입, 탈출 등 구체적 행동으로 표출되는 것은 제한돼야 한다”(동아일보 11월23일치)고 말이다.

딱 이 수준이다. 국가보안법을 사수해야 한다는 ‘낙동강 전선’에서 피어난 수구의 또 다른 이름이 바로 ‘뉴라이트’인 것이다. 그러니, 한국사회에 대한 비전이 따로 있을 리 없다. 있다면, 노무현 정권의 경제정책에 대해 ‘좌파적’ 내지 ‘사회주의적’ 운운하는 블랙 코미디는 단연 배격했을 터이다. 그러기는커녕 뉴라이트란 말은 오히려 그 블랙 코미디를 기꺼이 자양분으로 삼아 ‘떴다’. 아니, 수구언론이 의식적으로 부추겼다.

수구의 단골 메뉴는 뉴라이트의 것이다. 딱 하나가 있다. ‘북한 인권’ 문제다. ‘기획 탈북’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낼 만큼, 이 분야에서 그들의 자유주의는 임상원 명예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엘리트주의적이고 계몽적이며 종교적 열정을 담은 메시아주의’ 바로 그것이다. 종합부동산세에 대해서는 그 제도 자체는 부정하지 못하면서 지나치게 과격하다거나 조세 반발이 우려된다거나 하면서 온갖 꼬투리를 늘어놓으면서, 자신들이 북한 인권 문제에 접근하는 과격성에는 눈을 감는다.

그렇기에 ‘뉴라이트’는 한국 외교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을 것이다.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와 같은 일본 극우파는 미국에 대해 외교적 교섭력으로 작용하는 측면이라도 있지만, 수구극우파의 갈아탄 이름인 한국의 뉴라이트는 여전히 이런 쓸모도 없을 것이다. ‘극우파가 사대주의 성향을 보이는’ 형용모순의 비극은 계속된다는 얘기다.

뉴라이트는 한국에 일부 자유주의자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자유주의는 없음을 드러낸다. 우리 헌법에 보장된 언론자유는 ‘발행인의 표현의 자유+발행인의 경영의 자유’라고 풀이하는 그들의 독해법은 그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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