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리콥터에서 내려다보면 정글 한가운데를 흐르는 이과주강은 너무나 고요해서 마치 움직이지 않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폭포(이과주 폭포: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파라과이의 접경지역에 있는 175m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폭포)에 가까이 다가가면 물살이 얼마나 빠르고 강한지 알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세계화된 자본주의사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보트를 타고 있는 낚시꾼과 같습니다. 강은 고요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배, 즉 회사가 폭포에 가까이 가면 그때서야 다른 사람에게 경고합니다. 강은 결코 고요하지 않다고 말입니다.

2001년, 스페인의 국영 전화회사인 신텔은 하루아침에 민영화되고 노동자 1,500명은 거리로 내쫓겼다. 187일간 텐트투쟁을 하면서 노동조합 위원장은 신자유주의 시대 노동자의 운명을 ‘보트를 타고 있는 낚시꾼’으로 표현한다. 지난 주 서울국제노동영화제에서 상영된 <이과주 효과>라는 영화의 한 부분이다.

'뜨는' 영화와 소외된 '노동'

지난 주일은 ‘한가롭게도’ 노동영화를 보는 것으로 보냈다. 노동과 영화가 접목되는 현장을 보고 싶었던 탓이다. 그러나 노동과 영화의 만남이 결코 ‘축복받은 동거’는 아니었다. 국내 영화가 천만 관객에다 50%의 시장점유율을 자랑한다지만 이러한 매혹적인 상품도 앞에 ‘노동’이라는 관사가 붙으면 대책없이 팔리지 않는 상품으로 둔갑하고 말았다.

250석이 들어갈 만한 객석은 텅 비어 있었다. 첫 상영시 관객은 달랑 5명뿐이었다. 날짜가 지날수록 관객은 늘어 마지막 날에는 자리가 모자라기도 했지만 아직도 노동영화는 ‘그들만의 리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꽉 찬 관객 중에서도 알만한 노동조합 간부들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노동영화가 노동운동에 대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아니 노동영화운동도 노동운동의 한 영역이라고 주최측(노동자뉴스제작단)은 말하고 있었다. 사실을 외면하고 왜곡하는 주류 미디어에 대한 대안언론으로서, 영상미디어가 갖는 강력한 이미지를 활용한 교육매체로서, 선전·선동의 수단으로서, 그리고 조합원과의 소통수단이자 연대의 고리로서 노동영화는 기록의 의미를 넘어 존재한다.

누구는 오늘날 노동운동의 ‘위기’를 노동교육의 부재로 진단한다. 노조의 교육활동이 뜸해지면서 노동운동은 어느 순간 ‘전문가의 영역’ 내지 ‘간부들의 역할’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현장 노동자와 노조간부간 괴리가 나타나면서 노동운동은 어느 샌가 단기적인 이익에 집착하면서 사회적 연대의식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지점에서 노동영화는 그 다양한 주제로 인해 공장 울타리 너머의 세상으로 통하는 창(窓)으로 다가온다. 뿐만 아니라 ‘입’이라는 오디오를 통한 주입식 강의가 아니라 영상이라는 비디오를 활용한 참여형 교육의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한다.

대중의 바다로 나갈 길은 없는가?

“분노는 절망보다 강하다.” 역시 ‘이과주 효과’에서 어느 노동자가 하는 말이다. 공무원노조에 대한 원천봉쇄에 이어 비정규직 보호법안이 다시금 노정갈등의 중심에 서있다. 이 투쟁의 현장에서 누군가는 또다시 카메라를 걸머지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노동자의 분노에 앵글을 맞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노동자들과 현장에서 만나지 못하면 허공에다 외치는 절규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영화가 사회비평의 한 영역으로 자리매김하면서 동시에 대중과 행복한 동거를 실현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가령 영국에서 신자유주의의 도래를 알렸던 광부투쟁(1984-5)을 배경으로 노동자들의 좌절과 패배뿐 아니라 희망을 묘사한 ‘브래스드 오프’(Brassed Off)나 ‘풀몬티’(Full Monty), 그리고 최근의 '빌리 엘리오트‘(Billy Elliott)는 국내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필름으로 남아있지 않은가? 우리에게도 80년대말 노조마다 돌아가며 ’파업전야‘를 튼 기억이 있지 않은가? 지난 일주일간 노동영화제에 참가하면서 고통스럽게 뇌리를 떠나지 않는 ‘아마추어적인’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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