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르르…까르르….”
 
아이들의 웃음과 고함으로 놀이방이 떠나갈 듯 하다. 어떤 녀석은 자기가 주인공을 하겠다며 떼를 쓰는가 하면, 어떤 녀석은 ‘소품용’으로 나눠진 색종이를 엉덩이 밑에 숨겨놓고선 색종이가 모자르다고 야단이다. 멀쩡히 연습하다 영문 모르게 토라져 미끄럼틀 안에 숨어버린 녀석, 그 토라진 녀석을 보고 배꼽잡고 웃는 녀석 등등 이 ‘난장판’을 어떻게 수습할지 내심 걱정이 앞서는데 윤영미 교사(34)가 꾀를 낸다.
 

 
그건 바로, 기자를 ‘희생양’(?)으로 올려세우는 것이었다. 윤 교사가 아이들에게 묻는다.
 
“자, 지금 저 선생님은 뭐 하는 분일까요?”
“카메라맨이요.”
“뭘 막 쓰는 걸 보니, 무슨 글 쓰는 사람 같아요.”
“아니야, 인상이 험악해요. 현상수배자요.”
 
이런, 이런, 별 소리 다 나온다. 초등학교 저학년치곤 ‘대사빨’이 장난이 아니다. 남달리 험상궂은 기자의 인상 탓인지 아이들은 끝내 직업을 맞추진 못 했지만 어느새 소란스럽던 판이 ‘진압’이 됐다. 아이들은 이내 본격적으로 연극 연습에 몰입.
 
11월 17일 오후, 남구로역 인근 시장통에 있는 한 어린이집의 지하놀이방. 지역의 저소득 가정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 ‘파랑새나눔터’에 다니는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 12명이 윤영미 교사와 김여진 교사(30)의 지도에 따라 ‘모자장수’라는 연극연습에 한창이다. 대책없이 산만하던 아이들은 어느새 ‘무대의 주인공’이 되어 맡은 배역에 열중하고 있다. 이 아이들이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처럼 소란스럽던 아이들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이 지역 아이들이 얼마나 극성스러운지 몰라요. 좀 유별나요. 그래도 에너지가 넘치니까 저도 아주 신납니다. 배역을 정할 때면 서로 주인공을 하겠다고 난리죠.(웃음)” 
 
윤영미 교사는 대학에서 극작을 전공한 연극놀이전문가다. 여성자립기관과 ‘남북어린이 어깨동무’ 등에서 일했고, 지금은 교육연극전문단체 ‘놀랬지’에서 활동중이다. 윤 교사를 돕는 김여진 교사는 현직 연극배우다. 1996년 연극무대에 데뷔한 이래 현재 극단 ‘노릇밭’에서 활동하고 있다. 언뜻 들어도 ‘화려한’ 이들의 경력이 교사로서의 전문성을 말해준다.
 
파랑새나눔터의 아이들은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학원 한두 군데만 보내도 경제적 부담이 큰 가정의 아이들이 어떻게 연극놀이 전문가와 현직 배우의 지도를 직접 받으며 한판 뛰어놀 수 있게 된 걸까?
 
다소 생소하지만, 이날 ‘연극교실’은 ‘신나는 문화학교’라는 곳에서 개설한 어린이 강좌다. 지난 10월 중순 실업극복국민재단에서 문을 연 신나는 문화학교는 문화예술분야에 재능을 갖춘 ‘청년실업자’들이 문화교사가 되어 우리사회 빈곤·소외지역의 아동, 청소년, 장애인, 외국인노동자 등에게 다양한 문화예술 체험과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설립됐다.
 
‘문화예술 일자리만들기사업단’(자바르떼, JOB+ARTE)이 주축이 돼 꾸린 이 학교는 서울, 인천, 안산, 시흥 지역에 단계적으로 개설돼 현재 음악, 미술, 연극, 사진, 문학, IT컨텐츠 등 10여개 장르에서 분야별 전문성을 갖춘 50여명의 ‘청년 문화실업자’들이 교사로 활약중이다. 강좌수만도 1백여 개에 이른다.
 
갈 곳 없는 ‘청년문화백수’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동시에, 지역민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킨다는 취지다. 
 
지난 몇년 간 청년실업의 심각성은 이미 충분히 지적돼 왔다. 그 중에서도 문화예술계 청년실업자들의 문제는 더욱 난감하다. 1990년대 ‘문화빅뱅’의 시대를 거치며 배출된 숱한 문화예술계의 젊은 인재들은 그 실력과 재능에 상관없이 ‘일자리 부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실정이다. 이들 문화실업자에게 ‘21세기 문화강국’이란 표어는 허망할 뿐이다.
 
그런 가운데 이번에 개설된 신나는 문화학교가 이들에게 미약하나마 ‘숨통’을 틔워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있는 것이다.
 
“처음 캠코더로 찍을 때 바로 시작하지 말고, 3초 정도 대상을 찍은 뒤에 질문을 시작하세요. 바로 본 화면이 시작하면 굉장히 어색하거든요. 끝날 때도 ‘~했습니다’ 하면 바로 끝내지말고 2-3초 후에 중지하고요.”
 
11월 18일 저녁, 신림역과 난곡 중간에 있는 관악정보문화센터 2층. 이 곳에선 ‘관악주민연대’ 간사, ‘난곡주민 도서실’ 간사, ‘안양외국인센터’ 자원봉사자 등 관악구 주민 10여 명이 ‘다큐교실’ 수업에 열중이다. 오늘은 특히 몇 차례의 이론교육을 거친 뒤 처음으로 ‘거리 촬영’에 나서는 날이다.
 
김희영 교사(32)는 신림역 주변에서 어떤 사람이든 붙잡고 2분간 인터뷰를 해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상당수 수강생들은 ‘인터뷰’를 해본 적은커녕 당해본 일도 없는 평범한 시민들. 더욱이 캠코더 조작에도 서투른 ‘초짜들’ 아닌가. 김 교사의 지시가 부담스러울 밖에. 30여분 간 우왕좌왕 촬영해온 영상물을 감상하며 모두들 킬킬댄다. 노점상, 학생, 횟집 주방장 등 소재는 제법 다양했다.
 
다음은 한 수강생의 작품 내용 중 일부.
 
“저…이름 물어봐도 돼요?”
“몇 살인지 물어봐도 돼요?”
“이렇게 찍는 거 이상하죠?…이런 거 처음이죠?”
“사실…저도 처음이거든요.(웃음)”
 

 
‘초보’ 다큐리스트들의 ‘첫번째 품평회’는 아직은 서투를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취재력을 확인하는 것으로 끝났다. 김 교사의 지적이 이어진다.
 
“누구나 처음엔 말하기 어색하죠. 하지만 겁 먹지 말고 5분에서 10분 정도만 꾸준히 그 사람의 말을 듣고 있으면 말문이 틔어요. 그럼 이제 재미있고, 솔직한 말이 나오는 거죠. 그 다음엔 추임새만 넣어주면 돼요. 아~ 예~ 오~ 하고 말이죠. 내가 당신의 이야길 열심히 듣고있다는 믿음을 주는 거예요. 알았죠?”
 
김 교사는 수강생에게 60분짜리 테잎 두장 씩을 건네주고, 다음 수업까지 모두 채워올 것을 숙제로 냈다. 수강생들이 60분을 어떻게 다 채우냐고 아우성 치자, 자신의 ‘잠 자는 모습’이라도 찍어오란다. 강좌에 필요한 캠코더와 테잎 등은 모두 신나는문화학교측에서 제공하므로 수강생들은 그야말로 ‘열정’만 있으면 되는 셈이다.
 
다큐교실의 강의를 맡은 김희영 교사는 6년째 영상미디어 일로 ‘밥 벌어먹고’ 사는 다큐 전문가다. 진보영상 전야 출신인 그는 지난해 ‘양심수석방 교도소 순례단’ 등의 내용을 ‘로드다큐’로 직접 촬영, 편집하는 등 민중들의 투쟁과 그늘을 주제로 한 작품활동에 몰두해왔다.
 
밥을 벌어먹고 산다고는 하지만, 지난해 연봉 4백만 원 정도가 영상미디어 일로 벌어들인 ‘밥’의 전부니 정말로 ‘밥만’ 벌어먹고 산다고 해야겠다. 그가 지금 몸 담고 있는 단체의 이름도 ‘영상이야기 밥’이다.
 
지난 수년간 사실상 ‘실업자’ 수준에 가까운 경제생활을 해왔던 그인 만큼 ‘신나는문화학교’ 일이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은 당연할 터. 선생 노릇은 생전 처음인 그에게 소감을 묻자 뜻밖의 대답이 돌아온다.
 
“우리는 물론 많은 도움이 되지요. 하지만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물론 이런 문화적 욕구를 푸는 것도 중요하지만요. 사실 지금 이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어쩌면 생계에 직접적으로 돈이 되는 어떤 프로그램이 아닌가 하는 걱정 말이에요. 할 수만 있다면, 제 강의가 그런 도움도 줄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요.”
 
과연 ‘선생다운’ 생각이었다. ‘교사가 된 문화백수’에 초점을 맞춘 기자와 달리 그는 수강생들의 처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주말에 자신의 사무실에서 ‘보충수업’까지 하자고 수강생들을 꼬드기는 그의 모습은 천상 선생이다. 연극교실의 윤영미 교사 역시 “조금만 여건이 된다면 일주일에 하루를 더 투자해서 아이들을 가르쳤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문화학교 교사들에게 책정된 ‘인건비’는 사실 열악한 수준이다. 내년 4월까지 운영되는 프로그램의 총 예산이 4억 5천만 원에 불과한 탓이다. 그래서 이들 교사들의 열정을 단순히 ‘밥벌이’로만 바라보는 것은 오해다. 김희영 교사의 말이다.
 
“카메라도 결국 연필의 한 종류예요. 어떤 이에겐 그게 마우스고, 키보드라면 우리에겐 카메라라는 거죠. 제가 가르치는 건 자신이 뭘 표현하고 싶은가를 알게 하는 겁니다. 결국 나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죠. 그게 제 강좌의 목표예요.”
 
이상한 일은 이미 문화학교 강좌가 개설된 지 한달 남짓 됐음에도 어디에도 이에 대한 기사가 실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최관묵 실업극복재단 홍보팀장은 “이미 보도자료까지 뿌렸지만, 대다수 언론들은 별 관심이 없어보였다”며 “어려운 조건에 있는 문화 인재들이 어렵게 자리를 구해 시작한 일인 만큼 내년 4월 이후에도 사업을 진행할 수 있도록 많은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신나는문화학교엔 ‘정통 코스’를 밟아온 유명 문화예술가도, 애초부터 문화적 소양이 차고넘치는 수강생들도 없다. 그저 ‘가르친다는 것과 밥 벌어먹는다는 것’에 기꺼워하는 이들의 사이에 ‘문화적 허영’ 따위가 똬리 틀 틈도 없다. 그래서 이 문화학교는 ‘마이너 문화쟁이들의 잔치판’이다.
 
하지만, ‘낮은 곳’에서부터 발원한 ‘마이너의 물결’이 언제고 도도한 주류의 물결이 되리라는 것을 지금 저 ‘메이저’들은 알고 있을까.
 
*신나는 문화학교 인터넷 카페:  http://cafe.naver.com/jobarte.ca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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