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컨이 '남북 전쟁'이라는 내전을 부추긴 이유가 ‘흑인 노예의 해방’이라는 인권 차원에 있지 않음은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또한, 노예 해방 이후에, 흑인들의 인권은 그 이전보다 훨씬 더 개선됐을 것이라는 통념은 잘못이라는 사실도 그렇다. 실상은 노예 해방 이전보다 더 나빠졌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노예 해방 이전에 노예들은 말과 돼지와 같은 처지에 있다고 해도 어쨌든 일을 하면 노예주가 숙식을 제공했다. 적어도 굶어죽을 염려는 없었던 것이다.

노예 해방 이후에는 그렇지 않았다. 자유민이 된 이전의 노예들은 스스로 먹고 사는 문제를 책임져야 했다. 당시 미국 사회에는 아무런 사회안전망도 갖춰져 있지 않았다. 아니, 당시에는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이전의 노예들이 굶주려 죽었고 병들어 죽었다. 인권 상황은 노예 해방 이전보다 더 악화한 것이다.

이런 노예 해방을 둘러싼 상황에서 끌어낼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노예 해방이 단순한 통념처럼 인권의 개선을 가져오지 못했기 때문에 노예 해방은 잘못된 것이라는 결론을 유추하는 것일까, 아니면 단기적인 부작용이야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노예 해방은 궁극적으로 인권의 개선으로 이어졌으니 진보라고 옹호해야 하는 것일까. 다 아닌 것 같다. 정답은 ‘노예 해방 + 사회안전망 확보’이다. 이것이 현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상식일 것이다.

직업이 소설가인 복거일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일제 식민지 시절 조선 사람들이 ‘헐벗고 굶주리고 핍박에 시달렸다’는 통념을 깨느라 바쁘다. 오히려, 일제 식민지 시대에는 생산력이 증가했고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높아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에게 ‘친일’은 이해할 수 있는 그 무엇이 되고 친일파 청산을 경계하는 논리의 하나로까지 발전한다.

이런 주장을 노예 해방에 빗대보면 어떨까. 노예주에게 딸린 개나 돼지와 같은 처지이긴 했지만, 노예들의 생활수준은 해방 이후보다 이전이 더 높았다. 그래서 일부 노예들이 노예 해방 이후에도 노예주에 충성을 바치는 모습은 이해할 수 있는 그 무엇이 된다. 하지만, 노예 해방 문제에 대한 상식이 ‘노예 해방 + 사회안전망 확보’인 것처럼, 일제하 친일에 대해서도 ‘친일 진상규명 + 용서와 화해’이다.

신문은 공공재가 아니다?

최근 복거일씨는 ‘언론의 자유는 시장만이 보장한다’는 주장도 편 모양이다. “신문은 자본주의 체제가 발달한 사회에서 시장을 토양으로 삼아 자생적으로 출현했다”며 신문은 공공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복씨의 주장처럼, 신문을 산 사람은 다른 사람이 이를 이용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 사유재의 특징(배제성)을 신문은 지닌다. 하지만 신문에는 “한 사람이 신문을 이용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것으로부터 얻는 가치가 작아지는” 특성(경합성)도 있다고 복씨는 주장한다. 다른 사람이 신문 1부를 사보면, 내가 신문 1부에서 얻을 수 있는 가치가 줄어든다는 그의 말을 이해하려면 신비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오히려 신문은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정보를 공유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적 재화 형태의 ‘여론 상품’으로서 준공공재의 특성을 띠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신문에 실린 정보는 나누면 나눌수록 그 가치가 되레 올라간다. 정보의 독점이 막대한 부를 좌우하는 증권시장과 달리, 신문시장은 다양한 의견의 교류를 매개하는 시장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정부는 신문이라는 여론 상품에 대해 특별한 대우를 해 왔다. 신문 판매에 대해 부가가치세를 면제해온 것이다. 복씨의 논리대로 하면 이것도 “신문에 대해 본질적으로 적대적인 권력이” 검열이나 길들이기를 위해 제공하는 ‘당근’일 것이다. 하지만 할 말을 지나칠 정도로 앞다투어 하는, 심지어 말도 안 되는 주장들까지 쏟아내는 요즈음 신문들은 신문판매에 대한 부가가치세 면제로 인해 ‘길들이기’가 된 모습이 아니다.

복씨와 생각이 비슷한 신문들이 주무르고 있는 한국신문협회(회장 홍석현 중앙일보사 회장)는 신문광고에 대해 부가가치세 면세 혜택을 달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기까지 하다. 복씨의 논리대로 하면, 광고 부가가치세를 없애 ‘길들이기’를 해달라고 떼를 쓰는 모양새다.

복씨는 현재 논란이 되는 신문법이 정부가 검열을 하기 위한 법이라고 주장한다. 도대체 지금 누가 검열을 한단 말인가. 현실은 언론중재위원회가 신문보도에 대한 사후심의를 하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그에게는 신문들이 엄청난 무가지와 경품을 뿌려 독자를 확보하는 현실이 없다. 그러니 앙상한 ‘자생성’ 타령만 하고 있는 것이다.

언론뿐 아니라 한국경제, 사립학교 현실을 논하는 극우·수구파의 논리가 거의 이런 식이다. 언론을 보면 세상이 보인다. 맞는 말이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