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두와 광산, 공장에서 발원한 노동운동이 시·군·구청과 중앙정부의 사무실로까지 확장되었다. 15일부터 수만 명의 공무원 노동자들이 일손을 놓게 되었다. 그들의 임시적 고용주인 노무현 정부와 집권당은 공무원이 파업에 참가할 경우, 구속 수사는 물론 앞으로 다시는 공직에 발을 못 붙이게 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고 있다. 파면과 해임을 들먹이는 그들에게 국제적 노동기준과 민주주의는, 권력의 수족을 확실히 길들이겠다는 자신들의 확고한 열망을 자제시킬만큼의 미덕이 되지 못한다.

정부의 극한 행동의 이면에는 하나회를 정리한 YS와 영남패권을 물리친 DJ에 이어, 한나라당 일반과 조중동, 강남의 특권계층을 한꺼번에 정리해 보겠다는 자신들의 역사적 ‘임무’에 대한 과대망상이 가로놓여 있는 듯하다. 물론 이것은 열망일뿐 적당한 타협으로 권력지분을 조금 수정하는 것으로 그들은 만족할 것이다.

현재의 권력집단은 수십만의 공무원이 노조에 가입하고 합법적 집단행동의 여지를 갖게 되는 것만으로 나라가 거덜날 것으로 호들갑을 떨고 있다. 그러나 이 가련한 공포조장의 이면에는, 공무원노조가 민주노동당의 우군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권력적 계산이 깔려 있지나 않은지 의심스럽다. 혹은 조선일보와 공안기관의 일부가 그렇듯 공무원노조를 북한이나 주체사상과 연관시키려는 저열하고 불온한 사상과 맞닿아 있지는 않은가. 파시즘이 그렇듯 대화가 불가능한 폭력의 뒤에는 콤플렉스와 진실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나는 이것이 사실인지 궁금하다.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다. 정부는 자신들이 내놓은 파견 전면확대와 기간제 상한 연장의 제도화가 나라와 기업, 노동자를 모두 이롭게 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여기에 불만을 터뜨리고 법안 철회를 요구하는 노동계의 모든 주장을 편협하다고 몰아붙인다. 차별시정 장치와 과태료라는 수단이 있으니 염려 놓으시라고 주장한다.

공무원과 비정규직. 이번 노동계 겨울투쟁의 핵심 주제이다. 전자는 정년보장과 수직적 승급구조로 상징되는 정규직의 전형이며, 후자는 불확실성과 차별, 배제로 내몰리는 피억압 하층계급의 대명사이다. 그래서 공무원과 비정규직은 서로 한참 멀리 떨어진 상극의 존재처럼 비친다. 그러나 이 둘은 노동운동과 노사관계의 막바지 과제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서로 통한다.

임금노동자가 인류 역사에 출현할 당시 모든 노동자는 오늘날의 견지에서 보면 전부 비정규직이었다. 그들은 광산과 부두에서 하루하루 날품을 팔아야 했고, 뜨내기 이주노동자요 일용노동자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들은 대공업과 독점자본의 성장이 탄생시킨 집적과 축적의 그늘에서 오히려 단결과 연대를 키워갔다. 그리고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세계 각국의 노동자계급은 단결권과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대부분의 민주공화국에서 성문헌법 혹은 지극히 당연한 관습헌법상의 핵심 권리로 굳혀 놓았다.

더구나 정당한 이유가 없이는 고용주라도 맘대로 해고할 수 없게 됐으며, 국가는 실업자와 병든 사람, 일하다 다치거나 퇴직한 노동자에게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할 의무를 지게 됐다. 국가는 이 비용의 상당부분을 고용주의 부담으로 충당하도록 했다. 노동3권과 일방적 해고로부터의 보호, 사회보장 수급권을 온전히 누리는 노동자가 바로 정규직이다. 이것은 노동운동이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며 거둬온 주요한 역사적 성과물이다.

임금노동에 있어서 정규직 고용의 원칙을 세우기 위해 노동운동은 제조업의 블루칼라로부터 시작해서, 화이트칼라 사무전문직, 서비스업, 공공부문으로 노동조합의 영역을 넓혀 나갔다. 그 종착지가 바로 공무원이었다. 실제 노동사학자들은 오늘날 정규고용의 전형이 프랑스의 공무원제도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도 말한다. 그러므로 공무원은 노동조합운동의 직선적 발전도상의 극점에 위치한 주체이다. 우리나라의 민주노조운동도 전노협과 업종회의, 대공장연대회의에서 시작해서 서비스와 공공부문으로 그 영역을 확장해 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 중소영세기업과 여성노동자, 비정규직이라는 노동운동의 미개지가 또한 남아 있다. 그들은 노동운동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힘에 부쳐 놓쳤거나 아직 도달하지 않은 곳에 서 있다. 어떤 측면에서는 앞만 보고 직선으로 달려온 노조운동의 반성 지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공무원노조와 비정규직 노동자는 어느 것을 먼저라고 할 수 없는, 동시적 과제이다. 공무원의 노동3권을 포기해서도 안되고 비정규직의 정당한 권리보장을 소홀히 해서도 안될 것이다. 물론 이 둘 모두 엄청난 노력과 희생 없이는 얻어지지 않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여기에 21세기 우리나라 노동운동과 노사관계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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