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추적 비 내리는 10일 오후 국회 국민은행 앞. 거리 곳곳에 처량하게 처박혀 있는 물먹은 낙엽처럼 하나둘씩 생겨난 각 단체의 천막이 줄지어 서 있다. 10여동에 이르는 천막은 사립학교법개정, 언론개혁, 국가보안법철폐, 장애인이동보장법 제정과 장애인교육예산 확보, 성매매 종사자들의 생존권 등 다양한 요구를 내걸고 있다.
 
‘비정규공대위’와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은 이날 천막농성을 진행하려다 경찰에 의해 제지당하며 천막을 치지 못했다. 하지만 이들은 11일 저녁 재차 천막을 칠 태세다. 또 15일부터는 민주노총이 주말 노동자대회의 여세를 몰아 ‘비정규법안 철폐’ 천막농성에 가세하고, 한국노총도 여의도 문화마당에서 천막농성을 진행할 방침이다. 
 

 
달력 한두 장을 남겨둔 이맘 때면 해마다 한두 동의 천막농성장이 있어왔지만 올해는 유난히 많다. ‘진정한’ 개혁을 열망하는 제 시민사회 단체와 민중들의 ‘생존권’ ‘기본권’ 요구가 그만큼 들끊고 있는 것이다.
 
경찰은 이미 지난 3일과 10일 두 차례에 걸쳐 ‘철거’ 등으로 천막농성을 제지한 바 있고, 12일 이후엔 ‘강제철거 하겠다’는 입장이지만 농성단체들은 아랑곳하지 않는 분위기다.
 
“벌금은 무서우니, 차라리 잡아가라고 그래.” 엊그제 영등포구청에서 ‘불법건축물’에 대한 철거 계고장이 날아 왔는데 방해하면 30만 원 이하의 벌금이란다. ‘장애인 등의 이동보장법률 제정과 장애인 교육예산 확보를 위한 공동농성단’ 참가자들은 전경버스 문을 체인으로 묶어 철거를 무력화했듯, 이미 이골이 난 듯 보였다.
 
이들은 장애인 이동권과 교육권을 요구하며 지난 10월 말 이후 천막농성을 진행하고 있다. 이들은 2005년도 장애인 교육예산 6% 이상 확보와 저상버스 도입 의무화, 국무총리실 산하에 장애인이동정책위원회 설치, 시정청구권 보장 등을 요구하고 있다. 정부의 법률안이 실효성 없는 권고에 머물 뿐 의무조항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 농성단은 10일 오후 한나라당 대표실을 기습 점거해, 장애인정책에 당론조차 없이 ‘묵묵부답’인 한나라당의 태도에 항의하고 있다. 여의도 천막은 올바른 장애인 정책대안을 요구하는 ‘전초기지’인 셈이다. “한강물에 빠져죽을 각오로 임해야죠.” 천막농성단의 박영희 공동대표는 “3년여를 싸워 17대 국회까지 왔는데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다”며 각오를 다졌다.
 

 
10여일 간의 파행 끝에 한나라당이 등원결정을 했고, ‘국회정상화’가 이뤄졌다. 기대감을 물었다. “사실 등원해도 걱정이에요. 하루에 처리하는 안건들이 수십 건에 이르고, 결국 졸속· 날치기 처리될 가능성이 높죠. 정치권을 신뢰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우리의 목소리를 강력하게 내야죠.”
 
정국은 ‘파견법 등 비정규 악법 철폐, 공무원노조 노동3권 쟁취, 국가보안법 철폐’ 등 굵직굵직한 현안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로 인해 장애인 이동·교육권 등의 문제가 주목받지 못하는 것에 농성자들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게 아니고 열받는 측면이다.”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정부정책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또한 진보진영도 장애문제 등에 대해 보다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
 
장애인 이동권, 교육권 공대위의 요구를 받아 안은 법률안을 민주노동당 현애자 의원이 대표발의를 했지만 거대여야의 힘겨루기 과정에서 이 법이 통과될 가능성은 낮다. “우린 걷고 싶다.” 인간으로써 누릴 당연한 장애인의 권리 요구에 정치권은 화답하고 있지 못하다.
 
“집 잘 지켜요.” 박영희 대표가 잠깐 자리를 비운다. 이 틈에 기자도 일어나 천막농성장 주변을 서성거렸다.
 
국가보안법 철폐연대 소속 단체들은 여러 채의 천막을 쳐놓고 농성을 진행중이다. 매일 저녁 6시 집회가 진행되는 가운데 이날은 ‘국가보안법 철폐 천주교연대’가 집회를 열고 있었다. 손에 손에 촛불을 든 수십여명의 참가자들은 ‘형법보완’이 아닌 완전한 철폐를 주장하고 있었다.  
 

 
국민은행 맞은편, 외로이 서있는 천막 두 동이 눈에 들어왔다. 옛 한나라당사 횡단보도 앞에는 “군 의문사도 과거사청산법에 포함시켜라!”는 요구를 내건 ‘올바른 과거사 청산을 위한 범국민위원회’가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정부가 녹화사업, 민주화운동 관련자 군복무 중 사망 및 실종사건 등 전반적인 군의 문제를 과거청산법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군 의문사를 배제하고 있는 (진실규명) ‘기본법’이나 군 사망 사건만을 다루는 ‘군 의문사법’에서 보듯 열린우리당에는 진정한 과거청산 의지와 개혁의지는 이미 실종되었다.” 민주노동당 이영순 의원실이 지난 10일 낸 논평은 여당의 불철저한 개혁을 질타하고 있었다.
 
정부와 여당의 ‘개혁’의 불똥은 ‘성매매 여성’들도 겨냥했다. 옛 한나라당사 앞 버스정류장 부근의 푸른색 비닐 천막 안에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단식이 이어지고 있었다.

‘전국 한터 여종사자 단식투쟁.’ 10여명의 집창촌 여성 대표들은 지난 1일 이후 ‘성매매특별법’ 단속에 항의하며 열흘째 단식을 이어가고 있었다. 일부는 병원으로 실려 가고, 탈진한 사람들은 어둠이 내리기 전 일찌감치 쓰러져 있었다. 한기가 올라오는 바닥에 스티로폴을 깔고, 침낭과 모포에 의지한 채였다.
 


 
“우리에게도 부양가족이 있다. 생존권을 보장하라!” “정부는 우리에게 약속한 유예기간을 보장하라!” “우리를 두 번 죽이는 여성단체들!” 곳곳에 나부끼는 현수막과 푯말만이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며 종종걸음치는 사람들은 야속하게도 비닐 속 풍경에 관심이 없는 듯 눈길 주기를 꺼려했다. 세상과 단절된 벽이 되어버린 얇은 비닐 속에서 성매매여성들은 그렇게 힘없이 누워 있었다.
 
집창촌을 겨냥한 대책없는 단속에 항의하며 이들은 다음날인 11일 천여명이 모인 집회를 가졌다. 참가자 일부가 삭발을 단행하는 등 그들의 항의 수위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뿌연 안개가 드리워진 ‘정가’ 여의도는 그야말로 ‘오리무중’이다. 열린우리당은 소위 4대개혁 입법을 연내 추진할 의지를 계속 밝히고 있지만 언론개혁, 국보법 형법보완, 과거청산법, 사립학교법 등이 ‘허울 좋은 껍데기’임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비정규 개악안, 공무원노조법도 정부와 여당은 물러설 의사가 없어 보인다.
 
‘껍데기는 가라’는 노동시민사회단체들의 외침은 커져만 가고 있다.
 
“비정규악법 철폐하라!” “국가보안법을 완전 폐지하라!” “사립학교법을 민주적으로 개정하라!” “장애인 이동권 보장 법률을 즉각 제정하라!” “장애인 교육 예산을 확충하라!”
 
‘말로만 개혁’을 외치는 정부여당의 개혁 실종은 민중을 피곤하게 만들고 있고, 이에 항의하는 여의도 천막은 날이 갈수록 불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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