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안의 일이 복잡한데다 빠르게 돌아가는 통에 나라 밖 사정은 도통 거들떠 보기가 어렵다. 물론 신문이나 TV뉴스에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얻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사건에 배여 있는 깊은 사연과 짙은 냄새를 맡을 수 없어 늘상 허전하기 일쑤였다. 며칠 전 일본을 다녀오면서 이런 생각은 더욱 분명해졌다. 실제 일본 노동자들의 현실과 꿈을 있는 그대로 보고 나름대로 가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과제는 어디에 있고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를 그들을 통해 숙고할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일본 방문의 목적은 <매일노동뉴스> 10월22일자에 나온 대로 ‘일한민주노동자연대’(대표 나카무라 다케시) 창립총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모임을 격려해주고 한국의 노동사정을 얘기해달라는 내용으로 이 모임을 준비해온 나카무라 다케시(전일본항만노동조합 관서지방건설본부 부위원장)씨가 매일노동뉴스 박승흡 발행인과 함께 필자를 초청한 데 따른 것이었다.


나카무라 다케시-현해탄 넘어 연대의 철교를 놓다

10월26일 한일민주노동자연대가 결성되던 날은 온종일 가을비가 내렸다. 회의장에는 어림잡아 100여명의 노동자들이 두 시간 이상을 자리를 메웠다. 시작 분위기는 약간 긴장돼 보였다. 처음 인사말에서 나까무라씨는 회의장 정면에 걸려 있는 투쟁복 세벌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운을 떼었다.

“이 옷을 동지들에게 입혀보려고 이 모임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어 나카무라씨는 노동운동에 들어선 이후 처음으로 ‘부’짜를 떼게 되었다고 하면서 웃어보였다. 긴장한 참석자들의 표정에도 대견스러워 하는 웃음이 번졌다. 맨날 부위원장, 부지부장만 지내다가 처음으로 대표를 맡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는 벽에 걸려 있는 걸개그림을 소개하였다.

거기에는 그의 사진과 함께 “단결· 투쟁·연대”, “우리의 영원한 동지 나카무라”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민주노총 전북지역본부가 15년 넘게 보내준 그의 지원과 헌신을 고마워하며 건네준 것이었다. 민주노총 전북지역본부 명예지도위원으로 위촉받았다고 말할 때 그의 얼굴에는 수줍음과 함께 자랑스러움이 스쳐갔다.

체험으로 느낀 '국경 없는 연대"

그의 한국 노동운동에 대한 열정은 광적이랄 만큼 남달랐다. 그 인연의 끈은 1989년 전북 이리(지금은 익산시) 수출자유지역에 있는 아시아스와니 노동자들의 폐업반대투쟁에서부터 시작했다. 한국에서의 투쟁소식을 들은 그는 ‘오오사카 일본·조선공동투쟁위원회’의 지원투쟁에 기꺼이 참가했다.

90년 2월 오오사카 지역에서 1천여명이 넘는 대규모 지원집회를 열기도 하고 3개월간 교섭위원들의 일본 체류를 도와 끝내 교섭을 마무리하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큰 교통사고가 났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지원을 계속하였다. 투쟁이 끝난후 아시아스와니 노조 양희숙 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번 투쟁을 통해 우리가 확인한 것은 노동자에게는 국경이 없으며 노동자의 단결이야말로 무엇보다 큰 힘이다.”

그후 그의 일상사는 한일연대가 큰 자리를 차지했다. 매년 민주노총 전북지역본부와 정기교류를 갖고 11월 전국노동자대회에는 대규모 참관단을 이끌고 참가했다. 그 밖에 중요한 집회와 시위 때는 언제나 그와 일행을 만날 수 있었다.

한국 레미콘 노동자들의 투쟁을 적극 돕기도 하였다. 그는 국내의 민주 진보단체들 - 민변, 전태일 기념사업회, 민주화투쟁유가족협의회,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민주노총 서울본부, 한국비정규노동센터,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등등 - 을 드나들면서 유대를 모색하였다.

한국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그의 열정은 한국말 공부로 이어졌다. 통역의 번거로움을 벗어나 자유롭게 한국을 이해하고 싶어서였다. 마침내 김금수 선생이 쓰신 200여쪽의 ‘간부활동론’을 비롯한 좋은 글들을 일본말로 번역해서 돌리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올해 나이 벌써 회갑, 정년으로 회사를 그만뒀지만 한일노동자 연대를 향한 그의 집념은 여전히 강하였다. 그 결과물이 ‘일한민주노동자연대’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여기까지 이끌어 온 것인가? 이미 20대 후반에 그는 후지다건설회사노조에서 민주노조 회복 투쟁을 줄기차게 벌인 경험이 있지만 40년에 가까운 노동운동을 이번 일로 결산하려는 것 같았다.

그의 목표는 오로지 일본 노동운동을 되살리고 싶은 열망으로 모아져 있다. 곧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한국의 민주노조운동과의 연대 교류활동을 통해 일본 노동운동의 활성화, 민주화, 그리고 재생에 기여”하기 위해서이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 노동운동을 배워 올 수 있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기관지 이름도 ‘철의 노동자’다. 그의 집에는 민주노총 전북지역본부와 청계피복노조의 감사패가 가지런히 놓여 있고 늘상 한국의 노동가가 흐르고 있었다.

한국 민주노동운동에 던지는 질문

민주노조운동을 향한 열망은 나카무라씨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다른 노동자들의 표정과 얘기에서 역력했다. 곳곳에서 한국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관심과 기대는 매우 커보였다. 노조 사무실에는 어디가나 한국어판 노동운동 벽보가 붙어있고 그 내용은 일본어로 번역되어 있었다.

우리가 흔히 목청을 높이는 “세상을 바꾸자”는 건배는 새로움으로 다가가 있었고 우리가 만난 사람 가운데 한국말을 더듬거리면서 말하는 사람은 나카무라씨 이외에 여섯이나 되었다. 노동자 가운데는 재일동포 2세, 3세들도 있었다. 결성대회에서 통역을 한 이동석씨는 1970년대 재일교포유학생간첩단사건으로 5년간 감옥살이를 하였다. 일제 때 끌려가 뼈저린 가난과 모멸과 차별을 견디며 살아남은 그들의 눈에서는 한국 민주노동운동에 대한 기대가 궁금증과 함께 강렬하게 일고 있었다.

노동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언론매체로서의 <매일노동뉴스>와 한국노동사회연구소와 같은 ‘싱쿠탕쿠’(think tank의 일본식 발음)의 존재를 신기해 하였고 개중에는 부러워하는 사람도 꽤 있어 보였다.

일본 노동자들의 절절한 갈망에는 일본 노동운동이 처한 슬픈 변화가 서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패전 후 일본 노동운동은 질풍노도와 같이 급격히 성장했다. 사회변혁의 꿈을 내세우며 전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 그것은 '신화'일 뿐이었다. 1989년 일본 노동운동은 “분열과 갈등의 세기”를 정리하고 천하통일을 이뤘다. 그것이 렌고(連合)이었다. 하지만 비판과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진보적 민주적 노동운동의 힘이 부쳐 보수 우익진영에 흡수되었다든가, 우익재편성이라는 지적이 그것이었다. 이들은 렌고 가맹을 거부하고 따로 조직을 세웠다. 그러나 그 조직은 적었고 전체적으로 일본 노동운동은 가라앉았다는 냉소가 번져 있다. '경제대국 생활빈국'이라는 지적은 그 결과였다.

이에 대해 나카무라씨는 일본의 노동운동이 사회개혁의 이념을 상실했다고 했지만 경기호전과 일본 노동운동의 개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몇몇 간부들의 탄식은 같은 맥락으로 생각되었다.

우리는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가

이러한 그들에게 한국의 노동운동의 역동성은 관심의 대상이며 일부는 부러움의 대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 건재하는 민주성, 투쟁성, 역동성을 그들은 갈망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들을 감동적으로 보여주는 것만으로 일본 노동운동의 활성화를 위한 한국 노동운동의 몫을 다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과연 일본 노동자들이 그토록 기대해 마지 않는 한국 민주노동운동은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 그래서 일본 노동운동의 활성화를 응원할 위치에 있는 것인지 겸허하게 끊임없이 되새김질해 봐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날 짧은 연설에서 필자는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로 일한민주노동자연대가 일본 노동운동 부활의 그루터기가 되기를 기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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